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경남의 백의종군로2 (두치- 하동읍성) 슬픔과 그리움이 어떠하겠는가?

청풍헌 2015. 6. 29. 23:08

경남의 백의종군로2 (두치- 하동읍성)

621일 일요일 09시 출발 2차 답사 갑니다. 두치에서 하동읍성까지 같이 가실 분 댓글 부탁! 카스에 올렸더니 지부장님만 댓글을 달았다. “잘 다녀 오세요.” 그래도 가보자고 의견일치했다. 고상안님은 당직이라 착량님과 함께 단둘이라도 가보자. 9시에 만나 서호시장에서 시락국으로 속을 채우고 하동읍성으로 향했다. 오늘은 하동읍성에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두곡 삼거리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네비양의 안내로 읍성에 도착, 버스시간을 알아보니 하루 세 번 들어오는데 지금은 없고 오후 4시경에 있다고 했다. 이런 낭패가??? 히치하이킹 하자는 둥, 택시를 부르자는 둥 설왕설래 하다가 지난 1차 답사 후기의 댓글 중 정기룡님이 생각나 전화를 하여 의견을 구했다. 나중에 픽업을 해 준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두곡 삼거리에서 단단히 무장하고 길을 떠났다. 읍내 삼거리에서 읍내로 진입했다. 지형 상 이쪽 길이라 생각되었다. 하동읍사무소에 왔다. 통상 읍사무소터가 현청터이다. 원래 하동읍성은 고하리에 있었는데 1704년 현재의 진답리로 옮겼다. 읍성이 있었는지, 혹은 백의종군로에 대하여 물어보기 위하여 읍사무소에 들렀다. 메르스 관련 비상 근무자가 있었으나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고 나왔다. 지리산 둘레길 본부에 들러 물어 봤으나 백의종군로가 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느꼈다. 산복도로가 옛길이라 짐작되어 올라섰다. 조망은 좋았다. 읍내가 내려다보이며 멀리 하동 향교까지 볼 수 있다.

 

비파 삼거리를 지나 길가 공터에는 새마을 운동표석이 세워져 있다. 새마을 운동하면 마을 안길 포장, 스레이트 지붕이기, 통일벼, 증산, 수축, 건설 이라는 구호가 생각난다. 오래된 구호인 간첩 신고처도 있다. 횡천강을 건너 산허리로 돌아갔다. 마을 안길에 근사한 기와집이 텅 비어있다. 은행나무 모퉁이를 돌아서니 큰 효자비가 있다. 효자 정씨 비각인데 상당한 규모의 가첨석이 올려있고 그 조각 기법이 화려하다. 이렇게 큰 자연석을 가공하여 가첨석을 세우려면 많은 돈이 들었을 것이다. 큰돈을 들여 자랑할 만한 효자였을까? 13시가 넘어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다. 식당이 보여 들어가 먹걸리를 사 마셨다. 시원한 막걸리 한사발이 에너지원이요 힘이다. 나 또한 막걸리 한사발이 갈록치재를 넘는 힘이 될 것이다.

 

갈록치재로 넘는 산길 초입에 왔다. 정기룡님의 우려대로 산길은 수풀이 우거져 길을 찾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어 찻길로 갈록치재를 오르기 위하여 계속 진행했다. 오르막 초입에는 표석이 있다. 덥고, 땀나고, 힘들고, 배고프고, 고난의 행군이다. 장군님도 이 고개를 힘들게 넘었을 것이다. 2년 전 지리산 둘레길 갈치재를 넘을 때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와 유사했다. 고갯마루에는 산길과 만나는 지점에 표석이 있다. 내리막을 내려오며 산딸기도 먹고 우측의 효자비도 확인하고 내려왔다. 다시 작은 고개를 넘어야 읍성이 나온다. 고갯마루에는 양무원종1등공신비가 있다. 양무원종공신은 이인좌의 난을 극복한 공신록이다. 이인좌의 난은 1728(영조4)년 정권에서 배재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단합해 무력으로 정권 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 고개만 넘으면 하동 읍성이다. 고개를 내려서니 갓길에 차를 세우고 반가이 맞이하는 정기룡이 계셨다. 이배사 골든벨 때 동분서주 행사를 주관 하시던 하동지부장님이시다. 이렇게 마중 나오셨다. 하동읍성으로 이동했다. 고현성(古縣城)이라고 하며 1417(조선 태종17)에 외성을 토성, 내성은 석성으로 축성되었으며 임진왜란 시 가토기요마사의 침략을 받았다. 1704년 하동읍이 진답리로 옮긴 후 폐성되어 방치되었다가 2004년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정문인 남문터가 있으며 복원 작업 중 연못과 해자부분을 다시 발굴 하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뿌리가 휘감고 있는 무너져 내린 고성을 바라보니 왠지 마음이 쓸쓸해진다. 황성옛터가 생각난다.

 

28(무오)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늦게 출발하여 하동현에 이르니, 하동현감(신진)이 만나 보기를 반기어 성안의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정성을 다 하였다. 그리고 원(원균)이 하는 일이 미친 짓이 많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익성도 왔다.

 

29(기미) 흐림. 몸이 너무 불편하여 길을 떠날 수 없다. 그대로 머물러 몸조리를 했다. 현감(신진)은 정겨운 말을 많이 했다. 황생원이라고 칭하는 이가 나이가 71세인데 하동에 이러러 예전에 서울에서 살다가 지금은 떠돌아다닌다고 하였다. 나는 만나지 않았다.

 

하동현에 도착한 장군은 현감 신진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현감 신진은 하동향교의 하동현감 선생안에 당시 현감 중 거의 유일하게 임기를 마치고 떠난 현감이라고 기록되어있다고 했다. 이틀을 묵으면서 몸조리를 하다가 떠났다. 하동현을 떠난 장군을 위하여 유둔 1, 장지 2, 백미 1, 참께와 들께 혹5, 3, 5, 소금 5, 특우 5마리를 다음 숙박지인 박호원의 종의 집으로 보냈다.

 

축축하게 젖은 장마철 쉼 없이 달려온 장군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버틴 장군이다. 옛 읍성에서 장군님과 신진 현감, 유숙한 별채를 가늠해보며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본다. 장근은 무었을 위하여 여기까지 왔나? 또 별채에서 머물면서 무었을 생각 했을까? 24일 일기에 그 심정이 잘 표현되어있다.

 

비가 내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다가 혼자 시골집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떠오르는 생각이 만 가지다. 슬픔과 그리움이 어떠하겠는가?

 

2015.6.21. 경남의 백의종군로2를 걷고(두치-하동읍성)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