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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중종39년) 사량도에는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청풍헌 2013. 7. 19. 00:11

1544년 4월 12일 새벽 조용하던 사량진성 동쪽에서 수상한 무리의 배 20여척이 조용히 상륙 하였다.

이내 200여명의 왜구들이 각종 공성장비를 들고 상륙하여 성을 포위 공격 하였다.

이른바 사량진 왜변이 시작 되었다.

 

 

 

왜구의 사전적 의미는 13~16세기경에 우리나라 중국 연안에서 약탈 일삼고 다니던 일본 해적으로 정의된다.

 

우리나라는 반도에 위치한 국가로 섬나라인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 할 수 있는 발판이 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고대사회에서 부터 발호한 왜구는 일본이 국가가 형성되기 전 먹고살기 힘들어서 도적질을 하던 집단이었다.

한반도의 남부지역인 가야를 자주 침범하던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골치거리였다.

신라는 왜국에 볼모로 집힌 미사흔(내물왕 아들)을 구하고 대마도에서 순국한 박재상이  있으며

문무왕은 죽어서도 왜구를 지키기 위하여 대왕암에 묻혔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많은 왜구의 침탈이 있었으며 왜국을 정벌 하기 위하여 여몽 연합군이 합포(마산)에서 출항하기도 하였다.

또한 1389년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에게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때부터 골치아픈 왜구를 정벌 하고자 세종(1418)때 이종무 장군을 앞세워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1426년 삼포(부산포,제포,염포)를 개항하여 사절과 상왜를 구분하여 정식적인 교역을 하도록 하였다.

 

삼포왜란 발생

삼포를 운용 하면서 느슨한 정책으로 왜인들이 각종 법규를 위반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되어

중종때 엄한 통제를 가하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대마도주의 병력과 연합하여 4~5,000명이 부산포,제포,등을 침공 하여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3방면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삼포를 폐쇄 하였다.

이후 끊임없는 요청으로 제포만 개항하고 유화정책을 썼으나 불만을 품은 왜구가 사량도를 침범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내용

중종 102권,39년(1544 갑진 / 명 가정 23년) 4월 18일(병술) 2번째 기사

서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량진(蛇梁鎭) 왜변(倭變)의 근본 원인을 다시 만호(萬戶) 유택(柳澤)에게 추문하니, 공술하기를

‘이달 12일에 왜선 20여 척이 와서 동쪽 어구로 해서 갑자기 들어와 성을 포위하였는데

궁시(弓矢) 및 성에 올라가는 기구를 가지고 빙 둘어섰었다.

이때 군관(軍官) 및 군졸들을 거느리고서 방포(放砲)하다 난사(亂射)하다 하여 인시(寅時)부터 사시(巳時)까지 서로 싸웠다.

화살을 맞고 죽은 왜인이 20여 인이었는데 모두 끌고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목을 베지 못하고 단지 한 사람의 목만 베었으며,

낭자하게 자빠져 있는 왜인은 또한 수를 알 수 없었는데 이어 패하여 도망했으나 바다가 어두워 추격하지 못했다.

우리 군사는 죽은 자가 1인이고 부상한 자가 8∼9인이었다.

 

성이 포위당했을 때에 이웃 진에 위급함을 알렸는데,

적량 만호(赤梁萬戶) 김희장(金希章)과 소비포 권관(所非浦權管) 금팽조(琴彭祖) 등이 이날 유시(酉時)에 비로소 왔고,

가배 권관(加背權管) 남자용(南自容), 당포 만호(唐浦萬戶) 김준(金俊), 고성 현령(固城縣令) 봉귀달(奉貴達) 등은

13일 평명(平明) 때에야 비로소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택김희장 등을 본도 감사(本道監司)에게 이문(移文)하였습니다.

유택을 추고해 보건대, 왜적들로 하여금 성을 포위하게 하여 자못 변장(邊將)의 도리를 잃었기에 직임에 있을 수 없으니 시급히 체차하는 것어 어떻겠습니까?”】

 

 

실록에 기록된 내용과 같이 삼포왜란으로 통교가 축소된 왜인들이 불만을 품고 사량도진성을 침범 하였다.

사량진 왜변은 성격상 공성장비를 지닌 왜구들이 진성을 정복하기 위하여 침범한 사례로 매우 엄중한 일이었다.

당시 사량진 만호 유택은 군관 및 군졸을 거느리고 화살 및 돌등을 퍼부어 적들을 물리쳤다.

치열한 전투는 새벽4시부터 아침10까지 이루어졌다.

 

 

사량진성이 어디에 있었을까?

진촌 주위에 진성이 있었다.

일간 현장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사량진성

․ 소재지 : 금평리 진촌

․ 유적현황 : 금평리의 배후 산록완사면에 입지한 조선시대의 진성이다.

 『통영군지』에는 둘레 1,252자. 높이 13자이며 수군 만호를 두어 지켰다고 전한다.

  (『통영군지』, 卷 三 古城郭) 성곽의 내부에는 계단식 경작지와 민가가 들어서 있어 보존상태는 불량한 편이다.

  잔존상태가 양호한 부분은 한 민가의 담장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은성축조방식과 유사하다.

  성곽과 관련된 잔존 시설물은 성내의 우물 1개소뿐이다.

  돌로 구축한 정으로서 수량이 풍부하여 지금도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 참고문헌 : 統營市, 2004, 『文化遺蹟分布地圖

 

 

 

 

 

사량진 왜변이 조정에 보고되어 큰 문제가 되었다.

그해 5월에는 대마도와의 단교를 선언하고 제포의 왜인도 추방하였다.

단교로 인한 손해가 막심하던 대마도주와 일본 막부에서는 사량진 왜변을 극구 사죄하여

다시 정미약조를 체결 하였다.

정미약조:세견선은 25척으로 제한,선상집물 금지,가덕도 서쪽에 도착한자는 적왜로 간주,모든 약속은 진장에 따른다 등이다.

 

이후 또다시 을묘왜변이 일어나고 종국에는 임진왜란이 발발 하였다.

 

1544년 사량도에서 왜구가 침범하는 사량진 왜변 있었다

 

2013.7.18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