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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김일룡 향토사 산책- 17 - 통제사 재임 대수는 총 208대가 아닌 209대, 제36대 통제사는 변사기(邊士紀)였다

청풍헌 2012. 8. 17. 22:54

김일룡 향토사 산책- 17 - 통제사 재임 대수는 총 208대가 아닌 209대, 제36대 통제사는 변사기(邊士紀)였다

한산신문 | han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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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7.20 15:4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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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즉 통제사(統制使)의 시말은 대략 이러하다.
 
원래 조선 초기 삼남지방의 수군제도는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 충청도에 각각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약칭 水使)를 둬 그 해역을 각기 관할했다. 그러다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개전 초기부터 육군은 왜적의 파죽지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편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결성한 연합함대로 옥포, 사천, 당포, 당항포, 한산해전 등에서 연이은 승첩을 거두어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지위가 동급인 각 수사간의 지휘체계가 난맥상을 드러내자, 그 이듬해 수군의 보다 원활한 통합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각도 수사들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신설하게 된다. 즉 선조26년(1593) 8월 15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수군을 아울러 통섭하는 통제사 직을 겸임케 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 후 초대 통제사 이순신에 이어 제2대 원균, 3대 이순신(재임), 4대 이시언(李時言), 5대 유형(柳珩), 그리고 6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옛 두룡포(頭龍浦)로 옮김으로써 비로소 조선 후기 약 300년간 조선수군의 본영이 제대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종32년(1895) 7월 15일 통제영이 폐영되었으며, 제208대 홍남주(洪南周) 통제사가 그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사였던 것으로 요약된다.
 
'통제사선생안(統制使先生安)'은 이러한 역대 통제사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여러 편이 전해지고 있다. 그 문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35대 김응해(金應海) 통제사(1646.3~1648.3월 재임)와 제36대 유정익(柳廷益) 통제사(1650.1~1652.8월 재임) 사이에는 상당한 공백 기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인조26년(1648) 3월부터 효종1년(1650) 1월까지 약 1년 10개월(22개월)이 비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발간된 '통영시지'를 비롯한 각종 향토지의 '통제사 연표'에서도 모두 동일한 기록들을 싣고 있다.
 
원래 통제사는 종2품의 무관직으로 임기는 2년이었으나, 역대 통제사의 평균 재임기간이 약 1년 6개월 미만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분명 1대가 누락 또는 삭제되었을 개연성이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왜적의 침략을 방비하는 변방의 최고위직인 통제사, 즉 오늘날의 해군작전사령관에 해당하는 중요 보직이 장기간 직무대행자도 없이 비어두었을 리가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의문과 함께 세병관, 충렬사, 제승당을 비롯한 곳곳에 산재한 역대 '통제사 선정비(善政婢)'는 물론, '통제사 좌목(座目)'과 각종 '통제사 선생안'을 조사했으나, 결국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위의 통제사 공백 기간에 해당하는 효종 즉위년(1649) 7월 16일자에 이런 기사가 있다. '과거에 중국배가 통영 앞바다를 지나가는 것을 통제사 변사기(邊士紀)가 병선을 보내 잡아왔는데 배에 타고 있는 장사치들은 대부분 중국의 산서, 하남, 형주, 양양 사람들이었다. 배에 실린 재화와 약재의 값어치가 여러 천금이었는데 조정에서 상인과 재화를 청나라의 사신에게 주어 북경으로 보내게 하였다.' (「先是漢船過統營前洋統制使邊士紀發兵船追獲之...」효종1권, 즉위년 7월 계유. 참조)
 
이 기사의 '통제사 변사기'는 종래의「통제사 선생안」과 '연표' 등에 전혀 등재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통제사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그와 관련한 기사들을 종합하면 변사기는 1643년 평안병사, 1646년 훈련도감 중군, 1648년 통제사, 1650년 수원부사, 1651년 회령부사 및 남병사를 각각 역임했으며, 그리고 그해 12월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각종 사료들을 바탕으로 실제 통제사를 역임한 인물을 재구성하면 제35대 김응해 통제사(1646.3~1648.3월)가 2년 임기를 마치고 총융사로 승진했으며, 이어서 제36대 변사기(邊士紀) 통제사(1648.3~1649.11월)가 1년 8개월 재임 후 수원부사로 이임하자, 곧 11월 4일 원숙(元潚)을 통제사로 발령했으나 도임하기 전인 12월에 전격 교체되어 제37대 유정익 통제사(1650.1~1652.8월)가 약 2년 8개월간 재임했던 것으로 정리된다.
 
'김자점의 옥사(獄事)'로 불리는 이 역모사건의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원래 김자점은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된 이래 승승장구하여 영의정에 까지 올라 국권을 천횡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게 되며,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장차 조선이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임을 몰래 알리는 한편, 양국 사이를 계속 이간하여 청나라의 대군이 국경에 배치되고 그 진부를 힐문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때 김자점의 역모를 고변하는 상소가 잇따르고 그의 아들 '식'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자백되어 아들과 함께 모두 처형된다. 그의 무리 가운데 전임 통제사 변사직은 당시 수원부사로 있으면서 그가 거느린 군사들을 동원하여 함께 거사하려 했던 죄로 공초를 받다가 곤장을 맞아 죽고, 그의 두 아들과 동생 또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김자점은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행위 등 당시 사림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해 그 후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이렇게 제36대 통제사를 역임한 변사기가 김자점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국사범으로 처형됨으로써 그의 이름이 '통제사선생안'에서 영구히 삭제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로써 실재 통제사 재임 대수는 종래의 제36대 유정익 부터 제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모두 1대씩을 늘려서 셈해야 하며, 마지막 통제사 또한 제209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