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해안선 탐방

4.원문성(轅門城)

청풍헌 2014. 8. 9. 21:19

4.원문성(轅門城)

통영의 관문인 원문성(轅門城)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곳을 통제영의 적지로 삼은 이유가 육상 해상의 요충지로써 육상은 원문만 막으면 들어 올 수 없으며 해상은 견내량과 판데목만 지키면 천혜의 요새가 되는 곳이라 이곳 두룡포에 통제영을 열었다.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장()으로 재면 1,173() ()로재면 무려 11,730()나 되고 보()로 계산하면 2,346()가 된다. 높이는 장()으로 한장()반 자()로는 15()이다.성가퀴는 707()이다. 남문은 이층의 누문이고 동 서문은 각 1층이며 북문은 동서에 암문(暗門:숨겨서 몰래 통하는 문)을 두었으며 누()는 없다. , , 북쪽에 포루 세 곳이 있다. 원문(轅門)2층 누각이다. 원문으로부터 왼쪽과 오른쪽은 바다에 닿았는데 돌을 쌓아 막은 성채의 왼쪽은 길이 151() 높이 13() 오른쪽은 길이 202() 높이 13()이며 통제영으로부터 북쪽으로 10리 거리이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여지도서 경상도 통제영 성지편) 여기서 왼쪽과 오른쪽은 어떤 방향인지 살펴보자. 경상 좌수영은 동래(부산)이며 경상 우수영이 통영이다. 전라 좌수영은 여수이고 전라 우수영은 해남이다. 이는 기준이 임금이 있는 북쪽에서 바라본 방향이다. 그러므로 원문성의 왼쪽은 원문만이며 오른쪽은 북신만이다. 그러므로 원문만에서 원문까지151보이며() 북신만 바닷가 에서 원문(轅門)까지 202보이다.() 여기서 척()과 장(),()의 관계를 현재의 기준에 적용해 보자. 옛 척도의 단위는 10,000()=1,000()=100()=10()=1()이다. 여기서 문제는 척과 보의 관계이다. 조선시대 기준 = 1= 10[]=31.22cm 보통 성인 남자의 발걸음 기준이다.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1보를 표준 척도의 6척으로 정했으며 이는 성곽을 측정할 때 주로 사용하고 견포의 길이를 재는데도 사용했다. 1444(세종 26) 이후 6척이 1보로 정해졌다. 조선시대 1= 6= 187.32cm (김치연 박사 상명대 교수) 여지도서 통제영에 표기된 통영성 두레가 11,7302,346이면 5척이 1보로 표기되었다. 조선 세종 12(1430) 이전에는 중국의 도량형을 사용 하였는데 단위가 통일되지 않아 5척이나 6척을 1보로 표기 했었다. 세종 12년 집현전에서 통일하여 전국적으로 사용 하였다.이후 정조 시대에 건설한 수원 화성 성역의궤에 기록된 것이 6척이 1보라고 확정되었다. 그러나 여지도서에는 1보는 5척으로 기록되어 통영성3662.1m 이고 원문성 235.7m 315.3m이다. 이렇게 길이를 따져보는 이유는 원문성의 정확한 위치가 비정 되어야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알 수 없다. 기록과 주민들의 인터뷰로 원문성 문루는 원문리 33번지다. 원문성은 통제사의 교대시 이곳에서 했으며 통제영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오횡묵비가 서있다. 오횡묵은 정선, 자인, 고성, 함안 군수를 역임하며 많은 저술활동을 했다. 그중 함안 총쇄록에 기록된 통제영에 관한 사항은 통제역 복원사업의 중요 자료가 되었다. 당시의 생생한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통제영 건물과 현판 주련 생활습속 병사(육군)와 수사간의 갈등까지 또한 통제사의 부임과정 까지 주옥같은 자료를 남기셨다. 이 자료에 의하여 통제영 복원과 통제사 행차 및 군점등등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이 비는 도로 공사시 두 동강이 난 것을 보고 시청에 건의하여 복원을 했는데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외(嶺外)에 복성(福星)이 밝게 빛나셨도다. 임금님의 근심은 나누어 갖고 남쪽 마을에 오셔서 은택을 베푸셨도다. 은혜와 사랑을 입은 뒤에 흉년임을 잊고서 칭송이 마을에 자자하고 명성이 조정에 까지 들렸으니 아름답구나 우리 임금님이시여. 이런 좋은 신하가 있으니 이것을 단갈(短碣)에 쓰니 백세토록 아름다운 이름이 전해지기를.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 승상께서 즉위하신지 어언 22년 영외(嶺外) 바닷가 10여 주군(州郡)이 크게 밝아지었네. 병술년 봄. 백성들이 은혜가 막히어 굶주렸을 때 노약자들은 고랑에 굴러 죽어있고, 어린 아이들은 다 팔려 가거나 들에서 굶주려 죽어 도랑을 다 메웠으며 봄의 들판은 황폐하게 내버려져서 이 남쪽 밭에는 거의 한 사람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아아. 성후(聖后)께서 이 봄에 남쪽을 돌아보시어 모든 읍에 진휼(賑恤) 하실 걸 생각하셨다. 이 암흙 같은 늪에 빠져서 괴로웠을 때 별향사(別餉使)를 특별히 차임 하셔서 남쪽의 고을을 다스리게 하니 공이 명() 받들길 성심을 다 하였다. 이 땅에 오셔서 형제 잃은 사람과 부인 잃은 사람을 조상하시고 굶주린 시체를 묻어 주시고 처노(妻奴)를 속량해 주시고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셨다. 무릇 4개월 동안 산자를 구휼하고 죽은자를 묻어준 것이 대개 10만은 될 것이다. 공께서 성상의 뜻을 깊이 체득하고 친히 진휼을 챙기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를 봉양케 하고 자기 처자를 보호케 하니 남방이 태산과 같이 편안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공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데에서 나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작은 비갈에 새겨서 이 업적을 잊히지 않게 기리기 위함이다.-오횡묵의 함안총쇄록- 원문에 있었다는 서유대 통제사 마애비를 찾아 이리저리 헤맨 적이 있었다. 큰 바위만 보면 마애비인 줄 알고 뛰어가곤 했는데... 결국 고속도로 건너편 언덕에서 찾았다. 갈 때 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었다. 주위에는 쓰레기가 방치되고 풀과 나무가 우거져 이것이 무었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여름휴가 때 태안으로 휴가를 갔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마애비를 살피니 주위에 공사를 하는지 흙이 파 헤쳐져 있었다. 마애비의 안녕이 궁금하여 차를 타고 갔었다. 다행이 아는지 모르는지 마애비는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統制使徐公有大통제사서공유대 숭정후삼신축(崇禎後三辛丑)(1781) 서유대 통제사는 세병관 현판을 쓴 통제사이다. 그 내용은 무익공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김일룡 소장님) 소중한 문화재가 방치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어떻게 하면 될까 궁리 하다가 일단 낫으로 나무를 정리하고 인쇄 코팅하여 현판이라도 달자. 그래서 통영의 마지막 대장장이 이평갑 어른에게 낫을 한자루 샀다.(8,000) 현판을 코팅하고 로프를 구하여 배낭에 넣고 집을 나섰다. 초가을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선선하여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다. 13명이 원문 생활공원을 출발하여 서유대통제사마애비를 찾았다. 여기가 서유대 통제사 마애비 입니다 하니 다들 깜짝 놀란다. 이렇게 소중한 유산이 방치되어 있다는게 안타깝다고 이구동성 이야기를 했다. 베낭에서 낫을 꺼내 주변을 정리하고 줄을 치고 현판을 달아 놓으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또 한편으로 이렇게 표식을 해 놓으면 누군가 훼손을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아래쪽 펜션을 가로질러 내려가면 시립충무도서관이 나온다. 이 도서관은 세운지 얼마되지 않으나(2013.3,7) 죽림의 인구증가로 인하여 꼭 필요한 도서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시민들의 도서관 이용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정기휴관일을 매주 금요일과 법정공휴일로 정해 매주 월요일 휴관하는 무전동 시립도서관과 중복되지 않도록 했다. 죽림만 매립지는 통영시내의 팽창 정책으로 이곳 죽림리를 매립하여 부족한 도시면적을 확보하고자 시작 되었다. 매립후 아파트가 들어서고 신도시가 형성 되었으며 각종 관공서가 이전 하면서 급속히 도시화가 되었다. 죽림난 한 가운데 외로이 서 있던 내죽도는 매립으로 육지속의 섬이 되었고 지금은 공원 역할을 하면서 죽림 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있다. 해안길은 산책 장소로 또는 달리기 장소로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각종 해상사고가 끊이질 않아 예산을 투입하여 안전 가드레일을 설치하고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밤바다를 즐기며 낚시를 즐기는 곳으로 변했다. 철마다 낚는 고기가 다르며 겨울에는 학꽁치가 많이 잡힌다. 가로등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맑고 투명한 물은 죽림만의 자랑이다. 이 맑고 깨꿋한 물에서 자란 굴과 각종 해산물은 자연의 맛을 제공하고 그맛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찾곤 한다. 죽림에는 대형 마트이 E마트가 있으며 모텔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한때 모텔의 조명을 권장하여 통영으로 들어오면 모텔의 조명이 화려하게 빛나 약간 넘사스런운 적도 있었다. 죽림 어촌이 조바우 끝으로 이전하여 어업을 영위하고 있다. 죽림은 고려때 죽림부곡에 유래 했으며 죽림, 조암, 홀리골, 향교마을이 있다. 해안 모롱이를 돌아가면 매립지가 나온다. 조선시대 구허역이있던 곳으로 난중일기에 나오는 지명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15954월 초10일에 "구화역의 역졸이와서 보고 하기를 적선 1척이 또 역 앞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3도 중위장으로 하여금 각각 배 다섯척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달려가서 형세를 보아 무찌르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화역이 구허역인 이곳 노산을 뜻한다. 덕포교를 휘돌아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좌측 산먼당을 깍아 석산을 개발 하는지 아니면 예전에 호텔을 짓는다는 현판을 본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없다. 단순히 석산을 개발하는지... 해안도로 아래 바닷가에 상수관이 두줄로 갔다. 아마도 상수도관인 것 같다. 도로공사시 미리 관로를 묻었으면 이런 불상사가 나지 않았을 것인데 일전에 한산대첩길 답사시 논아랫개 도로 공사시 상수관을 미리 묻어둔 지혜를 발휘한 시청 관광과 시설계장이신 윤창환 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공무원들도 내 일처럼 앞을 내다보고 일을 처리하고 혜안을 가져야 한다. 파도에 깍이고 햇볕에 노출과 바람에 풍화작용을 하는 수도관이 안타까울 뿐.그러나 어쩌라. 인간의 젓줄인 물인데. 손덕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의 유래가 적힌 큰 입석이 있어 자세히 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통영장으로 다니는 길이 노산재(손덕재)를 넘어 힘들게 다님으로 해안길을 내고자 스스로 마을 사람들이 부역을 해서 리어카가 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을 내고 확장 포장을 한 길이 해안도로이다. 마을 들머리에 작은 사당처럼 생긴 집이 있는데 이곳이 삼은정 유허비다. 노산과 우동 손덕에 사는 세 은사가 서로 교류하고 우애를 가짐으로 그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다 제각을 짓고 동네 유림들이 기렸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지금은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안에는 무었이 있는지 물어보니 약방의 각종 자료들이 있지 않나 추측했다. 손덕마을은 옛부터 어장이 풍부하여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 노산의 대부분 토지들이(80%)이곳 손덕사람들의 토지라고 한다. 농사를 지어 소출이 나면 배를 이용하여 싣고 왔다고 한다. 옛길이 너무 힘들어 바닷가로 길을 내면서 지게와 정 지렛대를 이용하여 순전히 손으로 인력으로 바위를 깨 겨우 리어카 다닐 정도의 길을 내었다고 한다. 창포, 구집 사람들도 이 옛길을 지게 지고 이고 들고 통영장을 다녔다고 했다. 지금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으니 좋은 세상이라고...소나무 언덕위에 제실과 산소는 김해김씨 산소라고 한다. 언덕의 고목인 소나무 아래는 동네 노인들의 쉼터를 만들어서 땀을 식히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의자를 잘 만들어 놓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마늘을 심다가 그늘에 와서 쉬고있어 담소했다. 이곳은 물이 귀하여 우물을 파면 짠물이 나 밥을 해도 간간 했으며 빨래의 때가 가시질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는 영운리에서 이곳으로 시집 왔으며 할배가 술을 많이 먹어 애가 탄다고 한다. 하루에 댓병 한병을 마신다고 한다. 길 아래쪽의 소나무와 팽나무가 보이는곳이 당산나무인데 예전에는 새끼줄을 걸고 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폐기되어 당산제도 없다고 했다. 창포 고개로 넘어간다. 창포는 마을의 유래가 창고가 있던 개라 하여 창포라 했다. 고개를 넘어가면 참숯 찜질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목조 통나무 집을 짓고 있었다. 멋진 통나무집이 3동이나 올라가고 있었다. 창포마을이라는 입석을 지나면 영암김씨 박사공파 제실과 산소가 있다. 지난 겨울(2012) 탐방때 정확히 알아보지 못하여 오늘은 마음먹고 물어 봐야지 하고 입구를 들어갔다. 마침 그곳에는 제법 젊은 사람이 마늘밭을 갈기 위하여 관리기를 세우고 쉬고있어 이것저것 물어 볼 수 있었다. 영암김씨가 어떠한 이유로 귀양을 와서 이후 사면 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잘 되어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조상들의 비석을 세우고 성역화를 했다고 한다. 영암김씨의 박사공파 제실이다. 입간판에는 영암김씨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있는데 조상중 중종시대 호남 체찰사로 갔다가 왜적을 물리친 공로로 영암군을 제수받고 영암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후대가 우연히 이곳으로 내려와 일가를 이루고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가문을 빛내었다 라는 내용이다. 안타까운것은 조상의 산소에 있던 석물이 몇해에 걸쳐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석등과 망주석들을 훔쳐가 지금은 세것을 세워 놓았다고 한탄했다. 마을의 정자에 어른들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이 창포인데 옛날 통제영의 창고가 있었습니까?옛날 통제영의 창고를 짓기 위하여 작은 나룻배에 기와를 싣고 오다가 배가 빠졌다. 그당시 기와를 실은 배의 돗대가 보였는데 그곳을 지금도 기와여 라고 한다. 뱃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통제영 창고는 저쪽 어디엔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만석꾼이 살았었다. 만석꾼의 집 주춧돌이 여러개 있었는데 지금은 한개만 남아있다. 골목길을 내려오면서 본 그 주춧돌이 만석꾼의 집 주춧돌 이었다.(혼자서 통제영 창고의 주춧돌로 착각함) 만석꾼집의 곡식 창고가 저곳에 있다. 예전 창고는 무너지고 지금 그 자리에 동네의 창고가 세워졌다. 창포는 분명 창고와 연관이 있었다. 이곳의 당산나무도 소나무로서 언덕에 있다. 구집으로 넘어오니 각종 공장이 있고 바닷가에서 개발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옛길을 물어보니 공장 옆으로 길이 있는데그 길이 옛길이며 구집으로 넘어가는 길 이라고 일러준다. 좀 왔지만 도로 후퇴하여 그 길로 들어섰다. 옛길은 포장이 잘 되었으며 고개를 넘으니 마을이 나타났다. 길은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약간 아래로 내려갔다. 바닷가 길과 만나는 지점에 작은 선대 조선소가 있으며 배가 한척 올라와 있었다. 작년 탐방때 육지로 올라온 창명호 라는 제호로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구집 마을 회관의 쉼터에서 물도 마시고 마을회관 쉼터 평상에 누워 피로를 잠시나마 풀었다. 고개를 넘어오다 이곳도 틀림없이 질러가는 길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다시 마을로 들어섰다. 동네 청년에게 물어보니 예전에는 적덕가는 고갯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갈 수 없다고 한다. 고갯마루가 험하게 보여 다시 돌아 내려왔다. spp 의장 작업장을 돌아 나오면 적덕 마을이다. 김상현 기자가 적덕마을 이장님에게 전화하여 간식을 부탁 했는데 고구마를 삶아준다고 했다. 적덕마을은 돌이 붉다하여 적덕마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장님 사모님을 초청하여 바위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상사바위는 고개넘어 마을의 처녀와 총각이 좋아 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둘다 죽었다. 밤마다 뱀이 되어 기어 올라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다. 부처바위 아래에는 영험이 있는 부처가 있었다. 붉은바위는 임진왜란때 백성들이 피를 흘려서 붉은바위라 하고 또한 6.25때 인민군에 의하여 피를 흘린 바위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마을 공부방에서 삶은 고구마를 먹으며 마님 놀이에 빠졌다. 마당 입구 바닥에서 고구마를 먹는 사람은 이랫것들이요 평상에서 먹는 사람은 손님, 마루에서 먹는 사람은 마님이라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돌담이 예스러운 골목길은 추억의 길이며 또한 무르익어가는 가을이 있다. 길은 떠남의 공간이자 돌아옴의 공간이다. 그리고 지향의 공간인 동시에 한걸음 뒤로 물러선 자기 성찰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무엇보다 길은 인연을 소통하는 소통의 공간이다. -조선통신사의 길에서 오늘을 묻다- 11km (원문-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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