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여행 이야기

대마도 역사탐방2 소통의 길

청풍헌 2012. 4. 1. 05:04

대마도는 부산에서 49.5km의 거리에 있는 일본 보다 더 가까운 곳이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부산 다대포에서 수영으로 횡단 했으며(1980.8.11)

이후 연애인과 같이 거제 장승포에서 18명이 릴레이로 헤엄쳐 대마도를 횡단 했었다.(2000.8.29)

거제도 구조라에서는  집을 짓는 자재를 대마도에서 싣고 왔다 했으며 

아직도 한국땅이라고 굳게 믿고있는 많은 사람이 있다.

이제  대마도와 교류 소통의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부산 국제여객 터미날에있는 비틀호 발권 창구다.

비틀호는 선가가 약 500억원으로 3~4m의 파고에도 1시간 10분이면 거뜬히 항해가 가능한 수중 부양선이다.

조선 역관사 위령비이다.

1703년 음력 2월 5일 정원 108명의 역관사가 탄 배는 아침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향해 출발 했으나

급변하는 날씨 때문에 이 항구를 목전에 두고 조난 전원이 사망하는 비참한 해난사고를 당한다.

그 기록은 소오씨 가문의 문고사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초로 선린 우호의 의미로 역관사의 이름이 세겨진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의 뒷면과 당시 역관사가 타고온 배의 형상이다.

 

3월의 날씨답지 않게 바람이 매우 심하며 파도가 일고있다.

당시 음력 2월 5일이면 지금쯤 때인데 이런 파도이면 십중팔구 조난을 당했으리라.

차가운 바다에 조난당한 우리의 선조를 생각하니 머리가 숙연해 진다.

옆에 세워진 한국 전망대.

이곳에서는 부산이 보이며 휴대폰도 터진다는 곳이다.

특히 야간에는 부산의 광안대교 불빛이 훤히 보이는 곳이다.

와타즈미 신사이다.

이 신사는 해신을 모신곳으로 도리이가 북쪽을 향하여 바다로 되어있는 구조로

일설에는 한국을 향하여 있다고 한다.

만조시에는 도리이가 약 2m만 수면위로 나와 신화의 세계를 연출한다.

지금은 물이 빠진 바다가에서 본 모습.

태평사의 범종이다.

이 종은 조선의 기술자가 주조한 종으로 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현판이다.

태평사에 있다는 무연지제영비

언젠가 전갑생의 역사방에서 읽은  비석을 찾았다.

이곳은 여행코스에 없는곳이라 가이드에게 사전에 위치를 알아보고 지도를 구하여 아침 일찍 혼자서 나섰다.

비석의 전면

 

'철사로 묶인 5명의 시체를 보았다.'1950년 쓰시마 신문 기자였던 아카시씨의 증언이다.

거제도 지심도 앞바다,욕지도,다대포 등지에서 수장된 시신이 떠밀려 온것이다.

보도연맹원을 수장시킨 때가 1950년 7~8월 쯤이니 2~3개월 떠 다니다가 해류를 타고 이곳 대마도로 떠밀려 왔다.

당시에 직접 사진을 찍었는데 동경 어느 잡지사에 사진을 넘겼다고 했다.

당시의 신문에 손과 발이 묶인 시신이 밀려와 이즈하라 경찰에 인계했다고 보도 되었다. -전갑생의 역사방-

비석의 뒷면

지인의 도움으로 위와 같이 번역함.

국분사를 찾았다.

이곳은 조선통신사의 숙소가 있던곳이다.

국분사는 나라시대 호국기원 사찰로 건립되고

산문은 조선 통신사 객사 건립시 건립 되었으며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이곳이 조선 통신사의 객관이 있던 화양관 터다.

이 객사는 명치시대에 해체 되었다.

국분사의 본당이다.

절 위쪽에 납골당이 있는데 이곳에 이완용의 친필 비석이 있다.

대마도 출신의 국분상태랑은 이등박문의 비서로 한일합방의 조약문을 작성하여 훈장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후 이완용이 비문을 써 주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 가보지 못했다.

하천변에 타일로 그려진 조선 통신사 벽화

조선 통신사 행렬도

금석성 가는길에 있는 조선통신사지비

조선 전기에 보낸것은 통신사라 하며 후기(임진왜란이후)에는 조선통신사라 한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문화 사절단이다.

通信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말이다.

조선후기 애도막부의 요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 까지 총 12회에 걸쳐 애도막부로 간 사절단이다.

조정의 국서를 지참한 정사,부사,정사관 및  300~500여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5~7개월동안 대마도를 경유하여

막부의 심장부 까지 가면서 구름 같은 관중을 몰고 다닌 현대판 한류의 중심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2년도에 세웠다.

같은 장소에 있는 성신지교린비.

아메노모리 호슈는 대마도에서 일생을 바친 조선국 담당 외교관으로 선린 교류를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만찬 석상에서 아메노모리 호슈 같은 선린을 강조한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는

언급을 하여 재조명된 인물이다.일본 최초의 한국어 교본을 만들었다.

 

고려문이다.

조선 통신사를 성대하게 접대하기 위하여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하여 조선 통신사의 문이라고도 한다.

화재로 소실되어 이곳에 다시 복원했다.

이름만 고려문이지 양식은 일본의 양식이다.

실제 많은 여행객들이 고려문이면 우리나라의 양식을 한 전통 한옥을 생각하는데

단순히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기 위하여 통과한 문이라 고려문이라 했다고 하니 건축 양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 여행객 일원도 이게 무슨 고려문이냐 요즘같이 좋은 시대에 한옥의 자재를 싣고와서

근사하게 지으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

대마도 박물관에 전시된 종은 조선종의 양식으로 주조되었다.

유일하게 명문이 세겨진 최고의 범종으로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두루마리 그림

청도기를 선두로 악사,무인,통역사,정사,부사 및 소동 500여명의 조선통신사를  대마도 번주가 호위하며 행렬하는 모습이

화려한 색채로 그 16.58m나 그려져 있다

부산 아가씨의 손톱 매니큐어 색깔까지 보인다는 대마도가 영도 우체국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즈하라 시내의 13곳에 이런 비석이 있는데 모두 1811년(순조11년)년으로 되어있다.

이는 마지막 통신사가 일본 본토에 입국하지 않고 막부에서 접반사가 대마도에 와서 행사를 치렀기 때문에

막부의 관리가 묵은 주택 등을 표시한 것이다.

 

통신사는 일본 막부정권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대에서 예를 다함.)정책 때문에 본토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비는 서산사의 경내에 있는 학봉 김성일의 시비이다.

선조 23년 (1690)에 서인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인 부사 김성일을 정탐차 통신사롤 보냈는데

돌아와서 보고 하기를 황윤길은 토요토미의 침략을 대비를 해야 한다고 했으며

김성일은 그 반대로 침략할 인물이 못된다고 보고를 했다.

결국 선조는 김성일의 말(동인)을 신뢰하여 무방비로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후일 선조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노하여 김성일이를 몸소 국문을 할려고 하자

같은 동인 유성룡이 변호하여 겨우 국문을 면 하였다고 한다

지금 백성이 매우힘든 지경에 일본이 침략한다고 하면 국방을 강화하여 백성이 힘들것이 라고

김성일이는 말 했다고 유성룡의 징비록에 기록되어있다.

 학학봉 김성일은 1538년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 속칭 내앞 마을에서 태어나 1593년에 세상을 떠나니 쉰여섯의 세수를 누렸다.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며, 뒷날 류성룡, 정구, 박광전, 조목, 우성전과 더불어 대표적인 퇴계의 문인이었다.

임진왜란 중에 벌인 의병  활동중 진주성 방어 작전에서 죽었다.

一堂簪蓋兩邦臣     한 마루에 의관 갖춘 두 나라 신하
區域雖殊義則均     구역은 달라도 의리와 법식은 고르다네.
尊俎雍容歡意足     술자리에 조용한 용모 환영의 뜻 만족하니
傍人莫問主兼賓     옆 사람들이여 주인과 손님을 묻지 마시오.

 

 

“학봉 김성일 선생은 유향(儒鄕)인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덕행과 훈업(勳業)이 청사에 빛나는 도학자

(道學者)였다.  대과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선생은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

를 위하여 국가 외교와 문화사절로 일본을 향한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대마도에 들려 선위사(宣慰使) 현소승(玄蘇僧)의 영접을 받고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 동안 서로 시

                        를 주고 받는데 그 중 서산사와 사연이 깊은 시 한 수를 골라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서산사는 조선통신사의 숙소를 사용했던 곳이다.

승려 겐쇼(현소)는 임진왜란때 조선 침략의 첩자로서 도요토미의 부름을 받고 그 수하가 되었다.

학봉 김성일이 통신사로 갈때 동행 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와의 국사와 역관사 자격으로 종군 하였다.

서산사는 사찰로서보다 다른 이유로 해서 우리나라와 관련을 맺는다.

이 서산사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인 대마도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일종의 숙소이다.

대마도에는 조선통신사를 위해 숙소로 하고 또 조선외교의 실무를 전담하는 관저로서

이떼이안(以酊庵)이란 이름의 별도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떼이안이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바람에 이떼이안이 세이산지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세이산지)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 통신사탑 옆에 있는 연리지다.

연리지는 두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흔히 남여의 사랑에 비유되며 부모사이 친구사이 이웃사이에 이르기 까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하나로 이루어 진 나무이다.

이 나무가 여기에 있는 깊은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

한일 양국이 서로 협력하고 선린지교로써 교류해 나갈때

연리지의 사랑은 이루어 질 것이다.

 

2012.3.25 대마도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