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1

청풍헌 2014. 3. 26. 11:56

향토사에 관심이 있어 혼자 공부를 했다.

좌충우돌 하면서 단편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던 향토사를 좀 더 체계적으로 알기 위하여 문화원 향토사 강좌에 신청하여 그 첫 수업을 듣는 날이다.

향토사 강좌를 맏아 주신  여재 김일룡 소장님은 사단법인 통영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이며 국사편찬위원회 통영시 지역 사료조사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시며

저서로는 ' 통제영과 통영성', '통영의 역사문화 바로알기', '통영향토사연구논문집', '통제사길을 찾아서', '통영시 새 주소 도로명 해설집', '통영지명총람'이 있으며

논문으로 '통영시 지명유래', '통영의 설화민담','적진포 해전연구', '칠천량 해전연구', '통제영 군점수조연구', '통영연 연구', '통영성 성조연구', '통영운하연구'등

다수가 있다. 통영향토사에 인생을 바친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역사 교과서이고 네이버 지식인이다.

이번에는 제대로된 지역 향토사를 공부 해야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수업에 임했다.

 

통영은 항구다. 즉 바다를 끼고 있는 부두가 발달된 항구다. 이곳은 과거 왜구로 부터 방비에 적합한 곳으로 임진왜란 초기에 한산대첩을 이룬 곳으로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경준 통제사가 삼도수군통제영을 이진한 이래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통영항이 발전되었다.

바다가 없었다면 통제영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시작은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모였다.

역사란 모름지기 책상머리에서 하는게 아니라 현장에 모든 문제와 해결책이 있다는 지론으로 향토사 수업은 거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문화마당은 원래 병선 마당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름을 붙일 때 제대로 알고 또 생각하며 붙여야 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이름을 붙이면 고치기 힘들다.

이곳이 통제영 8전선이 계류되어 있던 통제영 병선마당이다. 지금도 귀선과 판옥선이 계류되어 있지 않는가?

옛지도에는 통영성 남문밖으로 미전이 있으며 병선마당에 통제영 전선이 줄줄이 계류되어있다.

천자제1호좌선은 통제사가 지휘하는 지휘선으로 한산대첩 행사때에도 군점수조를 판옥선 위에서 했으면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군점 수조는 일종의 해상 관함식으로 통제영의 모든 전선과 병졸이 모이면 570여척의 전선과 3만여명의 수군이 관함식을 하는 장대한 관경이

이곳 통영 앞바다에서 펼쳐졌다.

통영에만 있는 톡특한 군점을 체계화 하여 재연하면 좋으련만...

 

통제영이 폐영된 이후 일인들이 들어와 어업권 및 각종 상권을 차지 하고 해안을 매립하게 된다.

이때 일본 노무자 조장이 조선 진위대 하사를 폭행 하는 일이 벌어져 일본인을 규탄하고 쌀도 팔지 않으며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자 거제 송진포 방비대와 가덕도 육전(해병대)대가 상륙하여 겨우 해결하는 통영 최초의 항일운동이 1907년 7월에 일어났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통제영 100여동의 관청을 헐리고 뜷기어 흔적없이 사라지고 세병관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

병선마당도 많은 변화를 겪는다.  매립되고 각종 건물이 들어서 부산-여수간 여객의 중간 기항지로써 역할을 했다.

이는 부산이 경상 좌수영이며 통영이 경상 우수영을 겸직했고 여수가 전라 좌수영이다. 통제영 시절에도 경상과 전라는 긴밀한 연락 체계하애 있었다.

그런 항로가 고스란히 후대에 까지 영향을 미쳐 부산-통영-여수-목포의 항로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부산과 여수의 중간 깃점으로 이곳에 오면 점심때가 된다. 배고픈 여객들을 위하여 김밥을 팔던 것이 유래가 되어 충무김밥이 되었다.

 

세병관에서 남문을 지나 병선마당 갈려면 반드시 선소문을 지나야 한다.

이 선소문이 수항루이다.

병선마당은 전선들이 계류된 일종의군사지역이다.

일반백성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전선의 병참기지역할도 했었던 곳이다.

누각과 문은 같은 건물로 위치마다 다르게 명명 했었다.

즉 세병관의 망일루와 세병문, 충렬사 강한루와 영모문, 선소의 수항루와 선소문이다.

문화재를 복원하면 이런 이치를 잘 알아야 제되로된 복원이이루어진다.

누각만 있고 문은 사라졌다.

 

       ▲통영성 지도(1872)

 

▲통영나전칠기강습소 앞에서 열강중이 김일룡 소장님

 

▲항남동 골목길 프로잭트로 생긴 이중섭 식당

 

                    ▲강구안江口岸(?) 골목길 안내판

 

▲강구안 골목이 백석의 시로 도배 되었다.

 

▲멋진 프로잭트 결과물...

 

강구江口는 관창골의 내와 백천 세탁소쪽의 내가 모여 내려오는 입구라 뜻이다. 강구나 포구나 비슷한 뜻일게다.

항남동 골목길 프로잭트에 많은 돈을 솟아 부었는데 이름을 지을때나 무얼 만들면 지역민들과 협의를 하고 감수를 받으면 좋으련만...

왜 이 골목에 백석의 시로 도배를 했는지 궁금 할 따름이다.

처음은 아! 백석하면 난(박경련)를 사랑한 사람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백석의 시가 20여편이나 있으니 의문이 든다.

우리 시민은 전문가가 아니다.

시인들이 좋아한 백석을 일반시민들도  좋아 할 것이라고 착각을 했는지...

백석의 시비가 있는 명정동 충렬사 앞이라면 몰라도.

 

병선마당에 이는 거북선은 3척이 있다.

한척은 서울에서 가져온 것이고 두척은 남해안 프로잭트의 사업으로 판옥선 1척과 같이 건조했다.

이 거북선도 엉터리 소나무를 사용하여 일대 소동이 일었다. 지금의 국보1호 숭례문과 같은 현상이다.

현존하는 거북선은 없다. 또한 정확한 도면도 없다. 다만 당시의 기록(난중일기, 임진장초, 이충무공전서, 이충무공 가문에 전해오는 귀선, 일본 자료)에

유추하여 건조할  뿐이다. 이충무공전서(1795)에 있는 그림으로 전하는 귀선은 두가지로 통제영 귀선과 전라좌수영 귀선이있다.

이 귀선도 임진왜란(1592)이후 200여년이 지난후 그린 것이다. 그래도 많은 학자들이 귀선을 연구하여 이정도의 복원을 했었다.

한때  칠천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귀선을 찾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성과는 없었다.

이곳 병선마당은 통제영 8전선이 계류된 선소인데 귀선도 1척만 있고 나머지는 제승당이나 공주섬 앞에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현재의 항남동은 야트막한 산언덕 이었다. 동충동 서충동 이었으나 깍기고 잘리어 결국 항구의 남쪽이라 항남동으로 변천한 동리다.

이후 여러 변화를 겪으며 통영의 교통 행정 경제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면서 숱한 이야기를 안고 있다.

그 가운데 이중섭이 기거했던 통영나전칠기강습소가 아직도 건재해 있는 골목이다.

이중섭은 비운의 천재 화가로 20세기 가장 주목받는 화가의 한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이곳 통영에서 2여년을 살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제주에서는 1여년을 살았는데도 서귀포 시에서는 이중섭 미술관을 개관하여 스토리텔링을 선점하여 좋은 관광 아이탬을  개발 했다.

6.25때 부산의 노무자로 있던 이중섭을 유강열의 소개로 통영나전칠기강습소에 기거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통영의 여러 문인,예인들과 교류를 했다.

그때 도움을 주었던 김용주, 김기섭, 김용제, 등이 있으며 같이 시국을 논하고 울분을 토하고 문화운동을 했던 류치환, 전혁림 등이있다.

이분들이 자주 다녔던 술집이 복자네 술집이니 새미집이니 하는데 이곳 동충은 청루골목이라고 많은 술집이 있었던 골목이다.

교통의요지요, 뱃사람들이 들끓었던 이곳에는 많은 술집과 여관 뒷골목이 있었던 곳이다. 복자네 술집은 어디가고 새미집 이라는 흔적만 남아있다.

 

새미집을 뒤로하고 오거리 시계탑 쪽로 나오면  할배  한분이 뒤짐을 지고 서있다. 김춘수 할배가 적십자 병원에 약 타러 가신다.

꽃의 시인 김춘수의 동상이 쌈지공원 안에 서있다.

해방이후 통영문화 협회를 결성한 류치환과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김상옥 등등은 통영의 문화 르네상스를 이룬 화룡점정이었다.

감정도 형상도 관념 조차도 제외된 무의미한 듯 서있는 이 동상은 김춘수의 시 '너무 무거우니까' 라는 시를 떠 올린다. 

 

"너무 무거우니까 / 수다와 수사 / 수염과 수컷 / 수자 붙은 모든 것은 다 / 떨어뜨려야지 / 군살은 빼고, 지용의 시처럼 / 딴딴한 참살만 남게 해야지

머뭇머뭇 하다가 거기서 행을 바꿔 / 말을 덜고 말을 달래듯 / 너무 무거우니까 / 보라. / 이별도 슬픔도 다 솎아내고 / 겨울에 / 마지막 하나 남은 / 저 잎새"

 

 

▲병선마당에 모였다.답은 현장에 있다.

 

▲귀선의 등

 

▲천자총통의 대환란

 

▲선소 골목

 

▲일제 강점기 기와 용마루

 

▲이중섭이 기거했던 곳

 

▲통영나전칠기강습소

 

▲이중섭이 그렸던 통영항과 남망산

 

▲김구선생이 묵었던 동양장

 

                    ▲안내현판

 

▲소

 

▲간판만 남은 새미집

 

▲적십자 병원에 약타러 가는 할배의 뒷모습

 

▲무념 무상, 김춘수 동상

 

▲선창동

 

선창골은 통제영의 배들이 드나들던 곳이라 선창리-선창동-선동-길야정(요시노마찌)-항남동으로 변천 되었다.

항남1번가로 2007년 명명되었다.

예전 이곳은 자갈이 깔린 해수욕장으로 어린아이들의 물놀이장이며 남망산 아래는 배를 모으는 조선소가 있었다.

 

이곳 선창골은 최초 시조동인지 참새를 창간한 늘샘 탁상수의 생가가 있으며 동아일보 기자를 했으며 1926.8부터 4집까지 발행한 근대 시조문학의 발생지다.

또한 이곳은 이근찬(진산,수남의원,청년단,건준위,동아일보지국)과 김두옥(비밀결사, 동아일보지국, 군자금), 최덕지(한국최초 여목사,신사참배 반대),

방말선(공덕귀 여사 모), 김재순(청마의 부인)이 자라고 뛰놀던 공간이다.

선창골은 과거 통영에서 제일 번화하던 골목이었다.

명동, 희락장, 양의원, 오행당, 충무도서, 명성레코드 골목등을 불리어졌다.

 

이곳에는 초정의 생가터가 있으며 초정은 이곳 선창골에서 갓일을 하던 선친 김덕홍 옹의 61남의 막내로 태어나

누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시조, 동시, 수필, 서화, 전각, 도자감식등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의 일가를 이루었던 시조시인이다.

멀리 만주로 시집간 깜딩이 누나가 동생이 보고 싶다 하여 여비를 벌어가며

두만강 누나집을 갔다 오면서 지은 시를 문장지에 기고하여 당선이 되었던 시가 봉선화.

가람 이병기가 추천 했으며 미당 서정주는 천부적인 시인이라 칭찬했다.

초정거리에는 초정 김상옥 선생의 동상이있다.

이 골목은 초정의 생가터가 있다.(동진 여인숙)

 

봉숭아 꽃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두고 볼 것인가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서 본 듯 힘줄만이 서노라

 

 

 

 

▲초정의 동상

 

▲이 골목은 늘샘 탁상수의 생가가 있던 곳

 

 

 

▲봉선화 시비앞에서

 

청마 류치환은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다.

한때는 친일이라고 떠들었던 때도 있었다. 청마가  만주에서 쓴 시가 독립군을 비적이라 표현 했다하여 친일작가라 했었다.

결국 친일 인명사전에는 올리지 못했다. 청마는 통영의 문화 르네상스를 이끈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때 청마의 고향다툼으로 법정까지가는 헤프닝이 있었다.

청마문학관에 쓰여진 "청마는 태평동 552번지에서 태어나"라는 문구를 트집 삼아 거제와 유족이 배상 하라는 소송이 벌어져

결국 이유없다 라는 대법원 판결로 통영이 고향임을 입증한 샘이 되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그 사연은 동랑의 흉상을 남망산 공원에 세웠는데 친일파라고 하여 동상을 끌어 내리고

청마 마저 친일파라고 하니 크게 마음이 상하여 소송이 일어났다는 중론이다.

 

이영도 여사와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언니의 주선으로 통영으로온 이영도는 남편을 여위고 통영여중 임시 교편을 잡으며 언니 수예점을 드나들었다.

우체국 창가에서 보이는 예쁜 이영도를 보며 수천통의 연서를 보낸 간 큰 남자 류치환은 행복이라는 시를 썻다.

"사랑하는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라고 노래하며 인정의 연분을  강조 했다.

 

아내 권재순 여사는 호주선교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으며 충무교회 영산장을 불하 받아 유치원을 개원하여 아동을 가르친다.

이때의 학생이 김춘수였다고 회상한다.

류치환과의 결혼식에 꽃바구니를 든 아동이 김춘수 였다고 하니 예사 인연이 아니었다.

 

해방을 맞은 청마는 전혁림, 윤이상, 김춘수, 정명윤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여 문화예술활동을 주도하여

통영 문화 르네상스를 꽃피운다.

 

▲청마상과 향수 시비

 

▲청마가 건너편 수예점이 있는 이영도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쓴 우체국

 

 

 

▲통영성 남문터와 봉래극장

 

통영향토사강좌의 첫수업을  들었다 .

알게되니 더욱 힘들다. 깊이 알려고하니 더욱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어쩌랴?

통영의 역사 문화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또한 깊이를 더해가는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었다.

 

2014.3.18 향토사1 강좌를 듣고 백세청풍 김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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