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11강 한산도

청풍헌 2014. 6. 9. 07:51

향토사 강좌가 종착점에 왔다. 이번이 야외 수업 마지막이다. 종강은 문화원 동락마루에서 실내 강의를 하며 질의 응답과 다과회를 한다. 오늘은 한산도를 방문했다. 한산도는 곳곳에 이순신 장군이 제승당을 운용하면서 활용을 한 여러 지명이 남아 있은 곳이다. 제승당은 초대 통제사로 재임할 때 이곳에 통제영을 열었던 곳이다. 이곳에 통제영을 연 이유는 무었인가? 거슬러 올라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다이묘들의 세력을 다른 곳으로 표출 하고자 명을 칠테니 길을 비켜라 하여 조선을 침범했다. 파죽지세로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한양을 점령했다. 당시 조선 수군의 경상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도망 갔으며 경상 우수사인 원균은 겨우 도망쳐나와 한산도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친분이 있는 옥포만호 이운룡을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하지만 국법으로 정해진 관할 구역에 의거하여 장계를 올려 허락을 득한후 경상우수사 관할로 출전한다. 1차,2차,3차 출전으로 대승을 거둔다. 3차 출전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대를 괘멸시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고 전투하는 곳곳마다 승리를 거둔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선조임금은 삼도를 통괄하는 지휘체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순신을 초대 통제사로 제수한다. 당시에는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을 왜구로 부터 방어할 최적의 장소가 한산도임을 알고 이곳 두억포에 제승당을 열고 전쟁에 대비 하였다. 이곳은 왜구가 전라도로 가는 길목으로 이곳만 막으면 조선을 구할 수 있다는 선견지명으로 통제영을 열었다. 한산해전의 장소는 어디인가?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삼칭이 앞바다라고 하는데 이는 좀 더 검증해야 할 문제다. 당시의 장계에는 왜구들이 바다에 빠져 약 200명이 한산도로 도망하여 원균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돌아갔다 한다. 이를 볼때 한산해전의 정확한 장소는 구멍섬(대,소혈도)근처 걸망개 숲 앞이라 생각된다. 해갑도는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벗었던 곳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蟹는 게해자로 게딱지씸벙개) 처럼 생긴 섬인데 나중에 변하여 풀어 헤칠 解로 변하여 갑옷을 벗었다라고 변했다. 해갑도의 모습이 마치 씸벙게가 기어가는 모습을 닮았다. 


제승당 입구 현판에서 대략적인 설명이 있었다. 정유재란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수군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도망 오면서 제승당에 불을 질러(청야작전) 폐허가 된다. 청야작전은 당시의 전술이었다. 적의 수중에 무기와 군량미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병법이다. 140여년을 수풀속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조경 통제사가 부임하여 살펴보니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영을 열었던 제승당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안타까워 중건을 하게된다. 초기에는 작은 초옥을 짓고 빗돌을 세워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였다. 이곳에 3년 8개월을 기거 하면서 자체적인 군량과 병장기를 만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며 나라를 위한 마음은 난중일기에 상세히 기록 되었다. 제승당의 출입구는 원래 건너편 선착장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햇치를 하던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이 가을 놀이 와서 술먹고 놀던 장소로 변질되어 술을 먹고 싸움을 하여 배를 타고 도망을 가 선착장을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승당 가는 길은 바닷가로 나 있다. 한참을 걸어야 하는 길은 사색의 길이다. 노송이 우거지고 산새소리 들리는고즈녁한 길에 비가 부슬부슬 오면서 안개가 내려 앉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는 소장님의 말씀대로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내렸다. 대첩문이라는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글씨로 힘이 있다. 대첩문을 지나 올라 가는데 동백나무에 노란 사과가 달렸다. 그래 바로 이것이야. 내가 작년에 그렇게 찾던 춘복이라는 동백의 변형된 열매였다. 잎이나 열매가 변형되어 사과나 가지처럼 생겨 섬사람들은 이것을 "가지"라 하며 먹었다고 한다. 작년 한산도 망산길에서 시커멓게 변한 춘복을 보았는데 이렇게 생생한 춘복을 보다니...


사당을 방문 할 때는 먼저 참배를 하고 설명을 한다. 충무사忠武祠에 참배를 했다. "국궁, 배, 흥" 으로 예를 갖추어야 하나 '배례' '바로'로 약식으로 한다고. 영정은 원래 이상범-김은호-정형모순으로 그려 졌으며 정형모 화백은 육영수 여사 국장때 초상화를 그린 인연으로  많은 작품이 있다고 한다. 제승당 유허비의 빗글은 아주 잘 쓰여진 글이라 한다. 유허비 옆에 심겨진 배롱나무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배롱나무는 백일홍 이라고도 하는데 나무의 껍질이 매끈하여 부드럽다. 만지면 미끌미끌 하여 부드러운 미인의  피부를 연상하여 옛 선비들이 좋아 했다고 한다. 좋아했던 나무를 무덤가에 심던 유래가 있는데 배롱나무는 선비들이 좋아한 나무이며 무덤가에 심겨진 나무였다. 사정으로 왔다. 바다 건너 과녁이 있는 특이한 사정으로 수군들의 훈련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이런 곳은 여러군데 있다. 바다 건네에 세워진 과녁은 사실 특이한 것은 아니다. 통개도에도 있다. 수루는 시멘트로 지어져 방문객들의 항의로 나무로 다시 건축 중이다. 제승당의 방향이 다르다. 옛그림에는 바다쪽으로 되어 있는데 돌아 앉아 있다. 수루의 공사 현장을 보고 싶었으나 비가 오는 관계로 천막을 덮어 보지 못했다. 제승당 기둥의 주련은 이순신장군의 친필인지 물어보니 집자를 한 것이란다. 즉 이순신 장군의 글씨를 한자 한자 모아서 집자한 것이라 한다.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 경한안진고驚寒雁陳高 우심전전야憂心轉輾夜 잔월조궁도殘月照弓刀"-->"바다에 가을이 깊어가니, 추위에 놀란 기러기 높이 날고, 근심으로 잠 못 이루는 밤, 그믐달이 궁도를 비추네." 제승당 현판은 조경 통제사의 글씨이며 내부에 있는 큰 현판은 김영수 통제사의 글씨이다. 망팔望八은 80세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70세를 이야기 한다. 이 현판은 떨어져 파손 된것을 인부들이 불을 피우는 것을 보고 급히 진화하고 보수하여 보관 했다고 한다. 김영수 통제사의 제승당 현판의 뒤를 살펴보니 보수한 흔적이 보이며 1985년 11월에 복원 했다는 글귀가 있다.


차량 세대에 나눠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았다. 역졸-여차-창동-진두--추원-예곡-곡룡포-의항-하포-장작지-신거-두억개-선착장 코스로 돌아보기로 햇다. 덮을개는 왜 덮을 개인지 알 수 없다. 왜구의 시체로  덮였다로 회자된다. 고동산의 장수바위는 장수가 올라 고동을 불었다고. 고포는 대고포, 소고포가 있는데 염개라고도 한다. 염개는 소금을 구운 장소라고 하는데 원래는 염소를 기르던곳이 소금 염鹽으로 변한것이라 추정했다. 조선시대 소금을 만드는 방법은 지금처럼 바닷물은 햇볕에 증발 시키는게 아니라 가마솥에 바닷물을 끊이는 방법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역졸 마을은  옛 한산진과 거제를 잇는 역참이 있었다는 전래가 있다. 여차는 너추리 라는 노의 아래부분 처럼 생겼다 하여 너추리에서 변음된 것이아닌가 추론되며 여조(어장)나 양조(큰바다 어장막)에서 유래된게 아닌가 한다. 창동은 통제영을 두룡포로 이진한 후 한산창을 운영한다. 즉 창고가 있던 곳이다. 상여도에는 과녁이 있다. 예전 과녁은 지금처럼 큰 나무판이 아니라 천에 맷돼지 그림을 그려 둘둘 말아서 수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과녁을 만들어 사용했다. 추원포는 세종조에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할 때 출전한 장소이다. 원래 견내량에서 출전 했으나 태풍을 만나 이곳 추원포에서 머물다 출정을 하여 정벌을 했다. 이곳에 227척의 배가 정박할 만큼 큰 포구였다. 예곡은 여근곡, 여곡에서 변형된 지명으로 비정되며 가배량 우수영때 이곳에 기생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곡룡포는 고부랑개 라고 한다. 욕지도의 자부포를 자부랑개라고하는 것과 같다. 진두는 한산면의 중심지다. 한산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합쳐져 멋진 교사로 재 탄생했다. 진두에서 모든 여객선이 다녔다. 한산도의 명동이다. 야소 마을은 여우가 많이 출몰하는 깊은 골인데 야소로 철을 다루는 곳이란 지명으로 변했다. 하포는 원래 멸치가 많이 잡히는 곳 멜개였다. 멜개를 한자로 표기하면 "며을포" 였는데 진남군 때  어께에 메다의 멜하荷를 사용하여 하포가 되었다. 다시 군수품을 하역하는 곳이라 한다. 고개를 넘어오면 대촌이다. 대촌은 한산도라는 섬에 이렇게 넓은 농토가 숨어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너른 들판이 있는 큰 마을이다. 이곳의 별신굿을 유명 했으며 지금은 사라졌다. 신거라는 지명은 대촌에 비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거라 했다. 의항은 개미목이다. 문어포의 한산대첩비는 완공 직전에 박대통령의 피살로 35여년을 방치되어있다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후 준공식을 했다(2013). 문어포는 애환이 있는 동네였다. http://blog.daum.net/backsekim/490. 


세월호 때문에 주민증을 제시 해야 승선이 가능했다. 터미널에 내려 통영김밥집에 걸린 옛 여객선 사진을 보며 잠시 추억에 젖어 본다.


2014.6.2(월) 한산도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선상 강의중인 소장님

▲해갑도

▲수루를 다시 짓고 있다.

▲예쁜이들

▲현판에서

▲한산 제승당 그림(제승당과 선착장 방향 참조)

▲열강 경청중

▲사색의 길

▲입구 대첩문

▲춘복1

▲춘복2

▲춘복3

▲춘복4

▲정형모 화백 초상화

▲엄숙한 분위기

▲한산정

▲145m 과녁

▲김영수 통제사의 제승당 현판

▲뒷 부분

▲제승당 앞에서

▲곡룡포에서

▲대첩비 가는길

▲한산대첩비

▲대첩비 가는길

▲여객선1

▲여객선2

▲여객선3

▲여객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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