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여행 이야기

대마도 역사탐방3 통한의 길

청풍헌 2012. 4. 1. 14:58

교류 소통의 길도 있었으나 통한의 길도 있었다.

면암 최익현은 남의땅 이곳 대마도까지 귀양와서 죽었다.

면암은 포천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 했다.

대쪽같은 성품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상소를 올려 여러번 옥살이를 했으며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려 소흑산도의 우이도에 위리안치 된다.

이후 풀려나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과 을사조약(한일 의정서)을 규탄하는 글을 올렸으나 한계를 느껴

태인에서 임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다 일인에게 체포되어 대마도로 귀양오게 된다.

최초로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던 수선사에 순국지비가 세워져 있다.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귀인 양씨에게 얻은 옹주로 조선말의 비운의 공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일본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은 고종은 덕혜를 황실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하나 

결국 일본 학교로 가야 한다며 일본으로 끌려가 학교를 다녔다.

일본학교에서 이지메(왕따)를 당하여 조발성 치매(몽유병)를 앓다가 치료하여 

1931년 5월 대마도주의 양아들인 소 다케유키(종무지)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된다.

결혼후 대마도를 방문하는데 대마도의 조선인 단체에서 이 비석을 세워 봉축을 했다고 한다. 

결혼후 딸 마사에(정혜)를 낳고 병세가 악화되어 1955년 종무지와 이혼을 하게된다.

이후 이 비석을 쓰려트려 방치 했는데 해방후 한국 관광객이 늘어나자 다시 이곳에다 세웠다고 한다. 

봉축비의 옆면에는 발기인 및 당시에 건립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이 적혀있다.

좋은 시절 태어 났으면 더 없이 행복하게 살았을 덕혜옹주는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66년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1989년 한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만년에 낙서를 한 글귀가 가슴을 저민다.

"나는 낙선재에서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출처: 조선왕릉 연구원

금석산성내 봉축비 가는길 안내 팻말

면암의 시신은 백제의 비구니 법명이 세웠다는 수선사에 안치되어 장례를 치르고 부산으로 운구했다.

"국가에서 선비를 기른지 500년에  시력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로 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내 나이 80에 가까우니 신하된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죽고 사는것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분연히 일어섰으나 일본군의 내통으로 관군의 습격을 받아 아군과 싸울수 없다는 생각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되어 대마도로 귀양 왔다.

대마도에서 최익현은 단식를 하여 죽으려고 했으나 이를 두려워한 일인들이 음식 경비는 조선에서 대고

억지로 갓을 벗기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고서야 음식을 들여 명줄을 이어갔다.

처음 이즈하라에 도착한 면암을 잠업학교 교사의 집에 머물다가 도웅장개의 집에 있었으며

경비대의 숙소로 옮긴뒤 병을 얻어 이국땅 대마도에서 치욕스런 생활을 하다 순국한다.

이후 한일 양국의 뜻있는 사람들이 1986년 이 순국비를 세우고 참배를 했다.

이 장소가 협소하여 민단에서 단체를 만들어

참배 장소를 건립하고자 했으나 일본의 거품경제로 어려움이 있어 지금껏 이 자리에서 다례식을 지낸다고 한다.

수선사에 5일간 안치되었던 시신은 부산 초량 항구로 운구 되었는데 면암의 뜻을 받들어

삼판선을 내어 운구하면서 '이 배는 조선의 배요, 이땅은 조선의 땅입니다.' 하고 혼을 위로 했다고 한다.

상례를 치를때 수만장의 만시(죽은 사람을 슬프하며 지은시)가  들어 왔는데

그중에 또다른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의 시가 압권이었다.

 

부상에 거꾸러진 바다는 아득한데

설교엔 무지개가 한 길 높게 뻗었다네

세상을 떠났으니 나라 위한 귀신이 될테지만

살아서 원로가 되지 않고 되려가 버리셨나?

구리 낙타 땅에 팽개쳐져 험한 바람 거세고

학이 하늘로 솟구치니 그믐달이 서늘하다

고국에 산이 있어도 빈 그림자만 푸르리니

슬프다. 선생의 뼈는 어디에다 묻으리오?

             면암선생의 영전에 통곡하다<매천집 권4>

 

최익현의 영구를 모시고 나갈때 춘추대의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이라는 글을 써 높이 달았다고 한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이종묵.안대희>에서 참조

수선사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의 글씨이며 절 입구의 문옆의 박공은 치밀한 조각으로 되어있다.  

 

그외에도 찾아보지 못한 곳은 신라사신 박제상 순국비이다.

신라 실성왕 원년(402) 신라는 왜와 통교 관계에 있으며 내물왕의 아들 마사흔이 인질로 잡혀갔는데

눌지왕이 박제상을 보내 환국을 요청 했는데 이곳 대마도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마사흔을 귀국시키고 자신은 죽임을 당한다.

이렇듯 충절을 지킨 인물을 길이 지키고자 한국과 대마도 학자들이 뜻을 모아 신라사신 박제상 순국비를 세웠다.

 

통교와 교류의 역사도 있었지만 이렇게 통한의 역사도 엄연히 존재한다.

다시는 이런 통한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그 사실을 직시하고 알려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역사는 왜 존재 하는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바로미터이다.

 

2012.3.25 대마도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