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12 통영의 역사와 문화유산

청풍헌 2014. 6. 16. 23:10

향토사 강좌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종강이다. 단편적인 상식으로 지식 갈증을 느껴 향토사 강좌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벌써 종강이라니 아쉽다. 통영의 최고 향토 사학자이며 네이버 지식人  김일룡 소장님에게 듣는 향토사 강좌는 아무나 들을 수 없는 명강의 였다. 학문과 인격이 완숙기에 접어드심을 이번 강좌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적지않은 연세에도 세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어 열정을 쏫아 내신 소장님은 진정한 통영의 살아있는 역사요 박물관이다. 소장님의 다양한 지식이 후대에 잘 전해지길 바랄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지역사를 배우는 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매 강의마다 역설 하셨다. 강의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현대에 적용할 것인지 고민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를 배워서 내공을 쌓고 또 그것을 여러사람에게 나누어 공감하고 같이 나아갈 바를 찾는게 배우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단편적인 지식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며 이렇게 정리된 지식을 하나 하나 시시 때때로 전해 주어야 할  것이다.


통영의 역사는 멀리 중생대 및 쥐라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대한 공룡 발자국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륜읍도와 고성지역의 공룡발자국 화석은 너무나 유명하다. 선사시대의 유적인 패총과 고인돌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발굴되어 많은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패총인 욕지, 상노대도, 연대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우리나라 신석기 유물을 대표 할 만한 하며 특히 발찌는 국립박물관 신석기 유물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로 넘어 오면서 고인돌은 원동과 봉평동 남평리 스포츠파크 자리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이후 가야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에 이른다. 고려때의 춘원역은 광도면 황리인데 그곳에 역마터가 있었으며 당산터에는 철마 7기가 출토 되기도 했다. 조선초기에 오륜마을에 산성을 쌓았는데 그곳이 가배량진성인 줄 모르고 오륜산성이라 하다 가배량진성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수군도만호가 지키던 곳으로 이후 거제 가배량으로 이진하였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거제 가라산에서 봉수가 올라오면 미륵산에서 받고 우산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간다. 사량도 칠현산에도 봉수대의 흔적이 있는데 그곳을 복원을 하지말고 보존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원은 없는 상태를 그대로 재연하는 것이고 보존은 현재 있는 그대로 보존 하자는 말이다. 봉수대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어 보존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1592년 4월13일 왜군의 침공으로 부산진성이 순식간에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점령 당했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출동하여 1차 옥포-합포-적진포에서 승리를 한다.  합포가 마산이라 비정 했는데 창원 합개로 수정되는 추세이며 적진포는 적덕마을에서 다시 당동으로 화당리나 적개로 토론되고있다. 2차 출동으로 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을 치른다. 당포는 역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데 삼덕이라는  일제 강점기 지명으로 사용하여 개명할 필요가 있다.  3차 출동으로 한산도-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둔다. 한산 해전의 장소도 일부 수정되어 구멍섬 앞이나 걸망개 옆이라 한다.  여기에서 난중일기나 임진장초에 기록된 지명의 비정에 대하여 검정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제승당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기록에 의한 죄목(조정을 기만한죄, 적을 치지 않은 죄, 남의 공을 가로챈 죄)으로 한양으로 압송된후 원균이 통제사에 제수된다. 조정의 압력으로 부산으로 출동한 원균은 역풍과 조류 및 지휘체계의 미숙으로 칠천량에서 전멸하는 수모를 당한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은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퇴각하며 제승당을 불살라 폐허가 되었다.


1604년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에 통제영을 세우고 약 300년간 이곳이 번영과 역사를 아우르는 고장이 되었다. 통영성을 쌓고 삼도의 수군들이 춘추로 모여 합동 수조를 하며 훈련과 점검을 하였다. 군비를 확충 하기 위하여 12공방을 열어 각종 군수품과 민수품을 제작 유통시켜 군비를 비축한다. 이런 기반위에서 면면이 내려오는 전통과 기술의 발전으로 통영의 무형문화재가 탄생한다. 또한 통영이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인구대비 평양 다음으로 많은 문화예술인을 배출 했다고 하는데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통영은 300년의 통제영 문화와 항구가 주는 부의 축척으로 인한 선진 교육열로 일본유학을 보내 신식 교육을 받았지만 일제 강점기 제대로 할 수 없어 문화 예술쪽으로 빠졌다. 해방후 문화협회를 만들어 통영문화 르네상스를 이룩했다.


질의 응답 시간  


문: 통영은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탄생 했는데 이는 통제영 이후 세대이다. 통제영 시대에는 유명한 학자나 벼슬을 한 사람이 없는지?

답: 통제영은 계획된 군사 도시다. 조선시대는 武보다 文이 우선시 되는 사회였다. 무의 도시에서 훌륭한 문이 탄생 하기란 쉬운것이 아니었다. 과거 급제자는 없고 진사가      2명 있었다.  진사는 지방에서 보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다. 신관호(신헌)통제사와 교류한 시인들의 문집인 유양 8선집과 도산 수월 김씨문중의 죽일집이 전해진다.


문: 연대도에서 발굴된 패총 유물을 통영으로 유치할 수는 없는지?

답: 발굴유물의 소유는 국가가 가진다. 발굴기관에서 편의상 보관 전시를 한다. 조건에 맞는 박물관을 만들면 위탁 관리 전시할 수 있다.


문: 병선마당 이름 찾기 운동과  윤이상을 통영시에서 보호해야 할 방법과 운동에 대하여~

답: 문화마당을 통제영 복원과 함께 병선미당으로 이름을 찾아야 한다. 윤이상의 이념에 대하여 정치적인 문제는 민감하다. 생가터는 반드시 보존해야 한다.


문: 거북선의 실체에 대한 견해는?

답: 거북선은 실물이 없다.  앞으로 발굴 가능성도 희박하다. 서해와는 다른 조건이므로 보존되기 힘들다. 발굴 조사단이 문어포 앞에서 발견 했다는 별황자총통은 가품이

     었다.


문: 옛사진중 남문 옆의 건물은?

답: 1910년 전후의 일본식 집이며 앞의 초가에는 사진관의 간판이 보인다. 통영 최초의 사진관으로 보인다.


그동안 답사때 마다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회원들에게 먹는 즐거움을 선사한 소인경씨와 향토사 모임의 활성화에 온 정열을 다한 조복연씨, 수업이 끝나면 즉시 수업내용을 정리하여 한번도 빠지지 않고 카페에 올려준 송언수씨에게 소장님이 직접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다. 누군가의 정성과 관심이 향토사를 빛내며 꾸준한 문화운동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올해의 수업은 끝났지만 향토사 수업은 매년 해마다 연연히 이어질 것이다. 日新又日新이라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향토사가 될것이다.


2014.6.10 문화원 동락마루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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