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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남산과 奬忠壇

청풍헌 2020. 5. 3. 21:19

대한제국기 남산과 獎忠壇

박희용(서울학 연구소 수석연구원)

 

. 서론

. 명성황후의 기억공간, 장충단

1. 장충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2. 명성왕후에 대한 기억과 장충단

3. 장충제향의 시작과 끝

. 장충단, 제단인가 사당인가

1. 장충단의 장소성과 건축형식

2. 장충단의 건축 구성과 공간 성격

. 결론

 

 

. 서론

 

대한제국은 고종이 18971012(음력 917) 圜丘壇에 나아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출발했다. 그리고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정동은 대한제국기 근대적 변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그러나 앞서 1895108(음력 820) 명성왕후가 일본의 자객에게 시해되는 을미지변이 일어나고,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잠시 이어 하게 되면서 정동은 근대기 격변의 중심지로 부각될 수 있었다.

명성왕후를 추모하는 기억공간은 동대문 밖 청량리에 홍릉이 있지만, 도성 안에도 남산 기슭의 장충동을 중심으로 한 장소에 또 하나의 기억공간을 만들었다. 즉 장충단을 만들어 1년에 두 차례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면서 명성왕후를 기억하는 공간을 도성 안에 조성했다. 장충단은 표면적으로는 갑오년과 을미년에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장병들을 기리고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장소였지만, 그 저변에는 명성왕후에 대한 기억을 표상하는 장소로 만들어 이 일대를 일반 시민들이 인식할 수 있는 성역화 된 장소로 꾸미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한편 장충단은 그 건축형식이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되지 않고 있다. 장충단의 인식적 범위가 아닌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했는지, 건축 구성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장충단이 제단의 형식인지 사묘건축을 하는 형식인지 등에 대해서는 모호한 상태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진행하였다.

 

. 명성왕후의 기억공간, 장충단

 

1. 장충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장충단이 만들어진 시기를 기록한 문건은 황성신문, 장충단영건하기책, 고종실록, 대한계년사등이 있다. 먼저 황성신문에는 19001031일 자 광고 기사에 장충단을 설치하고 음력 919일에 치제 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1112일에는 이틀 전에 장충단을 설치하고 갑오이후 전사한 군인들을 치제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이틀 전이면 1110일인데 이날은 음력 919일이므로 이날은 제사를 지낸 날이다. 대한계년사에도 919일에 단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로써 장충단이 만들어진 시기는 적어도 음력 919일 이전이다. 한편 고종실록에는 1027(음력 95)에 장충단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있음으로 이때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다른 기록인 忠壇營建下記冊에는 광무 4(1900) 729~ 1115일에 1차 공사가 완료되고 이듬해인 1901320~ 627일에 최종적으로 완료했다고 한다.

 

2. 명성왕후에 대한 기억과 장충단

 

장충단이 건립된 1900년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지 5주년이 되는 해이다. 따라서 갑오년과 을미년에 희생된 군인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 명성왕후에 대한 기억을 도시공간에 은유적으로 각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유추해보면 고종실록“1900년은 왕후가 만 50세가 되는 해이므로 슬픈 마음이 다른 해보다 남다르다라고 했으며 이해 들어서 충신들의 제사를 건의하여 원수부에서 진행하고 을미년 변란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또한 뮈텔주교 일기에도 명성왕후와 관련된 동일한 기록이 있다. 이 무렵 명성왕후의 홍릉이 지리가 좋지 못하여 천봉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순종 12년에 묘적산 금곡으로천장된 후 고종도 이곳에 안장된다. 장충단의 초혼제 때 제1위에 홍계훈을 제2위에 이경직을 올린 것은 둘 다 을미지변 때 죽은 충신들이다.

 

3. 장충제향의 시작과 끝

 

장충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봄·가을로 제사를 했다. 19회를 제향했으며 19001110일 처음으로 제향한 후 19091015일 마지막 제사가 되었다. 제향이 중단된 사유는 1910822일 식민지로 전락한 것과 1908년 칙령 50享祀釐正件(향사이정건)에 의하여 중단되었다고 하는데 19091015일 마지막 제향이 있은 후 안중근에 의하여 피살된 이토의 추도식이 장충단에서 거행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 장충단, 제단인가 사당인가

 

1. 장충단의 장소성과 건축형식

 

장충단은 광희문 안 옛 남소영 터 일원에 조성하였다. 건축형식은 고종실록으로 만들라는 기록으로 단은 주변보다 약간 높여서 만든 터를 말한다. 즉 단은 을 기리기 위한 장소로 성스러운 영역을 조성한 성역화된 장소를 의미한다. 장충단 공원 평면도와 박문사 건립을 위한 설계도를 보면 장충단은 사당인 단사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이 배치되어있는 영역을 말한다.

 

2. 장충단의 건축구성과 공간성격

 

장충단의 건축은 忠壇營建下記冊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내기지와 외기지가 있으며 내기지는 목책으로 외기지는 쇠밧줄로 둘러쳐진 울타리다. 또한, 장충단비까지는 직선으로 도로가 있어 인공적으로 낸 것이다. 단사는 3층의 축단 위에 15칸이다. 그 외 전사청, 장무당, 양위헌, 고직처소, 사졸처소, 측간, 석교와 목교 등 여러 시설물이 있었다.

 

 

. 결론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 장충단의 조성시기와 건립배경, 그리고 건축적 형식과 공간구성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장충단은 기존 연구와 여러 관련 자료를 검토한 결과 고종실록에 기록된 19001027(양력) 최초로 조성된 것으로 고려된다. 이후 장충단 맞은편에 장충단비가 건립되는 등 크게 두 차례의 조성과정을 통해 전체 일곽이 완비되었으며, 최종 완성은 19016월 무렵으로 판단된다.

장충단의 조성배경은 갑오년과 을미년 등에 희생된 일반 군인들을 기리는 목적만이 아니라 을미지변과 함께 명성왕후에 대한 기억을 도시공간에 새김으로써 대한제국 위상과 황권을 일반 시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장소로 계획되었다. 그리고 장충단 제향은 19001110(919) 최초로 지낸 이후 19091015일 마지막으로 제향이 거행되어 총 19번에 걸쳐 시행되었다. 한편 이곳에서의 제향은 19091026일 안중근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으로 인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이 114일 장충단에서 거행되는 등 더 이상 대한제국에 충을 요구하는 상징공간이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의해 폐지된 것으로 고려된다.

장충단은 조선시기로부터 군인들의 훈련과 군영시설 등과 관련된 장소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남소영은 도성 내에서도 가장 넓은 試射의 장소였다. 따라서 이러한 장소에 충의 공간을 조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장충단은 건축형식에 있어서 넓은 영역에 인공적인 넓은 단(축대)을 만들어 구성했으며, 축단 위에는 여러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장충단의 공간구성은 물길(남소문동천)을 중심으로 장충단과 창충단비의 영역이 구분되고, 장충단 영역은 다시 외기지와 내기지로 영역이 다시 구분되었다. 장충단에는 가장 중심적인 건물인 단사를 비롯하여 장무단과 양위헌, 요리정, 전사청 등 여러 부속건물이 동향을 하며 입지했고, 제향 공간이라는 엄숙하고 정적인 느낌의 공간구성이 아닌 다소 자연스럽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구성을 했던 것으로 고려된다.

 

주제어: 대한제국, 장충단, 명성왕후, 이토 히로부미

참고문헌

1. 고종실록, 순종실록,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2. 황성신문, 매일신문, 동아일보등 신문기사

3. 황현 저(김준역) 매천야록, 교문사, 1996, 10

4. 정교 저(조광 역), 대한계년사, 소명출판2004, 6

5. 忠壇營建下記冊」 『규장각(4204-43)

6. 증보문헌비고, 신증동국여지승람

7. 장지연, 위암문고, 국사편찬위원회, 1971, 3

 

8. 뮈텔주교일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2

9. 통감부문서

10. 국가기록원소장 도면

11. 김영상, 서울육백년2, 대학당, 1994

12. 김해경, 일제강점기 장충단공원 변화에 관한 시계열적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1권 제4, 2013

13. 민덕식, 민영환의 글씨, 박물관보, 2006

14. 박희용, 대한제국의 상징적 공간표상 원구단, 서울학연구40, 2010

15. 박희용, 대한제국기 장충단의 조성배경과 공간구성, 서울과 역사93, 2016.6

16. 백종기,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4

17. 안종철, 식민지후기 박문사의 건립 활용과 해방후 처리, 동국사학, 2009

18. 이민원, 대한제국의 장충사업과 그 이념: 장충단과 모충단을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 구, 2012

19. 이상배, 장충단의 설립과 장충단제, 지역문화연구4, 2005

20. 이욱, 조선후기 전쟁의 기억과 대보단 제향, 종교연구, 2006

21. 이윤상, 고종 즉위 40년 망육순 기념행사와 기념물, 한국학보111, 2003

 

. 의견

장충단 제향이 폐지된 이유 중 1909114일 이토의 추도식이라 했다가 결론에는 이토의 장례식이라 했는데 추도식과 장례식을 차이가 있는데 어느 것인지 궁금하다. (황성신문 확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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