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51회 토요걷기(김약국의 딸들) 멀어져 가는 얼굴들, 가스등, 고함소리. 통영항구의 장막은 서서히 내려진다.

청풍헌 2015. 5. 16. 23:11


 

통영(統營)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漁港)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며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무렵 통영항구를 점묘(點描)해보면 고성반도에서 한층 허리가 잘리어져 부챗살처럼 퍼진 통영은 복장대 줄기를 타고 뻗은 안뒤산이 시가를 안은 채 고깃배가 무수히 드나드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안뒤산 기슭에는 동헌(東軒)과 세병관(洗兵館) 두 건물이 문무(文武)를 상징하듯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시가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과 동문 남문 중간에 있는 수구문을 합하여 모두 다섯 개의 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통영을 통영사람이 가장 통영답게 표현한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를 찾아보는게 지극히 타당한 도리라 생각되어 소설을 수 차례 읽었다. 현재 지명과는 다른 여러곳이 있었지만 소설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지금도 존재하는 지명들을 따라서 걸었다. 걸음걸이의 동선에 따라 관창골에서 서문고개, 명정골, 북문밖, 남망산으로 길을 잡았다. 


관창골 전경

관창골

동헌에서 서쪽을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 간창골 건너편에는 한량들이 노는 활터가 있고 이월 풍신제(風神祭)를 올리는 뚝지가 있다. 그러니까 안뒤산과 뚝지 사이의 계곡이 간창골인 샘이다. 간창골에서 얼마를 올라가면 서문이 있다. 그곳을 일컬어 서문고개라 한다이 고을에 김봉제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인 봉제는 조상 때부터 살던 간창골 묵은 기와집에 있었고 동생인 봉룡도 간창골에 살고 있었지만 형네집과 뚝 떨어진 안뒤산 기슭의 청기와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은 부모 생존시부터 봉룡의 몫으로 신축한 것으로 형네 집보다 산뜻하고 운치 있는 집이었다.

과거 수많은 통제영의 관청들이 몰려있던 이곳 관창골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옛 통제사들이 충렬사로 다녔던 길이며 뚝제를 지내러 갔던 길, 수조나 성조을 위하여 나다니던 길 등  무수한 이야기가 숨은 곳이다. 현재 유적으로는 세병관 건물과 영리청, 관창골 새미가 거의 유일하다. 소설의 본격적인 무대가 되는 봉룡의 집(김약국의 청기와집)을 짐작해본다.


서문고개로 가는 길

가자 죽으나 사나 가야제

서문터

서문고개

가자 죽으나 사나 가야제.“ 한실댁은 코를 풀고 멍멍한 소리로 말하며 마당으로 내려와 용란의 손을 잡았다. 눈물을 짜고 달래면 또 따라 나서는 용란이다. 용란은 보따리를 끼고 집을 나섰다.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그들은 서문고개를 넘는다. 물 긷는 처녀, 각시들로 밤길은 어수선하였다. 보따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우죽우죽 따라가는 용란의 모습은 염소처럼 순하고 어질어 보인다. 용란이 친정으로 올 때마다 이 고개를 울먹울먹 넘어가는 한실댁은 양지기만 같았다.

소설속의 용란은 아편쟁이 성불구자 연학에게 시집가서 걸핏하면 두들겨 맞아 친정으로 온다. 세 딸들(용숙,용란, 용옥)이 울며 넘었던 서문고개는 사방으로 뚫린 도로에 옛맛을 잃었지만 그래도 선교사의 집이 바라보이는 작은 언덕이 있고 옛돌담이 살아있는 곳이다. 


명정골 전경

용숙이 살던 대밭골

명정샘 표석

오구작작 지분냄새 풍기던 명정샘

서피랑 살리기 프로잭트에서

명정골

용옥은 방문을 차고 나왔다. 대문을 열려고 했을 때 서영감은 어느새 용옥의 뒷덜미를 잡았다. 용옥은 대문가에 있는 절구통의 주걱을 들고 서영감의 얼굴을 쳤다. 서 영감은 스러졌다. 용옥은 대문을 열고 뛰었다. 충렬사의 동백나무 밑까지 온 용옥은 이슬에 젖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 명정골 새색시가 여럿 들어 왔지만 중구의 새색시처럼 예쁜 여자는 없었다. 앞머리가 보기 좋게 곱슬곱슬 하고 입술이 연분홍인 새색시는 미인이었다 /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러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뒷 당산과 마주 보이는 곳이 안산이다. 안산을 넘어가면 작은개, 큰개, 우룩개가 있어 봄이면 멸치떼가 시뻘겋게 몰려든다. 명정골 우물에서 서문고개로 가는 길을 되돌아서면 대밭골이다. / 용숙은 아들 동훈이 아프다 하여 여러 차례 왕진을 청하던 자애병원의 의사와 정을 통해오다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시동생이 쫒아냄으로써 그 많은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여서 연못에 빠뜨렸다는 것인데 의사의 처가 시동생에게 달려가서 결국 사건은 크게 벌어지고 의사와 용숙은 경찰서에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명정골이다. 서피랑 개발사업에 큰 기대를 하는 명정동은 박경리 학교를 개설하고 인사하는거리, 환경개선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통영의 어느 지역보다 이야기가  풍부한 곳으로 아직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 내가 보기에는 동피랑보다 더 훌륭한 소재가 있는 곳이다.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곳, 이곳에서 박경리의 소설도 주 무대를 이루었다.

서편다리,동팬다리 하는 삼거리 갈림길 

멀리 보이는 새터시장 

도로골

대밭골을 지났다. 인적은 끊어졌다. 밤은 괴괴하니 사방에서 스며들었다. 그들은 서편 다리를 건넜다. 다리 밑에는 마침 들물 때라 그득히 밀려온 바닷물이 방천을 찰싹찰싹하고 있었다. 그림자 두 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위에 흔들거린다. ..... 도로골 깊숙이 큰 대문 앞에서 모녀는 걸음을 멈추고 서로 바라본다. 현 통영여중고가 있는 곳이다.


새터

새터(산을 무너뜨려 바다를 메워서 물러낸 장소) 아침 장은 언제나 활기가 왕성한 곳이다. 무더기로 쏟아 놓은 갓 잡은 생선이 파닥 거리는 것처럼 싱싱하고 향기롭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규환(叫喚)속에 옥색 안개 서린 아침, 휴식을 거친 신선한 얼굴들이 흘러간다. 새벽별은 밝고 축림, 전하도, 장대 방면에서 호박, 고구마, 야채 등을 이고지고 북문 안을 들어서는 촌부들, 안뒤산 큰개, 작은개에서는 조개를 이고 충렬사를 지나는 아낙들, 발개와 첫개에는 어장배에서 생선을 받아 가지고 판데굴을 지나오는 장사꾼들, 삼면 바다에는 기관선으로부터 통구맹이까지 해초, 생선을 실은 어부들이 바다의 새벽을 뚫는다.

새터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아침장으로 통한다. 수협에서 경매가 끝나면 싱싱한 수산물을 아침장에서 판다. 소설속의 표현처럼 지금도 마찬다지다. 아침장은 새터시장 저녁장은 중앙시장으로 통했다. 바닷가에 있는 통영이 싱싱한 수산물이 공급되는 이유로 음식이 맛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윤선머리

연지와 분이 얼룩진 얼굴을 하고 용옥은 윤선회사 대합실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침배가 있다하기에 선표를 사려 했으나 누군가가 그 배는 마산가는 배라 했다. 대합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배도 작고 초라하여 용옥은 그런가보다 하고 멍청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배가 떠나고 나서야 그 배는 마산을 돌아서 부산으로 가는 배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배는 소소한 항구마다 기항하며 장승포를 빙 돌아서 가기 때문에 또 속력이 느리기 때문에 아주 시간이 걸린다. “연희엄마 신강호 탔음 생사 궁금 김

중영선소 자리가 윤선머리다. 일제강점기 수산물의 수탈 현장이며 위안부가 잡혀 깄던곳, 육로가 발달하기전의 해상교통의 요충지다. 충무깁밥이 태어난 곳이며 청운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는 뭇 풍경속에서 희노애락이 함께 공존했던 곳이다. 김용익의 소설 밤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세병관

홍섭이 먼저 발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엉성하게 엮어둔 철망을 건너 교정으로 들어갔다. 용빈도 뒤따랐다. 그들은 세병관 -세병관은 소학교 교사의 일부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돌축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잿빛 박명이 깔린 세병관 돌축대 한구석에 시커먼 지붕의 그늘이 덮이고 사용이 금지된 세병관 정문 옆에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밤은 고요하다. 아름드리 기둥에 옛날 비자(婢子)를 잡아넣었다는 전설이 있는, 그래서 밤이면 귀신이 난다하여 이 근방은 사람들은 피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세병관은 웅장함 그 자체다. 1605년에 만들어진 그 때 그 모습으로 연연히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가 내재된 국보305호 세병관은 조선의 어느 건물보다 우수하고 지랑스통영의 유산이다. 용빈은 홍섭의 이별 통보를 받는 곳으로 표현되는 장소다.


북문밖 표석

북문밖 언덕 산비탈 집

북문밖

세병관을 지나 재판소와 포교당 절 사이의 좁은 골목을 빠져서 북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북문 고개를 넘어 다시 산비탈로 올라갔다. 초가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좁은 비탈길을 창문에서 새어 나온 희미한 불빛이 비쳐준다. / 한실댁 머리위로 무엇이 쏟아진다. “어이구우머리위에 두 손을 얻었다. 그 손위에 또 무엇이 쏟아졌다. “아이구우 사람 살려랏한실댁이 푹 쓰러졌다. 이 소동에 깊이 잠들어 있던 한돌이와 용란이 깨었다. 그들은 도끼를 휘두르는 연학을 보았다. 연학도 그들을 보았다. 끼득 끼득 웃으며 그는 다가왔다. 한돌이의 눈에 쳐든 도끼가 못박힌다. 도끼가 허공에서 돌았다.

소설의 가장 극적인 부분이 북문밖 도끼만행 사건이다. 1976년도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생각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비가 오는 으스스한 골목길에서 연학의 도끼가 춤을 추고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는 빗물과 섞여 끔직한 살해 현장을 떠 올린다. 북문과 성곽이 헐리면서 산비탈 좁은 초가집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 짐작해 본.

남방산 사장(射場)터(영화표석)

남방산

용란아 내가 토영에 왔다, 내가 남방산 사장터에서 니를 기두릴 기니 밤에 오너라. 한돌이.” 겨우 긁적거린 서투른 글씨, 읽는 용란도 어설프다. 하지만 한돌이라는 이름 석 자만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기에 그의 얼굴은 새빨개졌던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용란은 한돌이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기다린다. 소설속의 한돌이는 무당의 아들로 주인의 딸 용란을 사랑하다 김약국에게 들켜 통영을 떠난다. 결국 사장터에서 만난 두사람은 북문밖에 딴살림을 차렸다가 살해 당한다.



용빈과 용혜는 손을 흔들었다. 배는 부두에서 서서히 밀려 나갔다. 배 허리에서 하얀 물이 솟아져 나왔다. “부우웅.” 윤선은 출항을 고한다. 멀어져 가는 얼굴들, 가스등, 고함소리. 통영항구의 장막은 서서히 내려진다. 갑판 난간에 달맞이꽃처럼 하얀 용혜의 얼굴이 있고, 물기찬 공기 속에 용빈의 소리 없는 통곡이 있다.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


소설을 읽다 덮어 버렸다는 독자는 어쩌면 철저하게 비극적인 묘사를 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철처한 비극은 작가의 내면에 있는 느낌을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은 후세 우리들의 임의적인 생각인지 모른다. 당시 시대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쇼킹한 줄거리로서 인기를 얻었다. 소설이 나오자마지 영화화 했으며 이후 mbc에서 드라마화 했다. 김약국의 딸들에 관한 논문이 여러편 존재할 만큼 대단한 작품이며 토지를 쓰기 위한 이행 과정이라는 분석을 한 논문도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지만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무대를 살펴본 것은 의미있는 발걸음이었다. 


2015.5.10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