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통제영의 필요조건 원문성(轅門城)은 어디인가?

청풍헌 2013. 5. 20. 05:35

통영의 관문인 원문성(轅門城)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곳을 통제영의 적지로 삼은 이유가 육상 해상의 요충지로써

육상은 원문만 막으면 들어 올 수 없으며

해상은 견내량과 판데목만 지키면 천혜의 요새가 되는 곳이라 이곳 두룡포에 통제영을 열었다.

 

최근 세병관 사적지를 복원중인데 아울러 통영성도 재조명 되고있다.

통영향토사연구소 김일룡 소장님의 향토사 강좌와 통영길문화연대와 통영인뉴스의 통영성 걷기가 활성화되고

남문까지 복원 된다고 하니 통영성곽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통영에는 통제영을 들어오는 관문인 원문성(轅門城)이 있다.

통영 거제로 들어 올려면 이곳을 지나지 않고는 들어 올 수 없었다.

원문성(轅門城)이 어디에 있었으며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다른 병영성에도 원문이 있었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아울러 고지도와 문헌도 살펴보고 그 위치를 가늠 하고자 한다.

 

 

1.원문성에 대한 기록

2.고지도에 표기된 원문성

3.현재 존재하는 원문성 유구

4.추정되는 원문성 문루 위치

5.다른 병영성에 존재하는 원문성

6.차후 과제

7.참고자료

 

1.원문성(轅門城)에 대한 기록

 

 

1)여지도서 경상도 통제영

(여지도서는 1757년(영조 33)∼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서 성책한 전국의 읍지이다.)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城石築周圍以丈計之則一千一百七十三丈以尺計之則一萬一千七百三十尺以步計之則二千三百四十六步高以丈則一丈半以尺則十五尺垜七百七堞南門二層樓東西門各一層樓北門東西暗門竝無樓東西北炮樓三處 轅門二層樓自門左右抵海以石築塞左邊長一百五十一步高十三尺右邊長二百二步高十三尺自營北距十里 池一在南門內長二十步廣十步深三尺一在北門內長十步廣七步深三尺一在運籌堂東邊下長十五步廣七步深四尺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여지도서 경상도 통제영 성지편)

 

 

성(城)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장(丈)으로 재면 1,173장(丈) 자(尺)로재면 무려 11,730자(尺)나 되고 보(步)로 계산하면 2,346보(步)가 된다.높이는 장(丈)으로 한장(丈)반 자(尺)로는 15자(尺)이다.성가퀴는 707첩(堞)이다.남문은 이층의 누문이고 동 서문은 각 1층이며 북문은 동서에 암문(暗門:숨겨서 몰래 통하는문)을 두었으며  누(樓)는 없다.동,서,북쪽에 포루 세곳이 있다.

원문(轅門)은 2층 누각이다.원문으로부터 왼쪽과 오른쪽은 바다에 닿았는데 돌을 쌓아 막은 성채의

왼쪽은 길이 151보(步) 높이 13척(尺) 오른쪽은 길이 202보(步) 높이 13척(尺)이며

통제영으로부터 북쪽으로 10리 거리이다.

 

여기서 왼쪽과 오른쪽은 어떤 방향인지 살펴보자.

향토 역사관 입구에 있는 지도는 1872년 지방지도-통영지도이다.

좌파수(서파수)는 남망산 쪽이며 우파수(동파수)는 동충쪽이다.

경상 좌수영은 동래(부산)이며 경상 우수영이 통영이다.

전라 좌수영은 여수이고       전라 우수영은 해남이다

이는 기준이 임금이 있는 북쪽에서 바라본 방향이다.

 

그러므로 원문성의 왼쪽은  원문만이며 오른쪽은 북신만이다.

그러므로 원문만에서 원문까지151보 이며(좌)

북신만 바닷가 에서 원문(轅門)까지 202보이다.(우)

 

여기서 척(尺)과 장(丈),보(步)의 관계를 현재의 기준에 적용해 보자.

옛 척도의 단위는 10,000리(釐)=1,000푼(分)=100치(寸)=10척(尺)=1장(丈)이다.

여기서 문제는 척과 보의 관계이다.

 

조선시대 길이 기준에 대하여 알아보자.

1자 = 척(尺)

자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모습의 상형문자(象形文字)이며 처음에는 18cm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모든 국가의 법제가 갖추어 지던 시기인 한나라때 23cm정도,보다 더 정교한 법령체계가 갖추어지던 당나라 때는 24.5cm정도로

신라에서는 당나라 관제를 따랐으며 이때부터 5cm정도 더 길어져 대략 30cm전후가 되었다.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규정 했으나 세종 13년과 28년에 확정된 도량형 제도가 그 뒤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 되면서 31.22cm로 사용했다.

이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을 낼 수 있는 황종관을 표준기로  삼은 것으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나타낸 것이다.

1902년 곡척으로 바뀌면서 30.303cm로 현재까지 통용되나 1963년 계량법 제정으로 현재 계산 단위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기준

1자 = 1척 = 10치[寸]=31.22cm

 

보步

보통 성인 남자의 발걸음 기준이다.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1보를 표준 척도의 6척으로 정했으며

이는 성곽을 측정할때 주로 사용하고 견포의 길이를 재는데도 사용했다.

1444년(세종 26) 이후 6척이 1보로 정해졌다.

 

조선시대 1보 = 6척 = 187.32cm 

(김치연 박사 상명대 교수)

 

여지도서 통제영에 표기된 통영성 두레가 11,730尺에 2,346步이면 5척이 1보로 표기되었다.

조선 세종 12년(1430) 이전에는 중국의 도량형을 사용 하였는데 단위가 통일되지 않아 5척이나 6척을 1보로 표기 했었다.

세종 12년 집현전에서 통일하여 전국적으로 사용 하였다.이후 정조시대에 건설한 수원 화성 성역의궤에 기록된것이 6척이 1보라고 확정되었다.

여지도서에서  언급된 척과 보의 관계는 5척이 1보이다.이때 과연 1척이 현재의 도량형의 기준으로 얼마인가?

 

통영성의 기록이 5자=1보 이므로 자로 계산해야 한다.

당시의 기록이 5자=1보 이므로 1보*5자로 역으로 계산하여 자로 환산하여 1자=31.22cm로 계산한다.

고로 통영성은 2,346보 = 11,730자*31.22cm=3662.1m 높이 15자*31.22=4.68m

     원문성 좌 151보*5자  =  755자*31.22cm=  235.7m 높이 13자*31.22=4.06m

               우 202보*5자 =1,010자*31.22cm=  315.3m 높이 13자*31.22=4.06m

 

 

2)통영지(統營志1894)의 관방關防편

.원문轅門

영의 북쪽 10리에 있으니 곧 육로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강희 21년(1682 임술)에 원상 제61대 통제사가 창건 하였다.

좌우 성가퀴 각 10타씩은 건륭7년(1742 임술)에 송징래 제108대 통제사가 처음으로 쌓았는데 10타 외에 쌓지 못한 곳은

건륭50년(1785 을사)에 이방일 제139대 통제사가 다시 쌓았다.

원문창轅門倉은 가경10년(1805 을측)에 유효원 제152대 통제사가 지창紙倉에 이설 하였다.

 

3)함안총쇄록(오횡묵 1889)

1889년 5월 24일 다시 길에 올라 1리를 가서 마치 고개를 넘었다.10리를 더 가니 도선동 이었고 3리를 더 가니 주막 3집이 있었고 그 곁에 염씨의 충절각이 있었다.2리를 더가자 큰 고개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한치령 이라고 했다.돌 오솔길이 꼬불꼬불 했고 고개가 아주 가팔라 마치 하늘에 오르는듯 하기에 가마에서 내려서 걸어서 갔다.10리를 더가서 통제영의 문에 이르렀다.문루의 2층에는 삼도대원수원문 아래층에는 삼도대도독원문 이라고 편액을 걸었다.이에 가마에서 내려 문루에 올라서 잠시 쉬었다.문루는 공신루라 했다.수행 인원들과 말도 요기하라 명령하고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봤더니 문루의 양쪽은 성첩인데 바다가 닿는곳에서 멈췄다.가히 지세가 한쪽으로만 쏠려 많은 군사로도 열지 못할 그런 관문이었다.바다를 뛰어 넘을 만한  그런 용기가 있는자가 아니면 어떻게 엿보겠는가?되는데로 시를 한수 적었다.

 

바닷가 성 북쪽에 말을 세우고

공신루 높은곳에 잠시 기대었다네

삼도를 아울러 물가를 막고

튼튼한 통제영 관장하는 첫째문이라.

호남 영남 사이엔 한가한 세월이요

임진란 이후 천지가 조용하네.

요충지에 통제영 설치하여 씩씩한데

충무공 높은 공훈 잊을 수 없네.

 

1890년 3월 20일 기축 동이 틀 무렵 출발 하였다.이른바 맞이하는 명색 관리들이 모두 대령 하였다가 앞에서 인도 하려다 엄히 타일러 이들을 물리쳤다.종종 걸음으로 걸어서 원문으로 들어가니 문안에 새롭게 만든 비석이 있었다.높이가 한길 남짓 되었다.머리는 처마모양이고 부는 거북모양이다.우뚝 서 있었다.이것을 보니 비석의 전면에는 "통정대부함안군수전별향사오공횡묵영세불망비"라고 세겨져 있었다.

(통영문화원 발행 통영문화 2006 제7호)

 

4)원문에 대한 시詩

 

1) 통영원문(統營轅門)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轅門之下水如彎 원문 아래 물이 활처럼 굽어있고
蜂腰形便兩地間 양 땅 사이 잘록한 허리 모양이다.
最雄三道大元師 최고 우두머리 삼도 대원사(大元師),
莫重一邦統制關 막중한 한 나라의 통제사 관문이다.
粵自壬亂設此門 임진란에 기인하여 이 문을 세웠는데
忠武威望斗與山 충무공의 위세와 명망이 산과 더불어 두드러졌구나.
雉堞自門至海止 원문으로부터 성가퀴가 바다 끝에 이르고
水陸之禁重防閒 바다와 육지의 위협을 방어하는 중요한 길목이네.
一夫當關萬莫開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이 와도 뚫지 못하며,
挾山超海越亦艱 산을 겨드랑이에 끼고, 바다 건너 넘어가는 것도 어렵다.
老我到此徒徊徨 늙은 내가 이곳에 이르러 헛되이 어정거리며
只吟一詩薄言還 돌다가 얇은 글로 시 한편을 읊을 뿐.
[주]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 :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이 와도 뚫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험한 지세를 비유하는 말.
[주2] 협산초해(挾山超海) : 태산을 겨드랑이에 끼고 바다를 건너다, 불가능한 일, 할 수 없는 일

2) 월포로부터 통영에 도착했다(由月浦至統營) / 하겸진(河謙鎭,1860~1946년)
行行記昔遊 돌아다니며 일찍이 노닐었던 기억을
屈指三十年 손꼽아보니 삼십년 전이었네.
廢城無遺石 폐성에는 남은 돌도 없고
轅門有陂田 원문(軍門)엔 비탈진 밭만 있을 뿐.
山川緬非故 산천은 아스라이 옛날과 다르고
市肆如積煙 상점엔 연기 뿌옇게 덮어서라.
一徑穿海底 한 길이 바다 밑을 뚫었고
千帆集雲邊 수많은 배들은 구름 가에 모였네.
雨卷閑山澨 비 걷힌 한산도 물가,
日隱龍華顚 해지는 용화사 꼭대기,
千年墮淚地 천년이나 눈물 흘린 땅
忠祠獨巋然 충렬사 홀로 우뚝 솟았네.

◯ 河謙鎭(하겸진) : 1860~1946년. 진양인(晋陽人). 자는 숙향(叔享), 호는 회봉(晦峰), 진주 사곡(士谷)에 살았다. 하수일(河受一)의 후손, 하재익(河載翼)의 아들로 곽종석의 문인이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한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1925년 김창숙이 만주독립군 기지건설을 위해 주도한 군자금 모금 활동에 적극 지원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 등공신루(登拱辰樓) 원문성 2층 문루에 올라 / 오횡묵(吳宖默).
立馬城陰近海藩 바닷가 성 북쪽에 말을 세우고
拱辰樓屹乍憑軒 공신루 높은 곳에 올라 잠시 기대었다
關防水國兼三道 삼도의 바다를 지키는 관방이라,
管轄金湯第一門 그 방비가 견고하기로 으뜸이네.
湖嶺之間閒日月 이로써 영호남이 모두 평화롭고
龍蛇以後靖乾坤 임진왜란 이후 천지가 편안해졌다.
要衝設險由來壯 요충지에 세운 통제영이 웅장하니,
忠武嵬勳不可諠 이충무공의 높은 공훈 잊을 수 없으라.

◯ 오횡묵(吳宖默) : (1834년 ~ ?),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규(聖圭), 호는 채원(茝園). 19세기 말에 정선군수‧자인현감‧함안군수‧고성부사‧공상소감동(工桑所監蕫)‧지도군수(智島郡守)‧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서 요직에 있을 당시 자신의 많은 시문(詩文)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채원집(茝園集)》‧《정선총쇄록(旌善叢瑣錄)》‧《자인총쇄록(慈仁叢瑣錄)》‧《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고성총쇄록(固城叢瑣錄)》‧《지도총쇄록(智島叢瑣錄)》‧《여재촬요(輿載撮要)》 등이 있다.

한산신문 통영원문 고영화

 

2.고지도에 표기된 원문성轅門城

 

 

다시 고지도에 표기된 원문성곽을 찾아보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웹지도 검색에서 원문성곽이 표시된 지도만 찾았다.

 번호 지도명 성문루 성곽좌우 길이비교 참고 비고
 1 1872 지방지도 고성부지도 2층 홍예문 좌  지리지종합정보
 2 1872 지방지도 통영지도 2층 평거식 판독불가 역사관 입구지도 지리지종합정보
 3 동국여도 영남도 2층 개거식 좌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4 비변사인방안지도  2층 홍예문 우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5 여지도 경상도 고성현 1층 평거식 좌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6 지승 경상도 고성현 1층 홍예문 좌우동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7 각읍지도 고성 1층 홍예문 좌우동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8 해동지도 고성현 1층 개거식 좌우동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9 고성연해도 2층 판독불가 판독불가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10 통영읍내지도 2층 홍예문 좌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11 팔도여지도2 고성현 1층 홍예문 좌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12 여지도서  통제영지지도 1층 홍예문 좌우동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13 광여도 경상도  고성현 1층 홍예문 좌우동  지리지종합정보

표-1

 

             1872 지방도 경상도 고성부지도                                       1872 지방도 통영지도

             동국여도 영남도                                                            비변사인방안지도 영남지도 고성

             여지도 경상도 고성현                                                     지승 경상도 고성현

             각읍지도 고성                                                               해동지도 경상도 고성현

 

 

 

 

             고성연해도 고성연해도                                                    통영읍내지도 통영읍내지도

             팔도여지도2 고성현                                                        여지도서 통제영지지도

                                                               광여도 경상도 고성현

 

표-1에서 좌우 성벽 길이의 비교에서 긴쪽이 좌:5  우:1 판독불가:2 좌우동:5  이다.

여지도서에는 좌(원문만)가 151보 우(북신만)가 202보  이므로 우가 길다.

표에서는 좌가 많으므로 좌측이 길다는 추론이다.이는 여지도서와 고지도의 표기가 다르다.

 

A)기록(여지도서 좌,우)과 주민의 증언 오횡묵비의 위치 성안새미 지창 등을 종합하면 원문성문은 원문 33번지이다.

   원문성문(33번지)의 위치를 생각하면 좌 원문만(151보) 우 북신만(202보)이다.

B)통영성을 중심으로 그려진 고지도에는 북신만보다  원문만이 우세하다.(이는 결론과는 배치된다.)

   화공의 오류인지 아니면 임의로 그린건지 알 수 없다.

  A,B를 비교할때 신뢰수준은 A가 높다고 생각된다.

 

3.현존하는 원문성 유구

 

 

현재 북신만 쪽의 원문성은 많이 무너졌지만 체성이 대체로 남아있다.

경사가 심하여 주택 및 농사가 불가하여 성벽이 많이 훼철 되었으나 대체로 구별 할 수 있다.

 

 

 

 

 

 

 

 

4.추정하는 원문성 문루위치

 

그러면 원문성문루(공진루)는 어디인가가?

여지도서의 기록에 원문은 우측(북신만)이 202보는 202*5=1,010자*31.22cm=315.3m

                                  좌측(원문만)이 151보는 151*5=   755자*31.22cm=235.7m이다.

현재 유구를 추정할때 원문만은 해안선의 변화로 옛날 해안선의 기준이 모호하다.

그러나 북신만의 해안은 거의 변화가 없고 체성의 유구도 거의 남아 있으므로 북신만 해안에서 유구를 따라 실측한다.

다음 지도에서 실측한 결과 북신만에서 33번지까지 = 350m다.(북신만의 경사도는 급함)

                                   원문만에서 33번지까지 = 290m다.(원문만의 경사도는 완만함)

기록상의 거리와 실측거리를 종합할때 원문성 문루는

원문리 33번지에 위치 한다.

 

 

 

 

 

 

 

5.주민 증언

 

다시 드는 의문점은 현재 서있는 오횡묵 비의 위치이다.

함안 총쇄록에는 성문안을 들어서니 한길이나 되는 큰 비가 있다고 했는데 발견된 위치는 성밖이다.

성문안의 지창이나 성안새미 등등의 유구는 무었인가?

다시 찾은날 마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집의 주인에게 채록한 이야기는

본인의 선대가 원문성의 성주였다.옛날 궤짝에 각종 고문서 및 넙적한 도장이 있었다.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는 33번지가 성문터다.예전에는 기와집이었다.

현재 성문집의 대문앞에 거북모양의 큰 돌이 있었다.

 

 

 

 

 

 

거북모양의 돌은 오횡묵의 빗돌중 부가 아닌가?

함안 총쇄록에는 "머리는 치마요 부는 거북이라"라고 기록되어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오횡묵비는 성안새미 아래쪽 성문안에 위치한다.

 

원문만은 예전에는 고속도로 넘어 원룸촌 시작점까지 갈대밭 이었다고 한다.

 

 

6.다른 병영성에 존재하는 원문성

 

전라우수영과 고흥(흥양) 녹도진성에도 원문(轅門)이 있었다.

 

전라우수영에 있는 원문이 표기된 고지도

 

 

1.여지도2 전라도2  2.해동여지도 해남  3.여지도02 전라도  4.해동총도 전라도 

5.동국팔역도 전라도  6.좌해여도 전라도  7.각읍지도 흥양

 

전라우수영성 원문

 

 

녹도진성 원문(흥양현)

 

7.향후 방안

 

1.북신만 쪽이라도 원형 복구를 하여 이곳이 원문성벽임을 알려야 한다.(경사가 심하여 주택이 없음.밭으로 경작하고 있음)

   대한민국의 어느땅에도 없는 통영만의 원문성곽을 북신만쪽을 복원하여 통영만의 정체성을 살렸으면 한다.

 

2.원문성의 안내판 이다.

   기록에 나오는 원문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알려서 역사적인 사실을 공유하고 옛 선조들의 지혜를 익혔으면 한다.

 

3.애조마을 개발 계획에 의거 해안도로를 낸다고 하는데 원문성곽 유구가  회손 될 우려가 있다.

   북신만 쪽의 유구는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도로를 낸다면 반듯시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

 

8.참고자료

1.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여지도서 경상도 통제영 성지편

2.통영문화원 발행 통영문화 2006 제7호

3.한산신문 통영원문 고영화

4.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

5.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

6.네이버 지도

7.통영 향토사 산책-12 통영별로,'통제사길'을 찾아서 여재 김일룡 소장님

8.상명대학교 김치연 교수

 

2013.5.24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