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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南原과 지리산 聖母 天王

청풍헌 2020. 4. 19. 19:56

고려 시대 南原과 지리산 聖母 天王

김갑동 대전대학 인문학부 부교수

 

1. 머리말

2. 남원부의 성립과 토성

3. 지리산 신사의 연혁

4. 지리산신 신격의 변화

5. 지리산 신사의 성립과 기능

6. 맺음말

 

 

 

1. 머리말

 

사상을 지배하는 자가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전근대 사회에서 국가지도자는 제사장을 겸하였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불교가 성행했었고 또한 토착 신앙까지 유행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山神信仰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고려 시대 남원부의 탄생과 지리산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남원부의 설립 배경과 土姓分定에 대하여 알아보고 지리산 聖母天王의 실체와 그 역할에 대해서도 추구해 볼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지방사회의 모습과 중앙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2. 南原府의 성립과 土姓

 

남원은 백제의 古龍郡이었으나 통일신라에 이르러 남원소경이 되었다. 고려조에 남원부가 되었다.

 

1.남원소경은 본래 백제의 古龍郡인데 신라에서 이를 아울러 신문왕 5년에 차음으로 소경을 설치하였다. 경덕왕 16년 남원소경을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남원부다. (三國史記36 지리지3 전주 남원소경조)

2. 남원부는--(중략)--신문왕 4년에 소경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 16년에 남원소경으로 고쳤다, 태조 23년에 고쳐 로 삼았다. (高麗史57 지리지2 전라도 남원부조)

 

위의 사료에 따라 남원소경은 신문왕 2년에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고려조에 남원부가 되고 그때가 태조 23(940)이다. 태조가 이곳에 남원부를 설치한 것은 이 지역이 소경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주둔 시켜 인근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인근 9개의 군현을 예속 시켜 막강한 邑勢를 자랑하였다. 9개의 속군현은 임실군, 순창군, 장계현, 적성현, 거령현, 구고현, 장수현, 운봉현, 구례현 등이다. 더불어 土姓도 분정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土姓續姓을 구분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土姓來姓으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來姓을 타지방에서 전입한 성씨이다. 토성 중에 ()씨가 있는데 견훤의 일족으로 생각되며 이곳에 사민 시키고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한 수단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중앙에서 벼슬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토성인 남원양씨. 남원진씨 등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벼슬을 하였다.

 

3. 지리산신사의 연혁

 

智異山은 원래 頭流山·地理山·方丈山으로 불리었다. 지리산은 신라 오악 중 南嶽으로 숭배되었다. 삼국사기 제사지에 中祀에 편입되어 숭배되었다. 소재지가 菁州라고 했는데 菁州는 다시 경덕왕대 康州로 개명되었다. 고려 현종 때 晉州牧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리산은 지금도 전남북과 경남에 걸쳐있는데 통일신라기에도 전주, 무주, 강주의 경계에 있었다. 강주는 하동군, 거창군, 궐성군(현 산청군)康州 菁州이므로 菁州에 있다고 기록했다. 통일신라의 남악신사는 천왕봉에 있었다. 고려왕조가 성립되면서 남악신사는 노고단 쪽으로 옮기게 된다.

 

지리산의 주신은 성도성모이며 또한 노고단이라 불린다. 우리 태조(왕건)가 늘 이곳에서 기도하여 지리산신의 감몽을 받았으므로 남악사를 남원소의방(구례)으로 옮겨 세웠다. 길상봉(노고단)은 또한 문수봉이라 불리는데 지리산 3봉 중 祖峰인 까닭에 남악사를 이곳에 세운 것이다. 지금도 그 遺基가 있다. (조용호, 동방, 성산문화사, 1989, 2,021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지리산신의 실체는 선도성모인데 신사는 천왕봉에서 노고단 근처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신사를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옮겨오는데 도선 스님이 큰 역할을 하였다.(帝王韻紀下 本朝君王世系年代 先代紀) 이승휴는 성스럽고 지혜 있는 성모가 도선을 시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에게 명당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지성모가 지리산의 천왕 즉 산신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이때 지리산 신사를 남원으로 옮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초에는 노고단의 신사는 세조 3(1457) 더 낮은 곳으로 옮겼다. (구례읍지) 국가적인 신사는 노고단 근처에 있었지만, 신상은 천왕봉에 그대로 있었다. 김종직의 續東文選에 두류산에 올라 경험을 기록한 책에 천왕봉의 신사가 엄천리 사람이 고쳐 지은 것이라 했다. 이는 고려조에 노고단으로 옮겨진 신사가 이후 새로 지어져 민간차원에 제사를 지내는 신사로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4. 지리산 신격의 변화

 

지리산 천왕봉에는 산신사가 있었고 신상은 성모상이라 했다. 그 성모가 선도산 성모라 한다. 구례속읍지에는 지리산신을 마야부인이라고도 했다. 이승휴의 帝王韻紀에 성모는 지리산천왕이며 이는 곧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라 했다. 위숙왕후는 왕건의 어머니로 夢夫人이라고 하다가 후대에는 한씨부인이라고 했다. 위숙왕후는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어 신비감을 더하였고 고려를 창건한 왕건이 이러한 성모의 아들이라 한 것은 국조에 대한 신앙과 숭배의 차원이었다. 고구려의 하백녀를 모신 사당이 있었으며 고려에도 하백녀를 모신 東神堂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왕건의 선대인 호경도 산신으로 추봉되어 신사를 세웠다. 高麗史高麗世系평나군의 사람들이 호경을 봉하여 대왕이라 하고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 지냈다. 9인이 함께 죽어 산 이름을 九龍山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 사당을 호경사라 하고 목은 이색이 평나산 호경사에 분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고려 시대에 국조신앙의 일환으로 지리산신이 위숙왕후라는 설이 나오게 되었다. 또 마야부인이라는 설과 함께 팔도 무당의 시조라는 설도 있었다.

 

5. 지리산신사의 설립과 기능

 

1) 지리산신사의 성립과 역사적 배경

노고단에 신사가 옮겨진 것은 태조 말년으로 보인다. 왕건은 일찍부터 불교와 함께 토착 신앙도 깊이 믿었다. 훈요 10조에 짐은 삼한 山川陰佑에 힘입어 대업을 성취했다라고 하고 있다. 또 팔관회를 크게 장려했다. 팔관회는 八關齋·八戒齋라고도 불렀는데 그날만은 불교의 팔계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훈요 10조에 연등회와 팔관회는 같은 불교 행사지만 연등회는 순수 불교 행사이고 팔관회는 불교보다 토착 신앙을 더 중시하는 행사였다. 팔관회는 天靈 五嶽·名山·大川·龍神을 섬긴다고 했다. 이 오악이 신라의 오악으로 국가의 祀典에 포함되었다. 후삼국 통일 후 44년째 되는 해에 남원부도 생기고 노고단에 새로운 신사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의 土姓집단은 새로운 정부에 입신하기 위하여 지리산 성모를 위숙왕후로 삼고 협조하여 남원양씨나 남원진씨 등이 중앙으로 진출한 것이다. 晋含祚(진함조)는 내부시랑까지 올랐으며 梁稹도 좌복시에 올랐다. 이처럼 남원의 토성은 지리산신을 위숙왕후로 설정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2) 지리산신의 기능

 

지리산신 즉 성모는 고려의 호국신으로 되었다. 그것은 왜구의 침략과 격퇴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다. 최영의 홍산대첩이나 이성계의 황산대첩, 정지의 남해대첩이 그것이다. 정지의 남해대첩 때 비가 와서 전투에 매우 어려움을 겪자 지리산신에게 빌어 그 陰助로 전투에 승리를 이끌었다. 高麗史鄭地傳“---(전략) 남해의 관음포에 이르러 정찰한 다음 아군이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비가 내렸으므로 정지는 사람을 보내어 智異山神祠에 기도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달렸으니 나를 도와 비를 멈추게 하십시오하니 과연 비가 멈췄다.” 이처럼 산신은 비를 다스리게 했으며 병을 낫게 해주는 기능도 했다.

 

6. 맺음말

 

첫째 남원은 백제의 古龍郡이었다. 통일신라에 와서 남원소경이 되었고 고려 태조 23(940)에 남원부가 되었다. 남원부는 9개의 속현군을 다스렸다. 그리고 土姓分定되었는데 남원양씨, 남원진씨 등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인이 되었다.

둘째 지리산은 오악중 하나인 南嶽이다. 그 신사는 천왕봉에 있었는데 康州에 속해 있었다. 고려조에 도선의 말에 따라 신사를 노고단으로 옮기고 그 위치는 남원이므로 남원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국가 차원의 노고단 신사와 함께 민간차원의 천왕봉의 신사도 따로 존재했다.

셋째 지리산신은 여성이다. 신라에서 숭배하던 선도성모라는 설이 있다가 고려조에 위숙왕후가 등장했다. 위숙왕후는 고려를 창제한 왕건의 어머니이므로 일종의 國祖信仰 때문이라 생각된다. 고려말에 지리산신이 마야부인이라는 설이 존재했으며 팔도 무당의 시조라는 설도 생겼다.

넷째 노고단 밑에 새로운 신사가 생긴 시기는 고려 태조 23(940)이다. 이때 남원부가 성립되면서 지리산 신사가 건립된 것이다. 토성으로 분정 된 지역 호족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위숙왕후를 지리산신이라 설을 제기했다. 이를 발판으로 중앙의 관직에 진출했다.

다섯째 고려 시대 지리산신은 국조신앙에서 나왔으므로 국가를 수호하는 기능이 있었다. 降雨를 조절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기능도 있었다. 정지장군의 남해대첩 때 지리산신에게 비를 그치게 빌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처럼 국가 수호신으로 역할을 했으며 병의 治癒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7. 의견

 

지리산의 법계사는 이런 사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노고단의 신사는 어디일까?

노고단 아래의 신사는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