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해안선 탐방

3.귀신잡는 해병대

청풍헌 2014. 8. 7. 23:47

3. 귀신 잡는 해병대

견내량은 560m의 좁을 수로로 예전부터 관방의 요충지로 자리매김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사절요에 정주부의 난으로 고려 의종왕이 난을 피해 귀양 오면서 건넜다하여 전하도라 했으며 거제도는 조정과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라 귀양지로 가는 사람들이 육지에서 섬으로 나룻선을 타고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임진왜란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공명심으로 수군을 단독 출병시켜 한산대첩의 시발점이 된 장소이다. 이후 통제영에서는 방영을 세우고 좌우 연안의 왕래하는 선박을 검문 하였다. 건륭 19(1754)에 조동점 통제사가 계문에 따라 제승당에서 방영을 옮겨와 풍화風和(3~8)에는 우후가 유방장留防將으로 나아가 방어하고, 풍고風高(9~2)에는 철수했다. 배를 점검하는 일은 유방장이 겸하고 신창감은 명령대로 시행한다. 부속 아사衙舍는 건륭20(1755) 우후虞侯 이우평이 처음 세웠다. 서해정, 대변정, 군관청, 장관청, 무사청, 진무청, 사부청, 화포청, 군뢰청, 취수청, 사공청 위와 같이 설치하였다.(통영지 방영편) 일제 강점기 통영의 독지가 김삼주는 견내량의 도선 영업이 개인의 몽리에 매여 있어 그 폐단을 염려하여 도선 영업권을 매수하고 토지를 붙여주어 사공의 운용을 도왔으며 통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임으로 건너도록 시혜를 베풀었다. 견유마을은 견내량 유방留防의 합성어다. 몇 해전 활어 위판장을 세워 어민들이 시내까지 오지 않고 여기서 경매를 하도록 배려했다. 이곳 횟집 수족관의 생선이 맛있다는 소문이 수달(水獺)에 까지 퍼져 매일 밤손님으로 수달이 다녀갔다고 "TV동물농장"에 방송 되었다. 수달은 건너편 거제의 오량 저수지에 서식하는 수달이었다. 수달과 공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19506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제히 삼팔선을 넘어 남침을 하였다. 628일 서울을 함락 당하고 밀려 내려오던 정부는 결국 부산까지 후퇴하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 보루로 삼고 전투를 했으나 진동지구에서 승기를 잡고 방어선이 교착상태에 빠진다. 인민군들은 고성과 통영을 돌아 거제에서 마산과 부산을 공격하기 위하여 817일 통영을 점령 하였다. 견내량은 과거에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통영을 점령당한 해군 통제부에서는 거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 명령을 받은 김성은 부대는 면밀히 검토한 결과 넓은 지역의 거제 방어보다는 통영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탈환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아래 작전 변경을 요청하게 된다. 상륙지는 장평리다. 작전 변경을 승인받은 김성은 부대는 지도 인근에서 민간 어선을 징발하여 밤늦게까지 각종 장비와 탄약을 실어 날랐다. 상륙을 하는 동안 해군 함정은 통영 앞바다에서 함포사격을 집중하여 눈이 쏠리게 유인작전을 했다. 물자 이동은 차량이 없어 장평리 사람들에게 보급품 운반을 부탁 했다. 4~60대 노인들과 어린 학생들이 이고지고 하여 쌀과 박격포탄을 날랐다. 이렇게 견내량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 작전을 성공한 곳이다. 상륙작전을 벌였던 곳에 표석을 세우고 기념하고 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취재차 들런 뉴욕해럴드트리뷴 종군기자 마가렛트 히긴즈에 의하여 한국 해병은 <귀신을 잡는 해병>(Ghost- catching Marines)이라는 기사에서 "한국 해병대는 악마조차도 잡을 정도였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고 썼고 그 이후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한산대첩은 승리하여 조선을 구하고 김성은 장군은 해병대 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구한 역사적인 곳이다. 과거 방영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지명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배가된다. 그 많던 아사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견유마을 선창에는 환경운동가 고영경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오늘 우리는 지역과 지역민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외로이 올곧을 길을 걷다 역사 속으로 산화해 가신 고영경님의 행적을 기리고 그 이름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움니다. 님께서는 1945520일 용남면 장평리에서 태어나 통영고등학교를 졸업후 줄곧 통영을 떠나지 않고 삶을 영위 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이 땅과 바다, 사람을 사랑 하였기에 온몸으로 환경을 지켜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였습니다. 그의 환경 인식은 남달랐습니다. 1980년 통영시 용남면에 <충무시 생활 쓰레기 종말처리장>이 허가 되었고 1983년에는 산업폐기물 처리시설로 재 허가됨에 따라 이로 인한 심각한 피해가 우려되어 환경운동을 시작 하였습니다.투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1986년부터 2004년까지 <두창 산업폐기물 처리 및 피해보상 대책위원장>을 맡아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를 상대로 설득과 투쟁을 계속 했습니다.이런 노력의 결과로 환경 보전을 위한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고 200212월엔 사업비 133억을 확보하여 종합적인 대책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1988<안전만 국가 공단 조성사업>으로 어민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어업피해보상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2003년엔 <통영환경대책위원장 및 3개지역(통영.고성.거제)통합 위원장>을 맡았고 2005년에는 LNG수입에 따른 국세를 지방세로 전환키 위한 대정부 활동을 벌렸으며 2006년에는 가스공사의 가동으로 인한 <3개지역 어업피해 손실보상 대책위원장>으로 맡은바 소임을 다하였습니다. 이 와중에서 중병을 얻고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면서도 생태환경의 완전한 복구를 위해 진력 하던 중 20071219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투철한 환경 지킴이였던 님의 노력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몇가지 공적이나마 이렇게 세겨 봅니다. 제 한 몸 바쳐 사람다운 삶을 위해 환경 운동에 투신 하다가 생애를 마감한 고영경님의 이름 앞에 우리는 열사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세겨 둡니다. 또한 님이가신 그 고결한 뜻을 이 비에 담아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2008330일 시인 이달균 지음" 이렇게 세겨져 있다. 고개를 넘어가면 율포가 있다 일면 밤개라고 하는데 밤나무가 많이 자생했던 곳이다. 원평리는 조선시대 검은 돌이 층층이 샇여있는 포구라 검박개또는 검북개라 했다. 1890년경 견내량 원에 속해있던 앞의 넓은 논을 칭했던 토박이 지명 원들의 한자지명을 따서 원평동이라 했다. 밤개를 돌아가면 지도(紙島) 도선장이 나온다. 지도는 종이섬이라고 하는데 원래 고성현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 종해도라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 종이섬-지도로 변천된 것으로 사료된다. 지도는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에 대구어장으로 유명하다. 잠시 그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김약국은-십년전 약국을 그만두고 어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이 고장 사람들은 여전히 성수 영감을 김 약국이라 불렀다. (중략) 칠흑같이 어두운 어장막, 뭇 괴수들이 수 없이 울부짓고 달려오는 듯한 바람소리, 파도소리···. 통영항구와 아득히 떨어진 여기는 종이섬 어장막이다. 2002년 태풍 매미로 거제로 들어가는 철탑이 무너져 한동안 정전사태를 겪고나서 송전선로를 하나 더 세우면서 지도로 통과 하도록 설계하여 보상으로 도선을 만들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대나무가 무수히 자생했던 곳이어서 이름 붙여진 대밭몰 죽촌(竹村)은 바닷가 자생 밤나무마을인 밤개 율포와 함께 죽촌마을을 이룬다. 검은 바위가 층층이 쌓여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적포에서 개칭된 적촌은 논이 많이 있는 골짜기에서 유래한 논실골(답실골)과 말꼴 먹이는 마장(馬場)에서 유래한 마당개(마장개)와 더불어 적촌마을을 이룬다. 바깥 검북개가 적촌(赤村)(적개)이며 안 검북개는 내포(內浦)(안개)이다. 내포를 지나면 씸뱅이 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씸뱅이는 일명 승방(僧房)마을 이라 하는데 옛날 무속이 성했던 곳이라는 설과 절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씸뱅이 마을은 팬션이 들어서 팬션 마을로 변했다. 따뜻한 남향의 언덕에 앞 바다에는 상장도와 하장도가 길게 형성되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요트나 보트놀이에 적합하다. 마주 보이는 건너편이 덕포리 창포마을이다. 돌아 나오면 해안도로를 만들고 있는데 아직 대방포로 이어지지 않았다. 해마다 예산대로 공사를 하다보니 언제 완공이 될는지? 다시 적촌으로 나와 우측으로 길을 들어서면 연화사와 보금자리 요양원이 나온다. 논싯골로 들어서면 묘지가는 길이 가늘게 형성되어있다. 산등성이를 넘으면 대방포 가는 길로 연결된다. 좀처럼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에 멧돼지와 고라니가 점령했다. 처음 길을 탐방 할 때 고라니를 세 마리나 마주쳤다. 서로 놀라서 흠짓했다. 안대방골에도 간척지가 있다. 이곳은 대방포 마을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야 있으므로 좀처럼 외지인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법 습지가 발달하여 도둑게와 각종 염생식물이 자라고 석양의 갯벌은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휘어져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원평리, 장평리, 삼화리 해안 마을은 대부분 굴작업을 한다. 즉 곳곳에 박신장이 있다. 대방포에서 양촌을 넘어오는 길에도 해안도로를 따라 박신장이 늘어서 있다. 양촌은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양촌이라 했다. 양촌이 있으면 건너편은 음촌 있다. 음촌의 바닷가 깨끗한 어느한 집은 제주 올레 처럼 대문으로 들어서는 길다란 공간이 있다. 그 끝에서 하얀 백솥에 무언가를 고우고 있다. "뭐하십니까? 아들 며느리가 맞벌이 하는데 소대가리 고우고 있다"고 하신다. 수원지청 검사로 근무하며 며느리는 법무사라고 하신다. 검사님의 어머니시다. 아드님 잘 키우셨네요. 용돈은 많이 줍니까? 하니 통장에 꼽아놓고 쓴다고 하신다. 처마밑에 달린 메주덩이와 어머님의 얼굴에 자식을 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음촌에서 신리로 가는 이 길은 인도가 없는 걷기에는 위험한 길이다. 김성은 장군의 비망록이다. 18일새벽 우리가 적촌을 거쳐 음촌으로 가는동안 703함과 소해정에서 포격을 퍼부었다. 밤새 포성이 진동을 하였다. 우리의 상륙을 위장 하기 위하여 적의 눈을 돌리고자 703함의 이성호 함장과의 사전 약속 이다. 그래도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정찰대를 앞세우고 원문고개를 향했다. 3중대와 7중대의 근황이 궁금했는데 마침 무전이 왔다. 7중대는 매일봉을 점령 했으며 3중대는 여황산을 점령 할려고 하니 적의 반격이 매우 심하여 주춤거리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모든게 계획대로 움직여 준다. 원문 고개는 예나 지금이나 약 1km의 가는 목으로 이곳만 틀어 막으면 인민군의 추가 집입을 막고 보급품을 차단하여 독안의 쥐로 가두어 사살 할 수 있다. 아군의 생명을 보장하는 중요한 전투다. 목숨을 걸고 사수하라! 새벽에 도착하여 높은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여 박격포와 총을 거치 할 수 있도록 배치를 했다. 인민군들이 이곳 원문 고개를 통과하여 시내를 진입 하여 시내를 분탕질 하고 있으므로 원문 고개는 무사히 점령 했다. 날이 밝아지니 긴장감이 더했다. 좌우 사주 경계를 하고 있는데 시내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렸다. 피아간에 치열한 교전이 있는듯 하였다. 이날(18) 시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3중대가 맡은 여황산은 충렬사 뒤편의 적들의 저항이 완강하여 고전 하고 있었다. 그때 자갈길에서 트레일러를 단 소련제 지프 소리가 들렸다. 인민군 군관들이 타고오는 지프였다. 일제 사격을 가하니 타고있던 인민군들이 꼬꾸라지고 지프는 논구덩이에 쳐박혔다. 살아있던 인민군은 날살려라 도망을 가고 지프와 각종 무기를 탈취했다. 본부에 무전을 하여 지프의 노획을 보고하니 김성은 부대장이 이동수단이 없었는데 전용 차가 생겼다. 하루의 전투로 인하여 탄약이 거의 바닥이 났다. 해군에 보급품을 공급받기 위하여 불필요한 사격을 금지하고 보급품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에 매일봉뒤 동남쪽에 상륙한 보급품이 분배되었다. 197중대는 매일봉에서 내려와 시내를 점령했다. 남은 잔적을 소탕하고 3중대는 충렬사 뒤의 적과 교전했다. 전세는 완전히 우리의 뜻대로 되었다.승리를 장담하고 충렬사에 승전을 보고하는 참배를 했다. 오후 세시쯤 우리 중대가 지키는 원문고개에 집중 포탄이 떨어졌다. 원문을 점령하기 위한 인민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5시쯤 7중대가 합류를 했다. 우리 중대(2중대)는 원문의 우측(죽림만)을 맡고 7중대는 좌측(북신만)을 맡았다. 11시쯤 인민군의 대 부대가 개미때처럼 쳐들어왔다. 총을 쏠 수 없는 거리였다. M1소총에 대검을 장착하고 해병대의 기질을 발휘하여 백병전이 벌어졌다. 우리 해병대는 징집당시부터 체격과 근성이 있는 사람을 뽑아 싸움이라면 한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들은 다시 물러갔다.이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전사를 한 군인은 고종석 하사였다. 새벽에는 퇴각하는 인민군 80여명을 7중대가 포로로 잡았다. 920일 까지 약 1달간 9번의 공방이 있었다. 도산면의 도산초등학교에 본부를 둔 인민군들은 양지마을의 바위굴에 진지를 구축하고 원문을 점령하기 위하여 수시로 공격을 해왔다. 하지만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의를 상실한 인민군의 퇴각으로 원문 전투는 끝났다. 이 전투로 인하여 적 사살 469, 포로 83, 노획한 야포와 중화기 차량 등이 있었다. 923일 전과를 보고하는 자리에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가 귀신이라도 잡겠다는 기사를 타전해 한국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으로 호칭되는 계기가 되었다.대안 마을은 오래된 마을이다. 이 길이 옛길임을 각종 효열비가 즐비함으로 증명된다. 원문에서 갈라져 거제로 들어가는 장문리 옛길이다. 대안마을은 원문, 신리마을과 함께 장문리에 속한다. 원래 지명은 場門 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원래 큰 동리라는 대안大安으로 개칭 되었다. 회관앞의 은행나무는 보호수이고 옆의 큰 느티나무와 마을 입구의 팽나무는 보호수에 버금가는 수세를 자랑하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남아있다. 원문마을은 통영만의 입구 목이다. 이곳만 막으면 통영으로 진입이 불가하다. 그래서 이곳에 원문성을 쌓아 방비 했었고 한국전쟁때에도 이곳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중요한 거점이다. 귀신잡는 해병대의 길을 걸었다. 이 길도 의미있는 길이다. 17km (견유-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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