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경남의 백의종군로3 (읍성-방화리) 이 길을 걷고 나는 무었을 얻을까?

청풍헌 2015. 7. 2. 23:33

경남의 백의종군로3(읍성-청수)

휴일 쉬어봐야 집에서 뒹굴뒹굴 시간만 보낸다. 일단 시작하면 얻는 것이 있다. 오늘의 코스는 하동읍성에서 청수역 시냇가 까지 목표다. 그러나 거리가 멀다. 24km 가량 된다는 착량님의 계산에 일단 부딪쳐 보자고 했다. 상황판단은 현장에서... 오늘도 청수역 시냇가에 차를 두고 읍성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시골이라 버스는 드물다. 수차례의 히치하이킹 끝에 트럭을 얻어 타고 북천면 소재지로 나왔다. 북천면은 코스모스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북천면에서 고전면 고하리 읍성까지는 버스연결이 없다. 히치하이킹도 방향이 맞아야 되거늘 결국 북천면 철도 건널목 감시자에게 부탁하여 개인택시를 불러 탔다. 고전면 고하리 하동읍성에 가지고 하니 잘 모른다. 수차례의 설명 끝에 목적지를 이해하고 이동했다. 택시 미터기가 작동하지 않아 요금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니 가봐야 한다며 이리저리 돌아 읍성에 도착했다. 3만원을 지불하고 내렸다.

 

읍성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입구의 옛 우물도 보고 무너져 내린 옛 성벽(城壁)도 보았다. 발굴현장도 꼼꼼히 살피며 지난번 정기룡님이 일러준 대로 북문 쪽으로 올라갔다. 외성과 내성이 구분되어 있으며 토성과 석성 이중구조의 읍성이다. 북문의 치가 무너져 내렸지만 원형이 잘 남아있다. 북문을 넘어 산길로 접어들었으나 수풀이 우거져 망설여졌다. 2품 장군님이 뭐가 아쉬워 뒷문으로 갔을까 하는 생각에 정문인 남문으로 당당히 떠났으리라는 짐작으로 남문으로 나왔다. 읍성마을인 주성마을 논에는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한다. 붉은 알을 낳고 논바닥에는 우렁이가 다닌다. 이런 곳에서 수확한 쌀은 맛이 있을 것이다.

 

밋밋한 도로를 한참이나 걸었다. 작은 재를 하나 넘으니 운암영당이라는 표석이 있다. 운암영당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마을 입구에 용천수가 샘솟는 감천(甘泉)이 있다. 맑은 물이 끝없이 솟아오르는 감로수다. 이런 샘이 있다는 것은 마을의 축복이다. 지내(池內)는 못안 마을이다. 오래전에 못이 있어 마을이 생겼을 터, 마을보다 못이 먼저 생겼다고 짐작 되었다. 운암사거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양보중학교 옆에서 전사과박공필종시혜비(前司果朴公弼鍾施惠碑)를 보았다. 사과(司果)라는 벼슬은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정6품 관직이라고 한다. 신전마을에 왔다. 신전마을은 마전역이 있던 곳이다. 마전역은 사근도 찰방이 관리하던 역으로 청수역을 갈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역이다. 삼거리 갈림길에 있는 이 집이 마전역인가? 이곳에서 우리는 좌측으로 방향을 잡았다. 즉 황포역을 가기위한 방향전환이다. 마을 안길로 접어들어 빙 둘러 갔다.

 

시간이 흘러 4시가 넘었다. 지형 지도의 명확한 개념이 부족하여 정확한 판단은 할 수 없다. 지도조사를 한 착량님의 판단과 나의 감각으로 의견충돌 하면서 꾸역꾸역 걸었다. 장군님이 타고가신 말()은 자가용일까? 영업용일까? 몇 마리나 끌고 갔을까? 말 먹이는? 장군님만 타고 갔을까? 말을 끄는 종은 한번 타지 않았을까? 만약 종이 아파 걸을 수 없었다면 말에 태웠을까? 말을 쉬게 했다, 병이 들었다, 편자를 갈았다 등이 일기 곳곳에 보인다. 짐작컨대 자가용이 아닐까? 한양에서부터 타고 왔으면 말 먹이나 관리는 어떻게 했을까? 교대로 타고 왔을까? 수레에 짐을 싣고?

 

1730분경 여의리에 도착했다. 여의리는 황포역원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표석을 찾았다. 산길로 표시되어 있는데 산길을 찾을 수 없어 옆의 식당에 들어가 물었다. 방화리를 갈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니 우리가 왔던 길을 다시 가란다. 그럴 수 없다고 하니 지름길인 산길이 있는데 추천할 만하지 않다고 했다. 날이 저물었으며 산길에는 짐승도 많다고 했다.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니 1시가 남짓 걸린다는 말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산길 표식이 없어 두어 번 물어서 겨우 진입로를 찾았다. 산으로 오를수록 안개가 심하여 앞을 볼 수 없다. 착량님께서 심하게 갈등 하신다, 눈빛에서 슬픈 사슴이 연상되었다. 다리가 아파서, 힘들어서, 배고파서, 무서워서, 슬픈 짐승이여~~~~~~ 꾸역꾸역 올랐다. 안개비가 내려 시야가 흐리다. 갈림길에서 수차례 오다가다를 반복하며 올랐다. 밧데리가 2%있을 때 북촌 개인택시 전화번호를 착량님에게 미리 전했다. 정상부근이라 짐작되는 곳에서 전화기 밧데리가 아웃되었다,

 

황토재 고개마루를 넘어서 방화리로 내려섰다. 큰 길로 내려섰지만 방향감각을 몰라 불켜진 식당에 가서 물어 보았다. 겨우 방향을 잡고 내려갔다. 우리가 지도를 사전에 검색도 하고 조사를 했어도 현지에서는 헷갈려 물어 보는데 당시에는 어떻게 길을 알고 갔을까? 길잡이가 있었을까? 옛 지도를 갖고 갔을까? 아니면 물어서 갔을까? 지금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가 400년전 장군님도 같았을 것이라 생각되어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18시를 넘기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우리가 배가 고프면 당시 장군님도 배가 고팠을 것이다. 당시에는 어떻게 했을까?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었다고 매질을 한 장군님이 길을 가면서 밥을 해 먹었을까? 쌀은? 솥단지는? 된장은? 김치는? 고추장은?(아차 당시에는 고추가 없었지!)

 

택시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착량님은 힘이 나는지 뛰기까지 한다. 나는 죽을 맛이다. 북천까지 가서 히치하이킹하기로 했다. 어느덧 시계는 저녁 8시를 지나고 있었다. 어두워졌다. 랜턴도 없다. 희미한 그림자가 보여 확인하니 문익점 비다. 사진도 후래쉬를 터트려야 했다. 착량님! 더 이상 못 걷겠습니다. 택시를 부르세요! 전화를 하니 택시는 진주에 있다고 한다. 수차례의 히치하이킹을 실패하고 터벅터벅 북천면을 들어서니 시계는 830분이다. 28km를 걸었다. 버스시간을 보니 진주에서 8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무조건 히치하이킹 했다. 밤이다. 무섭다.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다. 내라도 태워주기 망설였을 것이다. 다시 택시에 전화하니 20여분 기다리란다. 그 사이 버스가 왔다. 정수리에서 하차하여 귀가했다.


6월 

1일(경신) 비가 계속 내렸다. 일찍 출발하여 청수역 시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저물 무렵 단성땅과 진주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農奴의 집에 투숙 하려는데 주인이 반갑게 대하기는 하나 잠자는 방이 좋지 못하여 간신히 밤을 지냈다.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유둔油屯1개, 장지狀紙2권, 백미白米1섬, 참깨眞荏와 들깨水荏 혹 5말, 혹 3말, 꿀 5되, 소금 5말등을 보내고 또 특우特牛5마리를 보냈으니 모두 하동 현감이 보낸 것이다.

 

장군님의 백의종군의 심정을 온몸으로 느껴보자고 시작한 경남의 백의종군로를 세 번째 걸었다. 이 옛길이 주도로가 아니어서 길가의 표석(효자, 열녀비)이 별로 없었다. 작은 마을을 지나는 길이므로 불편했던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리라 짐작 되었다.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동 현감이 보내준 유둔(油屯), 장지(壯紙), 참깨, 들깨. 백미, 소금은 어떻게 운반 했을까? 흑우 5마리라니 소 등에 태우고 왔을까? 누가? 언제? 어떻게 당시 소를 다섯 마리나 주었을까?(이 부분은 여러 설이 있다. 미상, 미지종이, 5전등이다.)

이 길을 걷고 나는 무었을 얻을까? 초계에 당도하면 무었이 있을까?





































2015.6.27.() 경남의 백의종군로3(읍성- 방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