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해안선 탐방

나는 바다로 돌아가고싶다

청풍헌 2014. 9. 30. 09:33



6. 나는 바다로 가고 싶다.(해골바위) 도남동-봉평동-미수동

도남동은 토박이 지명인 데메에서 유래한 도미동(道味洞)이었다가 다시 남포동으로 분동되었다. 1900년대 도미동은 도산동으로 개칭 된다. 1914년 일제 강점기 도산동의 도()자와 남포동의 남()자를 도남1, 도남2구로 칭하다가 도남동으로 변천했다. 과거 충무관광호텔이 있었던 지금의 국제음악당에는 도남의 당산이 있었던 곳이다.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서정귀씨가 경남 관광호텔 1호로 이곳 큰 발개의 당산나무를 밀고 호텔을 건립했다. 지역민들의 걱정과 우려속에 관광호텔이 건립되고 역대 대통령들이 묵어가는 관광명소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신혼여행지로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이후 호텔 아래 금호그룹에서 충무 마리나 리조트를 건설하면서 치 끝에 있던 해골바위는 육지로 변하고 매립 할 당시 김세윤 전 원장이 몸으로 막아 지금의 형대로 남았다. 나는 바다로 가고 싶다. 통영의 관문에 서서 통영을 지켜주던 상징인 해골바위는 매립으로 육지에 외로운 바위섬으로 변하여 이것이 무었인지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모른 채 방치 되어 있다. 금호마리나는 요트 계류장을 소유하고 있으며 회원권을 분양하여 요트 투어를 하고 있다. 하지만 비 활성화로 제대로 운영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모노헐에서 부터 멋진 쌍둥선인 카타마린, 트리머랜까지 여러 종류의 요트가 도남항의 고요한 바다에 계류되어 있다. 년 간 계류비만 꽤 비싸단다. 요트 계류장은 폰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즉 해수면의 조수 간만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계류장이며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는 시설이다


통영국제음악당은 클래식 전용관으로 20103월 착공에 들어가 도남동 1번지 3358대지에 연면적 14618㎡, 지상 5층 건물로 지난 7월 준공했다. 사업비 520억 원(국비 243도비 166시비 110)으로 1300석의 콘서트홀과 300석의 다목적홀을 갖추고 있다. 당초 통영시는 도남동 충무관광호텔을 헐고 이미 확보된 예산 480억에 국비 500 도비 500 1000억원을 더 구해 세계적 수준의 음악당을 건립하려고 계획했었다. 진의장 통영시장은 "윤이상 선생의 고향에 음악당을 짓는 것인 만큼 세계적인 랜드마크가 되도록 해야 한다"며 세계적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에게 음악당 설계를 맡기기 위해 2007년과 20082월 두 차례 미국으로 건너가 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당초 부지도 접근성이 좋은 시내등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교통영향평가, 장소, 경관 등을 참조하여 충무관광호텔을 헐고 그곳에 짓기로 하고 설계공모 및 시공자 설정등 착착 진행 되었다. 수차례의 설계변경이 있었으며 이는 완공 후 수익성에 대한 걱정으로 설계가 변경 되었다. 돈먹는 하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수익사업을 해야 하므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공간 재배치가 되었다. 충무관광호텔을 허물 때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상징적인 건물에 예향 통영을 위하여 후학들을 키워내는 예술학교를 유치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원래 당산이었던 자리에 음악당이 들어서니 이는 오히려 더 성업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목신에게 안녕을 빌며 길놀이를 하던 것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음악당은 윤이상 음악당이라 이름을 쓰지 못하고 결국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되었다. 음악당의 정체성은 윤이상이다. 좌우 이념의 사상에 억매여 민족주의인 윤이상을 품지 못하고 아직 빨갱이 윤이상이라는 사람이 통영에도 있다


2014년 통영국제음악당의 최초 개막공연은 알렉산드 리브라이어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협연이다. 첫 번째 연주곡은 윤이상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유동'(1964)이다. 2006년 음악제의 주제가 '유동' 이었다. 당시의 주제는 이 곡에서 따왔다고 한다. 통영국제음악제와 음악당의 존립 이유가 윤이상이다. 멋진 클레식 공연장에서 통영바다를 바라보며 최초의 연주곡으로 하는게 당연한 이치다. 윤이상의 특별한 감성이 있는 이곡은 파격적인 동양적 음악이 흐르는 연주곡이다. 때로는 정적으로, 때로는 동적으로 바람소리 파도소리 같은 음색이 있는 지극히 동양적인 곡이다. 윤이상의 음악 뿌리는 통영의 소리다. 무당의 갱문하는 소리, 별신굿 하는 소리, 통영의 파도소리 까지 어우러진 독특한 동양적인 음색이 특징 이라고 한다. 귀에 익은 윤이상의 음악은 심오하다. 동양적 중심음에 서양의 무조음악 화성이 섞여 있는 이 독창적인 작곡법으로 인해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15분이 채 안 걸리는 이 곡에서 역시 중심음이 음악적 진행을 이끌어 가고, 주변의 꾸밈음을 대동해 전개되며 빠르면서도 계속 지속 되는 듯 한 비브라토, 글리산도, 트레몰로 등을 통해 계속되는 유동속에 있다. 두번째 연주곡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 장조, 작품번호83 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악에 몰입된 피아노 연주는 소리와 모습에 반할만 한 멋진 연주 자세를 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한 몸이 된 완벽한 연주는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은 만 했다. 세번의 커튼콜에 앵콜연주까지 열기가 후끈한 뜨거운 밤이 되었다. 인터미션후 후반부 연주는 바다를 주제로한 곡이다. 브리튼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 중 네 개의 바다 간주곡, 드뷔시의 '바다'였다. 2014년도 주제가 Seascapes(바다풍경)이다


통영의 밤바다가 훤히 내려 보이는 이곳에서 주제에 부합되는 바다와 관련된 연주곡이다. 음악당의 좌전면에는 상징물이 있다. 음표를 형상화한 상징물로 바닥에는 윤이상이 아내에게 쓴 편지글이 새겨져 있다. 나의 마누라 내 평생 염원하던 나의 목표는 이제 그 문안에 들어 선 것 같소. 목표는 바로 세계적 수준의 작곡가였소. 작곡가가 내 평생 천직인지는 잘 모르오. 그러나 작곡으로서 세계 최전선의 수준에서 인정받게 된 것만은 사실이오. 나는 이 일을 계속 하겠소. 만약 민족을 구원 할 수 있는 또 다른 최선의 길이 나를 요구 한다면 나는 작곡을 던지고 나의 몸을 던지고 그 길을 달릴지도 모르오.”

통영국제음악당이 남부지역 클래식 전용관으로 탈바꿈하면서 통영이 국제음악도시로 명성을 이어갈 전망이다


옛 조선 사람이 살던 큰 발개에 스텐포드 관광호텔이 들어선다고 한다. 지역민들의 반발이 심하여 예산확보가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임시회에서 추가 예산을 확보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봄 시즌 때 붉은 깃발로 음악당 입구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곳에 번듯한 호텔이 들어서면 좋은점과 나쁜점도 있다. 비수가의 통영 숙박업소들은 가동율이 50%도 되지 않는다고 울상인데 단지 극 성수기만 숙박시설이 부족한 것을 이곳에 외국계 호텔이 들어서면 지금의 기존호텔업계의 손님을 뺏어가는 역할밖에 할 수 없다. 서로의 이권에 의하여 시시비비를 한다. 시장의 공약사업으로 임기중에는 추진할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도남관광단지에 써커스가 들어왔다. 관광객 유치차원에서 허가를 내어준 것 일까? 손님이 오는지 지나다 보면 음악이 흐르고 가끔씩 관광차가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국 기예단의 공연을 한다고 한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관광코스로 제법 인기가 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익히는 기예공연은 수많은 연습과 힘든 과정을 거친 기예공연으로 공연 후 어른들이 박수와 용돈을 준다고 한다. 도남 트라이애슬론 광장은 청소년 해양소년단의 체험 장소로 역할을 하고있다. 이순신요트대회와 트라이애슬론 대회가 열리고 청소년 문화마당으로 년중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수년전 철인 3종경기에 오세훈씨와 송일국, 영화 말아톤의 배형진이 합작으로 철인삼종 경기를 한 적이 있다. 이 광장에는 철마다 다른 꽃을 심어 시민들의 정서를 함양하고 있다. 양귀비와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등을 식재하여 연중 꽃을 피우는 곳이다


작은발개와 큰발개에서 발개란 무었일까? 발개란 대나무를 쳐 고기를 잡는 원시 죽방렴 같은 것이란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능동적인 고기잡이가 아닌 수동적이 고기잡이를 했다. 죽방렴이나 독살을 만들어 물이 나고 듬을 이용하여 고기를 잡았는데 일본인들이 그물로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아 작은 발개에 이주 했었다. 작은 발개에는 1907년 오카야마현의 보조금을 받아 오카야마촌(강산촌崗山村)을 건설한다. 일본은 이곳이 통영항과 가까우며 미륵산의 맑은 물이 흐르는 좋은 입지라 이주를 하게 된다. 1907년이면 일제 강점기 전의 일이다. 벌써 일본은 침략의 야욕을 이주 어촌으로 실천에 옮겼다. 일본 어업인들의 조선 해역에서의 어업활동을 합법화한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1889년 체결한 후 대한해협을 수시로 넘나들던 일본인들은 1900년대가 되면서 아예 조선 땅에 눌러앉기로 결심을 굳힌다. 1907년 일본 오카야마현(강산현, 岡山縣)20~50세의 오까야마현 2년 이상 거주자로, 5년간 가족을 동반한 이주자에 대해 1호당 300엔의 장려금을 지원한다. 200엔은 토지 매수 및 건축, 100엔은 어구 및 어선 수리에 사용토록 했다. 이로써 당시 경남 용남군 서면 남포동에는 190713호를 시작으로 1911년까지 매년 10~14호씩 일본인들의 이주가 이뤄진다. 1908년에는 마을 감독자 촉탁, 1910년 학교 건립(강산촌심상학교, 현 남포초등학교의 전신), 1911년 신사 건립(金毘羅神祠, 곤피라신사), 1912년 우편소 지정, 1914년 전화 개통, 남포어업조합 설립, 1920년 순사주재소 설치 등 어업근거지건설 계획을 착착 진행시킨다. 그야말로 일본인들의 집단 이주지에 당시 웬만한 도시에서는 보기조차 힘든 학교, 신사, 우편국, 전화, 어업조합, 순사주재소 같은 근대화된 건물이 즐비했던 셈이다. 1915년 발행된 경남 통영군안내에는 강산촌에 대해 지금은 조선해의 모범촌으로 불러지고 있는데 이주 호수는 65, 인구는 247명이고 학교조합 소학교 우편소 등이 있다. 통영과는 바로 가까이 바다로 격하고 있는 곳이라 교통편도 대단히 좋고 발전도 순조롭다. 주 어업은 조어, 타뢰망, 해서조망, 해노조망, 온지예망, 호망, 예연승, 해만연승 등이 있다라며 별도의 장에 발전상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 1,5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선권현망어업이 남포(강산촌)에서 시작됐다고 할 정도로 통영 근대어업의 시발지로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통영인뉴스에서-

심상소학교는 일본인들만 다니던 학교인데 해방후 남포국민학교로 바뀌고 지금의 가옥들이 대부분 옛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편소가 있던 곳은 백궁이라는 유명한 요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쪽의 집은 우편소장의 사택으로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의 가옥들도 일본식 주택의 뼈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일제 시대 당시 주요 건축물들은 이후 어떻게 변했을까? 우선 강산촌심상학교는 현 남포초등학교가 되었다


발개를 나오면 전통공예관이 있다. 전통공예관에는 통영의 나전칠기작품과 누비작품이 전시되어있다. 작업장이 같이 있어 작업장 가까이는 칠 냄새로 매우 불편하다. 관리인에게 이야기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통영 해양레져 활동의 메카로 역할을 하고있는 통영 해양스포츠센타와 통영요트학교가 있다. 크루저를 비롯하여 딩기요드, 원드서핑을 동시에 즐길 수 있으며 교육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다. 최근 이순신배 요트대회가 열리고 있다. 요트학교 뒤의 소나무 동산이 동개도이다. 동개도는 예전 통제사가 건너편 식송정에서 이곳 섬에다 과녁을 세우고 활을 10순 쏘았으며 그 기념으로 통개도라는 음각을 세기고 동개섬이라 했다고 한다. 안내판의 글씨를 보고 과녁이 섬에 있었다 식송정에 있었다 설왕설래 하였으나 어찌 통제사 나리가 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와 화살을 날렸을까 하여 섬에 과녁이 있었던걸로... 또한 섬이 두개가 동개져(포개져) 있다 하여 동개섬이란 유래가 있다고 한다. 돌발키즈! 1순은 몇발인까? 과녁까지의 거리는?(5, 145m) 이곳에 일본인들은 곤피라 신사를 세우고 해신을 모셨는데 입구 도리이 앞에 세웠던 고마이누()는 관음사 앞에 있다. 또한 이곳에는 1910년부터 약 30여년간 강산촌을 경영한 감독자인 하다켄안(波田兼晏)의 송덕비가 신사 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도남관광지 개발을 위한 바다 매립 과정에서 흙속에 묻혔다


한때 세계 10위권에 속하던 신아에스비와 21세기도 조선업의 불황으로 적막강산이며 그나마 삼호조선은 한국야나세에 인도되어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관광도 좋지만 기본적인 경제 인프라가 구성 되어야 순환이 된다. 수산업에서 조선업으로 앞으로는 무었이 통영 경제의 근간을 이룰것인가? VTS? 세월호 사고로 진도VTS가 언급되었다. 통영 해경도 통영VTS가 곧 가동 될것이라 한다. 해상교통관제센타란다. 이 보직도 과거에는 괜찮은 보직이었는데 세월호 이후에는 엄청 부담이 갈 것이라 말한다. 통영VTS는 통영지역의 모든 선박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해상교통관제센타인데 욕지와 사량도등 중요한 섬에 레이다 기지를 설치하여 전파수신을 받아 감제를 한다. 걸어야 만나는 것들... 봉평동 고인돌은 해평 들녘에 있다. 과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 했다는 증거인 고인돌이 여러 기 있었으나 지금은 두기만 존재하고 남의 밭 한가운데 서 있다. 해평海坪의 평은 평평한 들녘을 의미하며 대평, 남평등등이 있다. 과거 해평부곡이 있었던 곳으로 오래전 사람이 거주했던 곳이다


해평열녀비각은 죽은 남편을 끌어안고 떠오른 열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각이다. 1780년경 해평 부락에 고기잡이를 하며 가난하게 살던 부부가 있었다. 비록 가난하게 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아끼는 정은 남달랐다. 어느 날 남편은 배를 타고 한산도 각수여 부근에 고기잡이를 나갔다. 아내는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되자 어느 때와 같이 바닷가에 나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뒤늦게 같이 고기잡이를 나간 뱃사람들만 죄지은 사람들처럼 돌아와 남편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정신을 잃다시피 한 아내는 밤새도록 울고 또 울다가 새벽녘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울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음날 날이 밝기가 바쁘게 소복단장을 하고 뱃사람들을 졸라 남편이 빠져 죽었다는 바다에까지 나갔다. 그리고는 그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남편의 시신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어쩔 수 없이 시체 수색을 포기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내는 남편의 시체를 찾지 못한 것에 한이 맺힌 듯 뱃전에서 통곡을 하다가 남편이 빠져죽었다는 지점의 바다에 이르자 다른 사람이 만류할 틈도 없이 갑자기 소복치마를 뒤집어쓰고는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말았다. 같이 간 뱃사람들은 놀라 뒤따라 바다에 뛰어 들어가 그녀를 찾아보았지만 영영 찾지를 못하였다. 그로부터 삼일 후 지금의 비각이 있는 해평 연안에 남편의 시체를 부둥켜안은 그녀의 시체가 밀물에 떠밀려 들어왔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지극한 정성이 남편의 시체를 찾게 한 것이라고 감탄했다. 그래서 이들 부부의 시체는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고이 합장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 후 조선 말엽 통영에 삼도통제사가 있던 어느 해의 일이다. 해평마을에 가뭄이 들고 돌림병이 창궐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산과 들의 나뭇잎에 ?해평열녀(海坪烈女)?라는 글자 형상으로 벌레가 파먹은 흔적이 보였었다. 통제사는 이를 이상이 여기고 있던 차 하루는 세수를 하려할 때 세숫대야에 ?烈女?라 새겨진 버들잎이 떨어지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현감은 이런 괴이한 일은 필시 어떤 연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알아본 결과 해평마을에 열녀가 있었다고 하자 이는 하늘이 그녀의 뜻을 가상히 여겨 내려주는 천서임에 틀림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런 사실을 나라에 즉시 알리어 그들 부부의 시체가 표류해 왔던 해평 해안에 萬古倉海一心貞烈이라 새긴 비를 세우고 부락민이 열녀당을 지어 혼을 위로해 주었더니 마을의 재앙과 이변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부터 그 곳 사람들은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내 해평열녀의 정절을 추모하고 마을의 안녕을 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처럼 할 수 있을까? 허벅지를 베어내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고... 왠지 이곳에는 음기가 흐르는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는 나잠조합이 있다. 제주의 해녀가 이곳에서 나잠조합을 만들어 작업을 하고 자신들의 권익 보호를 하고 있다. 해녀가 잡아온 해삼을 삶아 말리고 있다


김춘수 유품전시관이 이곳 해핑이에 있다. 시인 김춘수는 동호동에서 태어나 방앗간 집의 만석꾼 아들로 유복하게 자랐다. 김춘수는 고향의 언어를 자주 언급했다. 통영을 토영, 퇴영이라 했으며 어머니를 오매, 지찌야라고 불렀다. 원래 생가터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데 비싼 가격 때문에 매입이 지연되어 이곳에 유품전시관을 만들었다. 현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중에 하나인 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었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유품전시관을 나오면 통영항의 좁은 수로에 조개를 파고있는 조각배가 있다. 이 조개잡이 배는 오랜 역사를 증언하는 전통 어구법으로 조개를 잡고있다. 원래 항로에는 어로금지구역이다. 그러나 어렵게 살아가는 어민들이 항로인 이곳에는 조개가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갈쿠리를 이용하여 조개를 파서 높은 값을 받고 팔고 있다. 어느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이 일도 허리며 어깨며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배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고된 노동이다. 해양경찰과는 묵시적인 동의가 있는 듯 하다. 살아야 하니까


육지와 연결부인 이곳은 해저터널의 출구이다. 해저터널 입구는 용문달양 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용문(龍門) 즉 해저로 들어가 달양(達陽) 산양면으로 나온다는 뜻이다. 해저터널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과거 이곳은 유일한 통로였으며 좁은 터널에 차량과 사람이 동시에 다니다 보니 많은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다시 육상으로 충무교를 건설하게 된다. 당동에서 충무교를 건너면 우측에 있는 비석은 독지 김삼주 공덕비이다. 통영의 산양면은 미륵도인데 물이 들면 섬이요 썰물이 되면 연결되는 이 목을 착량포 또는 굴량포, 굴포량이라 했다. 최초의 기록으로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기록되어있다. 이후 이곳을 굴포, 굴량, 착량이라 칭하고 나무다리를 놓아 굴량교라 했다. 이후 여러 차례 이곳을 매웠다가 다리를 놓기를 반복하다 마지막으로 1896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목을 파고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자주 무너져 융희1(1907) 이 고장의 독지가 김삼주가 사재를 털어 나무다리를 놓고 보수 관리비를 마련하여 관리했다. 나무다리는 태풍이나 자연적인 재해로 자주 무너지자 통영성벽을 헐어 다시 돌다리를 19157월에 준공했다. 이때 진남군 서면과 산양면민들은 다리를 놓아준 은헤를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이후 통영운하와 해저터널을 가설하면서 착량교는 헐리고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 1967년 충무교가 세워지며 산양면의 짜투리 땅에 송덕비를 모아 세웠다. 3기의 비석과 하나의 돌장승이 있는데 전출신김공삼주송덕비前出身金公三柱頌德碑는 나무다리를 놓아준 기념으로 세웠으며 독지김삼주씨영모비篤志金三柱氏永慕碑 2기와 독지김공삼주시혜비篤志金公三柱施惠碑는 돌다리를 놓아준 기념으로 통영군수와 군민들이 세웠다. 돌장승은 돌다리 양쪽 난간대 끝단에 있던 것인데 3기는 어디로 사라져 없어지고 1기만 남아서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김삼주는 지금으로부터 150년전 통영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모진 가난과 싸우며 열심히 재산을 모아 나이 50이 되기전에 3천석의 큰 부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재산 불리기를 멈추고 불우이웃 돕기와 지역 사회의 공익 사업에 자기 재산을 쏫아 부었다. 예를 들면 흉년이 들어 굶는 사람이 있으면 큰 가마솥을 여러개 걸어놓고 끼니마다 무료급식을 하였으며 태풍으로 이재민이 많이 생기는 해는 곳간을 열고 돈과 곡식을 풀어 이들을 구제 하였다. 가난한 노동자에게 옷가지와 양식을 나누어 주는가 하면 영세 상인들의 세금을 대신 내주기도 하고 각 동리 마다 기금을 만들어 가난한 병자들의 치료비로 쓰게 하였다. 통영 시내의 공동 우물을 모두 고치는가 하면 견내량에 무료로 나룻배를 운항 시키기도 했다.이러한 온갖 사회사업으로 봉사하던 그분은 1907년 판데목에 역시 사재를 털어 나무다리를 놓고 양쪽면에 많은 돈을 맡겨 다리를 손보게 했으나 그래도 오래 견디지 못하자 1915년 나무다리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다 무지개 돌다리를 놓았으니 이것이 착량교다. 그후 일제가 해저 터널을 건설 하느라 착량교를 헐어버리지만 이 다리는 12년 동안 미륵도를 시내 육지부와 잇는 하나뿐인 길이요 다리였다. 가운데 송덕비는 김삼주 어른이 처음 나무다리를 놓아준 공덕을 다리 양쪽의 면민들이 고마워서 세운것이고 나머지 2기의 영모비와 아까 봉평동에서 본 시혜비는 돌다리 착량교를 세워준 은혜를 당시 통영군수와 통영군민 그리고 시내에서 양태갓을 팔던 상인들이 각각 세운 것이다. -정갑섭 2002년 통영문화원-

99년전 통영의 거부가 노블레스오블리제를 시행한 흔적을 살펴 보았다. 진정한 부자는 돈을 잘 쓰는 것이라 한다. 온갓 사회사업을 하며 섬으로 건너다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재를 털어 나룻배를 운항 시키고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편리하게 다니도록 했다


아래에 있는 산양면사무소山陽面事務所 음각비에 왔다. 이곳에 산양면사무소가 있었다는 표석인데 언제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찾고 있는 중 이란다. 착량교를 건너면 산양면이라 이곳에 면사무소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표석을 세겼는지는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숙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산양면 사무소는 진남군 서면에서 진남군 산양면으로 분면한 이후 사무실 위치를 정하지 못하여 사무실 건축시 까지 면장자택에서 사무를 보았다. 1910년 면장 조기신이 구당포 진사 1동을 수선하여 사무실로 사용한 이후 1919년 봄 미수리 남수마을에 면사무소를 신축하였다가 1940년 남평리 궁사마을로 이전 하였다. 산양면사무소 음각비를 볼 때 이곳이 최초의 산양면 사무소터가 정확할 것이다. 진남군에서 미륵도로 들어오는 입구이며 많은 사람들의 통행 입구였다. 이곳 산양면사무소는 통영의 삼일 만세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1939일과 12일 통영의 의식 있는 인사들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하기로 했다. 313일 오후 8시경 통영면 등사판을 가지고 산양면 사무소에 가서 그곳의 등사판과 함께 12백매의 격문을 인쇄 하였다. 등사에 필요한 미농지를 일본 상인 중촌 상점에서 구입 했는데 밀고로 인하여 등사판을 갖다 두러 갔다가 체포되어 옥사를 한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한때 이 표석을 신축하는 산양읍사무소로 옮길 것 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아직 신축 읍사가 되지 않아 그런지 조용하다. 역사적 유물은 현 위치에 있는 것이 가치가 있다산양면의 인구증가와 도남관광단지의 활성화로 인한 유동인구 증가로 다리의 증설이 필요하여 동양의 나폴리에 걸 맞는 멋진 다리를 놓고자 여러 궁리 끝에 호주 시드니 하버 브릿지를 닮은 통영대교를 건설하였다. 철골 트러스트교로 야간에는 초록빛의 조명이 은은하게 운하를 비추는 멋진 다리가 되었다. 짜뚜리 공간에는 해양공원을 조성하여 많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멋진 공연을 하기도 한다. 과거 이곳은 히로시마무라 라고 일본인 이주촌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헐리어 공원과 미수동 주민자치센타가 들어섰다


미륵도에는 통제영의 중요한 진이 두 곳 있었는데 삼천진과 당포진이다. 당포진은 과거 임진왜란시 중요한 거점역할을 한 곳으로 이후 통제사가 수시로 원행을 나갔던 곳이다. 당포진을 순행하고 돌아오던 통제사 정낙용은 목이 말라 물을 먹었는데 이곳의 물맛이 좋아 약천(藥泉)이라는 글씨를 내려 지금도 약수터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표석도 관리되고 있다. 미수동과 산양읍의 경계인 세포고개 혹은 가는 이 고개에는 두개의 전설이 있으며 하나의 실화가 있다. 방두수라는 날건달이 주막집 과부에 눈이 멀어 처를 죽이고 마루 밑에 방치하여 원한을 품고 귀신이 되어 고갯마루를 지나는 사람을 괴롭혔다. 이에 힘깨나 쓰는 청년이 오막살이 폐가에서 귀신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양지 바른 곳에 장사 지내주니 그때부터 귀신이 없었다는 전설과 현금산 중턱에 천택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아래 장금수라는 샘이 있어 그 물을 마시면 장수가 될 만큼 힘이 생겨 천택사의 스님들이 장금수를 먹고 행패를 부렸다. 어느 유명한 풍수쟁이가 지나다 동민들의 하소연을 듣고 골탕을 먹일려고 스님들은 만나 절이 번창하는 비법은 "서방정토"라고 서쪽의 세포고개를 잘라 길을 내면 된다고 하여 땅을 팠는데 흰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절에 빈대가 끊어 절이 폐사 되었다 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실화는 지금도 세포고개에 있는 유인월성정씨영세불망비 이다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전 이곳 어민들은 용동궁에 진상하는 전복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용동궁은 황실의 직속 궁으로 통제사도 어쩌지 못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세금을 거두는 도장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 이에 탁상천의 아내 월성정씨가 아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임금님에게 격쟁으로 알려 전복 진상을 면제 받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씨는 지방 아전들의 눈치를 받으며 고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는데 달밝은 날에 고개에 나타나 "네 오데가노"하며 말을 붙였다. 이에 동민들이 힘을 모아 영세불망비를 세워 혼백을 위로해주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미륵도는 통영항을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 많은 서민들의 애환이있는 곳이다. 성안사람과 성밖 사람을 구분 하듯이 통영 시내사람과 미륵도 사람을 구분하기도 했다. 짧지 않은 거리를 걸으며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진 보석같은 통영의 길에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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