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2

청풍헌 2014. 3. 28. 22:45

오늘은 두번째 시간이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현장수업이 중요함으로 역사관에서 통영지도를 보면서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 나왔다.

향토사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점차 불어나 50여명이나 신청 했다고 한다. 바짝 가까이 듣지 않으면 잘 안들릴 정도로 인원이 많았다.

 

 

1.문화동 벅수(중요민속자료 제7호)

이 벅수는 비보장승으로 원래 위치는 더 아래에 있었다. 세병관에서 내려오면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 세워졌던 장승인데 도로 확장 공사로 이곳에다 이전 설치했다.사거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장승은 남녀 한쌍으로 설치 하는데 이 장승은 허한 기를 막기 위하여 세운 장승 이므로 대장군 한 기만 우뚝 서있다. 벅수가 바라보는 방향은 서문고개를 바라보고 있는데 저곳이 여황산 능선으로 내려오다 잘록한 곳으로 기가 허하고 건너편의 천함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규봉窺峰(도둑이 고개를 내밀고 엿보는 형상)을 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하여 세운 석장승이다. 특이하게 망건을 쓰고 있으며 칠을 했고 1906년(광무10) 8월 동락동 주민이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원래 장승은 나무를 깍아 세웠는데 몇년후에 계속 만들어 세워야 하고 또 깍는 사람이 잘못하면 해를 당한다 하여 꺼려 했는데 돌을 다듬어서 깍아 세우기 시작했다.

(문화동, 중앙동,등등의 행정 명칭은 과거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긴 명칭으로 옛명칭은 동락동이다. 문화원 원사를 짓고 회의장의 이름을 만들때 이곳이 동락동 이므로 동락헌(東樂軒)이나 동락마루로 제안을 했는데 동락마루가 낙점되어 교육장 이름이 동락마루가 되었다. 어떤 계기가 되면 이 동을 옛이름을 찾아 동락동으로 했으면 좋겠다.

▲벅수  

▲통영지도에 표시된 벅수 

▲벅수앞의 제단에 쓰인 글자 

▲우중의 교육 

▲문화상회 골목이 옛거리였다.

 

 

2.통영청년단회관(統營靑年團會館)1923. 11.18 등록문화재 제36호

1919년 삼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뭔가 민족운동을 할 구심점이 필요하여 청년단을 결성했다. 초대 회장에는 박봉삼을 선출하여 교육 및 계몽운동을 할 구심점으로 청년단 회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기금을 모아 착공을 했으나 일경의 갖은 방해공작으로 진전이 없자 임철규 회장 재임시 문중의 재산을 담보로 자금을 마련하고 중국 기술자를 불러 청년단 회관을 준공하게 된다. 이렇게 뜻깊은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것은 당연지사이며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는 이 건물을 짓기까지 노력한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문제다. 박봉삼씨는 1936년 사량도에서 조난 사고로 죽고, 임철규씨는 문중재산을 담보로 빌린 돈 때문에 문중에서압박을 받았으며 이후  남망산 뒤 언덕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지난 문화원 원사 신축때 청년단건물 앞마당에 노인정을 지을려다 언론에 지적당하고 윗쪽으로 올려 지었다. 훌륭한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주체가 단체장이 바뀔 때 마다 변하는 정책으로 우리 후손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100년 200년후 까지 물려 줄 수 있는 문화정책이 필요함을 역설 하셨다.  통영성내에는 세개의 연못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 3지(池) : 남문지, 운주당지, 북문지  ★ 9정(井) : 남문내정, 동락로변정, 주전동정, 서구상로변정, 신상지변정, 하동문로변정, 동부로변정, 북문내로변정 이 있었다. 청년단 건물 아래는 통영성안의 9개의 우물중 하나인 동락로변정(東樂路邊井)이 있다.

우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중의 기본이므로 신성시 했다. 일년에 한번씩 우믈을 청소하고 용왕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다. 그 제단이 벽면에 움푹 들어간 곳이며 새로쌓은 석축이 날카로워 옛스러움이 반감 되었다. 복원 하는것 손을 보는것 하나 하나가 정말 중요하고 고증을 충분히 거처야 한다.

 

▲통영청년단회관 

 

▲동락내로변정 우물 

▲용왕제를 지내는 곳

 

 

3.통영성 지도

비가 많이와서 현장 수업이 곤란하여 역사관으로 왔다. 역사관 입구에는 통영성을 그린 큰 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1872년도 제작된 지도로 통제영의 당시 모습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으며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먼저 지난 시간에 공부한 선소는 통제영 선소와 중영선소로 나눠진다. 중영은 우후가 관장하는 선소로 통제사의 막하(幕下)장수다. 즉 통제사가 삼도를 관할 했다면 우후는 경상우수영의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통제사가 경상우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였지만 바로 아래 장수인 우후를 우수사 역할을 맡겼다. 우후가 기거한 곳은 중영으로 중영선소도 있었다. 전선의 체계는 큰 판옥선 한척에 병선이 2~3척 통구미 여러척으로 선단을 이룬다. 몇백명이 승선하는 큰 전선은 해안가에 함부로 상륙할 수 없어 병선이나 통구미로 연락하고 이동 했었다. 동파수 서파수에는 초병이 있었으며 인정시 울리는 종소리에 수책을  열고 닫고 했었다. 통제영의 선소는 군사지역이라 망일루에서의 인정파루시 4대문과 수책문을 여닫았다. 지도상에는 벅수의 위치가 표기되어있다. 문화동 벅수1기, 세병관앞 2기, 동서수책 2기, 착량교 2기이다.

▲통영성지도(1872) 

▲문화동 벅수                                                                                                  ▲착량교 벅수 

▲세병관 벅수                                                                                                  ▲동파수, 서파수 벅수

 

4.거북선과 이순신

통영은 삼도수군 통제영의 준말이다. 통제사가 근무했던 곳인데 이순신은 한산도 제승당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열었다. 현재 통제영은 이순신의 통제영과는 무관한데 너무 이순신에만 묶여있는 경향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순신 문중이 그만큼 대우를 받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일본의 장수인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고향에서는 대단한 무장으로 추앙 받아 축제 행사때 학생들이 돈을 내고 축제에 참여한다. 우리가 하는 한산대첩은 어떠한지? 진정 지역에서 하는 행사를 즐겁게 자랑스럽게 참여해야 진정한 지역의 축제가 되거늘 안타까운 심정이라 하신다. 통영만의 통영스런 축제에 주민 학생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참여할 때 전통이 생기고 자부심이 생긴다. 이는 지자체장의 역량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현존하는 거북선은 없다. 임진왜란 200년후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두점의 거북배가 나온다. 또한 기록을 토대로 재연해 놓은게 거북선이다. 임란 당시의 거북선과 이후의 거북선은 많이 다르리라 생각된다.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도 마친가지다. 가장 닮은 것은 없다. 당시의 초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충무공 전서에 있는 거북선

▲아산 현충사 이충무공 가문에서 내려오는 거북배(현충사에서)

 

 

5.수조도 병풍

 

첨자진이 그려진 수조도 병풍이다. 이 수조도에는 많은 정보가 있다. 가운데 통제사가 타는 좌선을 중심으로 경상 좌수사 전라 좌수사, 전라 우수사, 충청수사의 휘하 진의 만호와 권관이 탄 배가 도열해 있다. 수조도의 신호 채계에 대하여 집필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또 한편의 귀중한 논문이 틴생 할 것이다. 수조때의 신호 체계는 오방색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즉 동(東)= 청색(靑), 서(西) = 백색(白), 남(南) = 적색(赤), 북(北) =  흑색(黑), 중앙에는 황색(黃)의 깃발을 사용하여 신호를 주고 받았다.

수조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좌선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경상좌수사, 서쪽으로 전라 좌우수사 전선이 도열해 있으며 각 수사 휘하의 전선들도 오방색의 깃발을 휘날리며 도열해 있다. 당시의 전시 신호체계는 깃발과 나팔, 북소리 등이었다. 500여척의 전선과 2만 7천여명의 조선 수군들의 조련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수조도 

▲원수(좌선) 통제사가 타는 배 

▲전라좌수사 

▲경상좌수사 

 

6.12공방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통제영이 중앙 보급품의 조달이 원할하지 않아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사용하는 전쟁용품을 생산하던 곳에서 출발한 12공방은 전쟁이 끝나고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진상품이되고 또한 물품을 팔아 통제영의 경비로 사용했다. 전국의 장인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를 팔고 사는 장시가 들어서고 사람이 모여드니 전국의 팔도에서 내노라 하는 장인과 또 배우고자 하는 기능자들이 몰려 통제영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고 새분화 되면서 12공방이 전국의 으뜸가는 진상품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2공방중 통영갓은 입자방(笠子房)에서 3단계로 만들어졌다.  먼저 총모장이 갓의 윗부분을 만들고 양태장이 갓 테두리를 만들면 입자장이 이 둘을 결합하여 완성하는 협업체제였다. 머리에 쓰는 모자 종류도 여럿있다. 전립, 탕건, 유건, 망건, 정자관, 갓, 패랭이 등이있다. 통영의 갓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정밀하게 엮어서 만든 명품이었다. 그외 말안장을 만드는 안자방에서는 말안장의 아래에 짚세기를 넣어 쿠숀이 있게 했으며 뒷부분에는 상어껍질을 붙여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안장의 말드리개 부분은 박쥐문양을 해 장수와 부귀를 나타냈다고 한다.

▲통영갓, 부채 

▲말안장 

▲말드리개의 박쥐문양

 

1930년대 통영항은 높은 건물이 없는 뷰가 아름다운 항구였다.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통영을 대표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이 되었다.

(류치환,김춘수,김용익,정윤주,윤이상,전혁림,박경리,김상옥,김용주등등...)

이런 뷰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후손에게 물려줄 100년 대계를 생각하며 정책을 실현해야 한다.

우선의 치적과 인기에 영합한 정책은 돌아서면 후회하고

다시 복원 하는데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2014.3.25 비오는날 향토역사관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통영을 알아가는 향토사 강좌가 통영을 가꾸는데 일조를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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