길/다른길 이야기

광주 오월길 답사기

청풍헌 2020. 1. 20. 20:40

광주 오월길 답사기

마음속에 품은 것이 있었다. 5.18, 언젠가는 회원들과 함께 답사 길에 올라 실체적 진실을 알고 싶었다. 2년 전 주마간산으로 본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소쇄원의 기억이 또렷했다. 책에서, 언론에서 소문으로 들은 것과는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내가 직접 걸으면서 당시를 느끼는 것이 훨씬 더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답사가 필요한 것이다, 답은 현장에 있다는 말이 진리다.

년 중 걷기는 1월과 8월에는 방학이다. 그 방학을 이용하여 광주 오월 길을 기획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이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그래도 민주화의 산실인 이곳을 꼭 방문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대법원 확정판결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일부 정치권의 부정으로 이슈화되기도 했다. 실체적 진실이 필요하다.

8명이 07시에 출발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전남대학교 정문에 10시경 도착했다. 오월 지기와는 10시에 약속했다. 전남대학교 정문이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점이다. 사적지 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쯤에서 518 민주화 운동 연표를 살펴보자. 1961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19791026일 수족과 같은 부하에게 총격을 당하여 피살되었다. 1980년은 민주화의 봄이 왔다. 독재의 억압에 억눌렸던 민주투사들이 민주화의 봄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514일 대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결의하고 15일 시위대는 서울역에서 회군을 결정하였다.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탄압을 했다.

518일은 민주화 운동이 발발한 날이다. 전남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무차별하게 체포 구타하는 일이 일어나 분개한 학생들은 7공수 부대원들과 정문에서 투석전을 벌였다. 19일 공수부대의 첫 발포로 부상자가 생기자 그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시위 현장을 목격한 운전자들은 20일 차량으로 시위를 하고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는 언론을 탓하며 광주MBC가 불탔다. 이때에도 발포로 다수가 사망하였다. 21일에는 KBS도 불탔으며 13시경 도청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신호로 집단 발포를 하였다.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54명이 죽었으며 다수가 다쳤다. 이를 본 시민들은 계엄군이 가진 M16 소총에 쓰러지는 동료를 보고 맨몸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무장을 하기로 한다. 광주 외곽에서 파출소 무기고에서 총기를 꺼내와 시민군으로 등장했다. 이에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물러나 광주는 시민군의 손에 들어갔다. 22일 시민군들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려 활동을 시작했다. 무기를 회수하기로 결의하고 총기를 회수했다. 대부분 무기를 반납했지만, 일부는 자위 차원에서 거부했다. 24일 계엄군들 간 오인 사격이 일어나 많은 수의 군인들이 죽었다. 24, 25일도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다. 26일에는 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정보로 어린 학생과 부녀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외국인들이 철수하고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광주로 진입했다. 27일은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들이 민주주의를 위하여 장렬히 생을 마감한 날이다. 03시에 시내로 진입한 계엄군은 04시에 도청에 진입하여 05:10에 진압 작전을 완료했다. 이로써 10일간의 광주 민주화운동이 계엄군의 무차별한 총격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1982년에는 시민군의 대변인인 윤상원 군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있었다. 이때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작곡되어 불렸다. 이후 이 노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1987년에는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었으며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국가반란수괴 협의로 구속되었다. 1997년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이후 이날이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2011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화운동이 되었다. 2018년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구성원으로 놓고 정치권에서 다툼으로 지지부진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걸음에 클린 워킹은 필수다. 자연스럽게 쓰레기 봉지를 지급하고 가져간 플래카드를 펼쳐 사진을 찍었다. 함께 온 광주 지인은 전남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시고 이순신 전문가이며 통제영 사적지 변천과 활용방안이라는 논제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연락되어 함께 걷기로 했다. 광주의 지리를 잘 모르니 오월 지기를 따라 광주 시내를 걸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40년 전 광주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걸었던 길이다.

첫 번째 방문지인 전남대 정문은 5.18의 시발점이다.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대학생의 데모를 진압하기 위하여 전남대로 진주한 7공수 부대는 대학생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사전교육에 의하여 대모 대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적군이라는 진압 교육을 받고 눈에 불을 켜고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훗날 학교 안에서 죽음을 발굴하였다.

두 번째 목적지인 광주 역으로 향했다. 광주 역은 계엄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던 곳이다. 520일 밤 계엄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고, 21일 아침에 죽음이 발견되어 도청 앞 광장으로 시신 두 구를 운구하여 항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40년의 세월 앞에 광주역의 붐비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한산했다. 광주역 앞 대로변의 소나무는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세 번째 방문지는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지금은 백화점이 들어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지하도까지 따라와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러 지하도 벽은 피로 얼룩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소식은 버스를 타고 곳곳에 전파되어 전남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네 번째 방문지는 5.18 최초 발포지다. 이곳에서 계엄군이 최초로 발포를 하여 고등학생 한 명이 총상을 입어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극도로 흥분하여 항쟁이 한층 거세졌다.

다섯 번째는 광주 MBC 옛터다. 계엄 아래에서 엄격한 언론 통제로 현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광주MBC가 불탔다. 다음날 KBS도 같은 이유로 불탔다.

여섯 번째 방문지는 녹두서점 옛터이다. 녹두서점은 투사회보를 만들던 곳이다, 투사회보는 민주화운동의 소식지를 제작하고 이곳에서 각종 대책 회의 및 현수막을 만들었다.

일곱 번째 방문지는 금남로다. 금남로는 광주의 가장 중심도로다 금남로는 금남군 정충신을 기리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계엄군은 물러가라며 전남도청 앞에 진을 치고 계엄군을 향하여 시위를 계속했다. 차량 시위를 하던 중 13시경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신호로 일제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시민이 총탄에 쓰러져 죽었다.

여덟 번째 방문지는 5.18민주광장이다. 전남도청 앞이며 분수대가 있는 금남로 중심에 있다. 이곳에서 시국선언대회와 각종 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40년 전 분수대는 그대로이며 철거했던 시계탑도 30년 후 다시 이곳에 복원 설치되었다. 좌측에 있는 상무관은 옛 도청 체육관으로 이곳에 시신을 안치했던 곳이며 도청 별관이 항쟁 지도부가 마지막으로 산화한 곳이라 한다. 이곳도 아시아 문화전당을 세우며 많이 훼손 되어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금남로에서 점심을 먹고 5.18 기록관으로 갔다.

아홉 번째로 간 5.18 기록관은 관련된 기록을 모아놓은 곳이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유네스코는 2011년 제10차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59건의 기록물을 20115255.18민주화운동 기록물로 올렸다. 이로써 5.18민주화운동이 세계가 인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총탄 자국 및 태극기. 시신 이동용 구루마. 대동 세상을 상징하는 양은 대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민주, 인권, 평화, 대동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열 번째 방문지로 국립 5.18 민주묘지로 향했다. 금남로에서 택시 3대에 나누어 타고 전남대로 이동했는데 세 대 다 택시 요금이 달랐다. 이곳에서 승합차로 이동했다. 국립묘지에 분향 신청을 미리 했었다. 우리는 입구에 모여 앞 참배자들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천천히 이동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조곡 형식으로 웅장하게 흐르는 제법 긴 거리를 천천히 올랐다. 조곡이 울려 퍼지는 그 길을 가는 동안 자못 엄숙해졌다. 분향대 앞에 서서 안내자의 설명을 들었다. 마이크로 통영 길 문화연대가 분향을 한다는 안내와 함께 대표 분향 자인 내가 향을 세 번 올리고 일동 경례와 묵념을 했다. 이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발전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5.18 추모관으로 이동하여 당시의 영상을 봤다. 무차별 총격으로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죽음들과 진압봉으로 내리쳐 피가 흐르는 광경을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시신을 덮은 태극기와 피 묻은 옷들이 당시의 처참함을 말해준다. 다시 묘지로 갔다. 기구한 사연의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억울하게 죽은 목숨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총탄을 맞고 실려 온 임산부는 절명했으나 배 속에 있던 아기가 숨을 쉬고 있어 큰 병원에 가면 아기만이라도 살릴 수 있다고 병원을 가려고 하니 계엄군이 곤봉을 내리쳐 막아 결국 배 속의 아기와 함께 절명했다는 해설사의 말에 절로 눈물이 났다. 들불야학의 선도자 박기순 양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군은 합장묘였다. 이들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결혼 행진곡이 님의 위한 행진곡이다. 사진이 봉안된 유영 봉안소에 들러 사진을 확인하고 나왔다.

열한 번째로 간 곳은 5.18구 묘지다. 구 묘지에는 상무관에서 안치되어 있던 시신을 청소차에 싣고 와서 아무렇게나 묻었던 시립묘지다. 이후 국립묘지가 조성되어 이장을 하고 이곳은 민주 열사나 노동 열사가 묻혀 있는 민주화의 성지 같은 곳이다. 묘지 입구에는 전두환 비석이 바닥에 깔려 밟고 올라가게 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광주의 진실을 서방에 알렸던 위르겐 헨츠페트의 추모비가 있었다. 중앙의 제단에서 묵념하고 답사를 마쳤다.

우리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책에서 이야기로만 들어서 여러 의문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북한군이 폭동을 일으켰다느니 적색분자가 난동을 일으켰다느니 하는 말들을 한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인정하고 대법원에서 판결로 인정을 했으며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화 운동이다. 세계 각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하여 광주를 찾으며 최근 일어난 홍콩의 시위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려질 만큼 세계적으로 알려진 민주화운동이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큰 물줄기를 이룬 이곳이야말로 꼭 한번 답사를 하여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

2020118일 광주 오월 길을 걷고


http://www.518.org/file/02.mp3(님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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