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3

청풍헌 2014. 4. 7. 07:49

오늘은 세번째 시간이다.

문화원에서 출발 한다는 소식에 버스를 타고 갔다. 오후 2시가 약속 시간인데 정확히 맞추었다. 먼저 온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청년단 회관을 가로 질러 관창골 우물로 내려갔다. 이 우물은 지난 시간에 설명을 했는데 왜 이곳을 다시 내려갈까? 의아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소장님께서는 강의에 표준 교본이 따로 없다. 머리속에 저장 입력된 것을 교재에 약간 메모를 해오셔 즉석에서 강의를 하시어 같은 장소에도 때마다 강의 내용이 약간씩 틀리다. 이는 즉석에서 풀어 내시는 깊이 있는 강의가 된다. 즉 소장님의 학문이 깊어 질수록 강의가 질이 높아 진다는 뜻일게다. 요즘은 부쩍 역학과 풍수에 관하여 지명 풀이나 설명을 하신다. 평소 서민이 다니던 서문고개가 아닌 통제사 아전들이나 통제사가 충렬사에 제향하러 다니던 길을 가보자고 하신다.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세병관 아래까지 왔다. 12공방이 있는 아래 골목이다. 붉은 황토담 위에 도단으로 덮인 담장이 아름다운 저 집이 청마 유치환 선생의 부인 권재순 여사 집안이 살던 곳으로 기독교에 귀의하여 집에서 예배를 보던 곳이다. 그 아래는 교방청이 있었던 곳이라 하는데 흔적도 없다. 지금은 이층집으로 누가 이야기해 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곳이다. 약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제법 근사한 기와지붕이 보인다. 그곳이 함안 총쇄록에도 나오는 노인당 건물이란다. 통영성 안에는 수많은 관아가 있었다. 당시 잣대로는 상당히 큰 건물도 지금 볼 때 아주 작은 집으로 보인다. 이 노인당 건물도 지붕만 보이는 것으로 볼때 그렇게 큰 집은 아니었다. 고즈녁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초정 김상옥 선생이 살았던 곳이 길 위쪽으로 대문을 두고 있다. 이곳에서 자식을 키우고 생활을 했던 곳이다. 초정 선생은 성정이 꼿꼿하여 불의나 불합리를 참지 못하고 나무라는 시대의 호걸 이었다. 당시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때 정부에서 교사 자격증에 대하여 조사를 하여 초정 선생의 학력이 국민학교 졸업밖에 없어 교사 자격을 박탈 했는데 문교부 장관과 소송을 벌였다. 왜 교사 자격증도 없는 사람의 시를 교과서에 실었는냐 하시며 소송을 걸어 결국 승소를 했으나 교사증을 내던지고 서울로가 도장방(서각)을 차려 생계를 유지 하셨다. 초정 선생은 거의 천재의 머리를 가져 시, 서, 화에 능하였고 나중에는 골동품점을 하시며 도자 감정에는 당대의 최고가 되셨다고 한다. 정운 이영도 여사와의 관계도 약간의 냄새(?)가 나는데 당시 먼저 부산에서 생활하던 초정 선생은 이영도를 부산으로 올라오게 한 장본이다. 소장님은 초정 선생이 북포루 현판을 보시고 이게 일본놈 사진틀이지 무슨 현판이고 하시며 불호령을 내려 옆에 있으면 욕을 먹을 것 같아 멀리 피해 계셨다고 했다. 또한 향토 역사관에 오시어 방명록을 찾아 드리니 일필휘지로 글씨를 남기시고 낙관을 붉은 볼펜으로 그려 넣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방명록을 가지고 계신다고 했다. 그만큼 초정 선생은 없는것도 만들어 내는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고 했다. 또한 산복도로를 내는것을 보고 안티산의 맥을 끊어 이제 토영에는 큰 인물이 나기는 틀렸다고 혀를 끌끌 차셨다고 했다. 도로 하나 내는것도 앞뒤 생각하며 내어야 하는데 이곳이 어디냐? 삼도수군을 호령하던 통제영이 아니던가? 


서문 고개를 넘어가면 박경리 생가가 나온다. 박경리의 생가에 대하여는 정확한 위치는 고증 할 수 없다. 이곳이 생가로 비정된 것은 호적에 올라있는 주소가 이곳이다. 당시 여러 편으로 확인 했으나 '대화정 새집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박경리의 부친은 당시 버스인지 트럭인지 알 수 없으나 운전을 했다. 당시에 운전사 라면 대단한 직업 이었다. 즉 선망받는 직업의 하나로 차부에서 딴살림을 차려 어머니와 같이 3살 때 부산으로 갔다. 부산의 토성동 근처에 살다 통영으로 다시 내려와 10살때 통영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당시의 호적에는 10살 때 호적을 등록했는데 생존율이 낮아 호적을 늦게도 하기도 했다. 원래의 이름은 최금이 였으나 나중에 박금이로 바꾼다. 이는 아버지가 바뀌었다는 말이요, 어머니가 재혼 했다는 말이다. 나중에 문인으로 등단할 때 필명으로 박경리라고 했다. 박경리는 호주 선교사의 도움으로 진주 일신여중에 입학한다. 통영의 호주 선교사의 역할은 지대했다. 공덕귀 여사도 부산의 동래일신여중에 입학한 경우도 호주선교사의 역할이 있었다. 나중에도 계속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공부를 계속 하다 당시 서울 시장이던 윤보선과 결혼을 했다. 박경리는 결혼 적령기가 되어 지석에 시집와 살던분의  중매로 당시 전매청에 근무하던 김행도와 결혼하여 인천에서 신접실림을 차린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남편은 서대문 형무소에 잡혀가 행방불명 되었다. 일설에는 좌익으로 몰려 총살 당했다고 하기도 하며 이북으로 끌려갔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전쟁통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없어졌으니 죽었다고할 수 밖에... 지석의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남편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온 박경리는 수예점(당시에는 단추나 수실을 팔던 좌판이라고 함)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시집에서는 쌀가마니를 보태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딸의 통영여중 2학년때 음악선생과 재혼 하게된다. 통영 용화사(혹은 도솔암)에서 친구들과 조촐하게  결혼식을 하고 살게 되지만 어떤 연유로 다시 헤어지게 된다. 이것을  통영의 어른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품어 주지를 못하고 지석의 시댁에서도 이후 발걸음을 끊게되어 서울로 도피 하다시피 떠난다. 박경리의 어머니가 이야기를 잘 했다고 한다.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박경리는 이후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까?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통영의 현실과 80%는 맞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집안이 다 살아있는데 지금은 말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정확히 기록을 해야 하므로 나중에 밝혀 질것이다. 박경리가 문학적 거목으로 집중 조명되는 것에는 사위인 김지하 시인이 큰 역할을 했다. 김지하는 저항시인으로 유명하다. 서슬퍼런 5공화국 시절 "5적"이라는 시국 시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으로 당시의 재판을 재심 신청하여 무죄 선고 받고 보상을 신청 했다는 언론보도를 본 적이 있다.


다시 서문고개 먼당을 나오면 통영의 마지막 갓쟁이 김봉주의 생가가 헐려 잔디만 식재 되어 있다. 통영의 마지막 갓쟁이의 사진을 보여 주시며 총모와 양태를 조립하는 사진이다. 김봉주에게 갓일을 배운  정춘모가 있는데 통영사람들이 괄시를 했다 . 통영사람도 아닌것이 통영에서 최고라 하여 괄시를 받고 통영을 떠나 서울에서 무형문화재 혐회장을 지내며 헐값의 땅을 사들여 지금은 대단한 재력을 지녔는데 용남면 지역에 아파트를 구입하여 가끔은 내려오기도 한다는 진언이다. 통영에 살면 통영사람이지 어찌 여기서 난 사람만 통영사림인지 배타적인 통영인들이 아까운 인재 여럿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 했다고 한탄 하신다. 예술 , 열정, 그 자체로 귀중한 자산이 되고 통영의 자랑이될 것이다. 멀리 보이는 곳이 호주 선교사가 있던 곳이다. 호주 선교사가 이곳 통영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대단했다. 그들의 작품에 그대로 녹아있는 호주선교사의 건물은 통영의 근대사와 함께하는 것인데 그것 하나 보존하지 못하고 헐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1913)의 호주 선교사 왓슨과 스키너는 처녀로 봉직하다 1941년 통영을 떠날때 까지 처녀로 남는다. 당시의 사진에 공덕귀, 최덕지, 스키너, 권재순이 있다.(뒷줄 좌부터) 서문 성벽을 복원하며 길이 끊어졌다. 복원의 ABC도 모르는 엉트리 복원이라고 질타 하셨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백석을 꼽는다. 백석은 통영이라는 시를 여러편 남긴다. 이는 통영의 처녀 난이를 그리워하여 남긴 시다. 난이는 누구인가? 당시 통영의 신사 신현중은 자신의 여동생을 친구인 허준에게 소개하여 결혼을 한다. 결혼 식장에서 운명적으로 백석(친구)과 박경련은 만난다. 뛰어난 미모(이화고보)에 한눈에 반한 백석은 허준의 신행길을 따라 신현중과 같이 통영으로 간다. 여기서 통영이란 시를 짓고 난이를 만난다. "녯날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중략" 이후 두번째 방문에는 만나지 못하고 다시 통영(남행시초)이란 시를 짓는다. "구마산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중략)"  다시 한번 더 통영을 찾아와 남행시초2라는 시를 남긴다. "통영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중략)"  친구 허준과 같이 통영을 방문하여 박경련에게 청혼을 하게된다.  이에 박경련 집안에서는 백석에 대하여 알아 볼려고 통영의 거물 서상호 에게 백석에 대하여 알아 보라고 하니 서상호는 후배 신현중에게 물어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임을 밝혀 이 혼사는 깨지게 된다. 이때 신현중이 사윗감으로 나는 어떠냐고 물어 단박에 승락을 얻어 결혼을 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뺏긴  그 마음이 오죽 했으랴.  이후 여러편의 시가 전한다. 백석은 고향인 정주로 가서 영어교사를 하다 회식자리에서 김영한(진향) 기생을 만나 살림을 차린다. 김영한은 권번 출신의 기생으로 몇개월 동거를 하다 백석 집안의 반대로 결혼생활은 깨지고 헤어지게 된다. 이때 김영한을 "자야"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이후 백석은 6.25 동란으로 북한에서 살다 죽었다. 김영한 여사는 서울에서 큰 요정을 운영하며 부자가 되었는데 우연히 미국 뉴욕에서 강연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법의를 듣고 감명하여 법정스님을 졸라 길상사를 건립하게 된다. 서울의 대원각이라는 요정 자리에 길상사가 세워져 지금도 뭇 신도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사찰이 되었다. 법정 스님은 출가를 미래사의 효봉스님 아래 행자시절을 보내며 출가한 인연이 있다. 


두석장을 일명 장석집이라고 하며 맞은편은 하동집의 기와가 보인다. 하동집은 김양국의 딸에나오는 곳으로 부지집이며 항남동에서 방앗간을 운영했다. 조금 내려오면 공덕귀 여사의 생가가 나오는데 표석도 2대 대통령 영부인이라 오기 되었고 생가의 뒷담에 세워져 있다. 앞마당에는 아무 표식도 없으며 대문을 넘나 들었던 큰 나무가 닳아 있었다고 기억 하신다. 공덕귀여사 생가 정문 맞은편이 박경리가 잠시 살았던 집 충렬4길19이다. 

 

충렬사에 갔다. 충렬사는 통영의 정신적 중심이다.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이곳에 들어오면 공손해지고 엄숙해 진다. 또한 당연히 엄숙해야할 것이다. 손은 공손하게 앞으로 공수하며 참배를 할때는 모자와 안경을 벗고 공손하게 참배를 해야 한다.  원래 설명을 하며 올라가야 하나 정당으로 직행하여 먼저 참배를 하고 위에서 내려오면서 설명을 하셨다. 정당에는 섬돌이 세곳 있는데 이는 동출서입이며 가운데는 신도이다. 즉 신이 드나드는 섬돌 이었다. 마당의 귀퉁이 네곳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는 차양을 치는 기둥을 세우는 곳으로 제향시 새가 날라가면서 똥을 싸는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차양을 쳤다고 한다. 평소에는 거북 형상의 돌을 깍아 막아 놓았는데 분실우려 때문에 전시실에 전시했다. 이 구멍에 빗물이 고여 이 물로 눈을 앃으면 눈병이 낫는 다는 속설이 있다. 충렬사는 1606년 이운룡 통제사때 왕명으로 지은 사당으로 충렬사 현판과  어제사제문판 및 어제기판이 있다. 세병관에도 섬돌이 한곳만 있어 이는 틀린 복원이다. 섬돌은 반드시 세개가 있어야 맞다. 대원군의 사원 철폐때 이곳 충렬사만 이순신 사당으로는 유일하게 존속 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내삼문, 동제, 서제를 지나 중문을 나오면 경춘제와 숭무당이있다. 경춘재의 주련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신다. 이 주련에 있는 시는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야음"이라는 시인데 기러기는 고향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러시에 등장하는 동물인데 대부분의 시상이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인데 이순신 의 시에도 우심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니겠나 조심스레 재해석 하셨다. 충렬사의 제향은 밤에 지낸다. 관솔을 올려서 불을 밝히는 화대가 양옆에 있으며 외삼문과 중문 사이에 있는 태산목에 대한 나이에 대하여 여러 논쟁이 있어 사진을 보여 주신다. 그 사진에는 1944년~45년경 찍은 사진으로 통영수산학교 학생들이 충렬사에 놀러와서 찍을 사진으로  태산목의 묘목이 심겨져 있다. 그로 미루어 74~5년된 나무라고 판단된다. 일전에 제거된 일본 전나무의 나이테는 82년 되었었다. 복원된 강한루에 대하여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3칸으로 복원하여 계단을 오르는 데 불편함을 초래했다. 그 증거는 사진에 명확히 나온다. 뒤에는 영모문이란 현판이 있으며 앞에는 강한루라는 현판이 있다. 강한은 강한지공이란 옛말에서 나온 것으로 예전 강한 지역을 정복한 사람이 천하를 지배한다는 옛고사가 있다. 그를 따와 강한루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하셨다. 


정당새미에도 용왕제를 지내던 터가 있었는데 어느날 우물을 수리 하면서 막혔다. 정당새미 안에 있는 집은 고집을 부려 그대로 서있다. 언젠가는 시에서 매입하여 유서깊은 이곳 정당새미를 보존 해야할 것이다. 고랑을 계속 내려오면 가족고랑이다. 도둑고랑에서 좀 더 내려오면 가죽고랑인데 예전 짐승을 잡아 가죽을 말리던 유래에서 가죽고랑이라 했다. 특히 고양이 가죽을 많이 말렸다고 한다. 고양이는 허리에 특효약이라 하여 약으로 먹었다고 한다. "새터 낭까이"라는 말에 영신이가 세터 낭까이집에 놀러 다녔다고 했다. 새터 낭까이는 남해 사람인데 술만 먹으면 힘이 장사라 주사를 부려 남해 사람들이 통영에다 버리고 갔다고 한다. 통영에서도 술을 먹고 주시를 부려 새터 낭까이라는 별명을 얻어 어렵게 생활 했다고 한다. 통영 토백이들은 새터 낭까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좀더 내려오면 아적제자가 열렸던 곳이다. 약 3m 의 큰 도랑을 두고 양옆으로 집이 있어 나무로 다리을 놓아 지나 다녔으며 서팬(서드레), 동팬(동드레)하면서 이 고랑을 경계로 했었다. 서드레와 동드레 가는 삼거리 골목 아래는 바다라고 했다. 오늘의 수업은 여기서 마쳤다. 이도 소장님 아니면 어느 누가 전해줄 것인가? 소장님이 않계시면 모든게 잊혀질 것이다. 노인한분이 박물관이요 도서관 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하루였다.


2014.4.2 향토사 수업 백세청풍 김용재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 집안 가정 예배보던 곳

▲초정 김상옥 선생 일가를 이루던 곳

▲통영의 마지막 갓쟁이 김봉주 집터

▲이분이 김봉주 어른

▲양지바른 마루에서 갓일을 하고있다.

▲호주 선교사의 집(위)과 기념사진(아래-뒷줄 좌 두번째로부터 공덕귀, 최덕지, 스키너, 권재순)

▲돌담이 정겨운 집

▲서문터

▲성벽을 북원하며 끊어진 길

▲하동집

▲공덕귀 여사 살던곳 대문앞

▲박경리 살던곳

▲박경련 사진(위: 왼쪽 사촌들과 오른쪽 신현중과                        아래: 왼쪽 백석 오른쪽 김연한<자야>)

▲정당앞 구멍을 설명 하시는 소장님

▲태산목 묘목이 심겨진 사진

▲이중섭의 충렬사 풍경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히신다.(팔작지붕,활주,황토언덕)

▲간장공장

▲아적제자(아침장터)

▲서피랑 99계단

▲서피랑 도로 공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