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경남의 백의종군로1(악양-두치) "나 16km 걸은 뇨자야!"

청풍헌 2015. 6. 23. 23:33

나에게 이순신은 무엇일까?

길을 걸으면서 삶을 찾고자 통영별로를 걸었고 이후 지역사회에 이바지 하고자 통영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걷고 기록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해파랑길 등등 내노라 하는 장거리 트레일을 조성하고 그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생겼다. 더불어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까지 고증되어 순례자가 생겼다. 이배사 통영지부 6월 모임을 하고 아쉬운 마음에 맥주 한잔 기울이며 담소 하다가 우리가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 경남에 조성된 백의종군로를 걸으며 온몸으로 장군님을 느껴보자고 의기투합 했다. 언젠가는 한양 옥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백의종군로와 수군재건로까지 그 발자취를 장군의 심정으로 느껴 볼 날이 있겠지만 우선 가장 가까운 경남의 백의종군로를 답사해 보자고 의견을 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당장 일요일에 가지고 약속했다. 급하게 정하다 보니 자료검토가 걱정 되었다. 토요걷기가 계획되어 있어 여러 검토가 필요하고 할 일이 많았다. 착량님에게 지도와 각종 자료를 챙기라고 일임했다. 토요걷기를 마치고 저녁에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아침 9시에 출발을 약속했다.

 

26(병진) 종일 큰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 길에 올라 막 떠나려는데 사량만호 변익성이 심문받은 일로 이종호에게 붙잡혀서 체찰사 앞으로 왔다. 잠깐 대면하고는 그 길로 석주관의 관문에 이르니 비가 퍼붓듯이 왔다. 말을 쉬게 했어도 길을 가기 어려워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악양의 이정란의 집에 당도 했는데 문을 닫고 거절 하는 것이었다. 그 집 뒤에 기와집이 있어서 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찾았으나 모두 만나지 못하여 잠시 쉬었다가 돌아왔다. 이정란의 집은 김덕령의 아우 덕린이 빌어 입주하고 있었다. 나는 아들 열을 시켜 억지로 청하여 들어가 잤다. 행장이 다 젖었다.

 

음력 526일이면 양력으로 711일이다.(2015년 기준) 비가 와서 미끄러지고 자빠지면서 걸어서 경남으로 들어와 이정란의 집에서 유숙했다. 지금은 6월이지만 당시의 날씨와 비슷했다. 날씨도 흐리며 비가 오락가락 했다. 당시에는 훨씬 더 더웠을 것이다. 물론 말을 타고 다녔지만 걷는 것이나 진배없다. 아들과 종을 거느리고 도원수의 진영으로 찾아가는 심정은 참담 했으리라. 어머니를 잃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죄인의 마음으로 하루빨리 이 난을 극복 하고자 다짐 했으리라 생각된다.

 

의기투합한 당포, 착량, 고상안, 이경준은 악양면 사무소로 향했다. 경남지역의 백의종군로는 경남도에서 한 사업으로 지역민과 함께 옛길을 고증하여 표석을 세우고 정비를 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2014년 이순신연구소에서 발간한 학술세미나 자료집이다. 이 자료는 귀선님과 팽현호님이 각종 자료(읍지, 지리지, 조선 총독부지도)를 참고하여 새롭게 고증했다. 출발점인 이정란의 집도 그러하다. 경남도에서는 평사리 평사역 근처로 비정하고 토지문학관 인근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문맥상 악양의 이정란 집이란 말에 주목하고 당시 악양의 중심지인 현 정동리로 비정했다. 정동리가 시작되는 악양보건지소 근처 어딘가 이정란의 집이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지형을 가늠해보면 악양들, 평사리 들은 섬진강 늪지대다. 통영에서 서울을 걸어가면서 느낀 소위 감()이 있다. 섬진강 강가로 난 옛길을 가늠하면서 이동했다. 취간정을 지나 내를 건너면 악양의 푸른 들판이 펼쳐진다. 막 모내기를 끝낸 들판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며 군량미며 생명이다. 돌고 돌아가는 세상살이 인생사요 윤회다.

 

옛 길가에는 효자 열녀비가 있다. 효자 열녀는 가문의 영광으로 자랑삼아 길가에 세운다. 옛길을 가늠할 때 각종 비석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시 이곳도 효자 열부비가 다수 있었다. 악양의 산에는 밤나무가 많다. 밤꽃 향기가 비릿한 이 계절에는 잠 못 드는 과부의 신음소리가 나고 농염한 자태의 코스모스가 바람났다. 장군님이 400여년 전 이 길을 걸어가셨단 말인가? 말을 타고 터벅터벅 걸어갔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의 풍경을 어떠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섬진강 강변로를 잘 정비하여 산책길을 만들었다. 배나무 밭으로, 황톳길로, 대나무 밭으로 강을 끼고 걷는 내내 마음이 순화되고 산들바람까지 불어와 즐거웠다.

 

매립된 강변로가 아닌 옛길로 접어들었다, 어느 바위 위에 오래된 비석이 보였다. “통상국(統相國)” 통상국이면 통제사가 아닌가? 통영은 통제사의 동네다. 통상국이면 통제사인데 세병관 안쪽 좌목에 수두룩하다. 통상국백공은식휼군민영세불망비(統相國白公殷鎴恤軍民永世不忘碑) 도광 26(道光二十六年1846)로 쓰여 있다. 통제사란 말에 고향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드는 까닭은 무었일까? 수많은 통제사가 거처 간 통영의 문화가 몸에 배어 그럴 것이다. 175대 백은진 통제사는 18452월에 도임하여 18471월까지 재임한 통제사다.

 

백은진(白殷鎭)에 대하여

1787(정조 11)~미상. 조선 후기 무신.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부사(府使) 백유온(白惟溫)의 후손으로, 고조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충장공(忠莊公) 백시구(白時耉)이고, 증조부는 참봉(參奉) 백상우(白尙友)이며, 조부는 백사의(白師誼)이다. 부친 감역관(監役官) 백동규(白東逵)와 모친 안습제(安習濟)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윤형렬(尹亨烈)의 딸이다. 1834(순조 34)에 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1837(헌종 3)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 등을 역임하였다. 1851(철종 2)에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총융사(摠戎使)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헌종 12, 11(1845 을사 / 청 도광(道光) 25) 12(갑자) 3번째기사

백은진을 삼도 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다

백은진(白殷鎭)을 삼도 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7121A

영인본48504

분류*인사(人事)

-조선왕조실록-

 

여기에 통제사비가 있는 이유는 통제영의 섬진창이 있었으며 삼도통제사의 관할구역이었다. 백성들이 세운 이 불망비를 보면 옛길임이 틀림없다. 장군님도 이곳을 걸어갔다.

 

많이 걸어야 5~6km 걷던 통영지부 이배사 식구들은 10km를 넘기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던지 완주가 목표다. 두치 까지는 걸어가야 한다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드디어 두곡 삼거리에 왔다. 백의종군로 표석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27(정사) 흐리다 갠 것이 반반이다.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렸다. 늦게 출발하여 두치의 최춘룡 집에 이르자 사량만호 이종호가 먼저 와 있었다. 변익성은 곤장 스무 대를 맞고 꼼짝도 못한다고 한다. 유기룡이 와서 만났다.

 

두치는 두치나루라는 지명이 있다. 두치나루를 현 두곡삼거리로 비정한다. 이곳 최춘룡의 지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어디인지 알 수 없다. 4명이 표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로 격려해 했다. 최근들어 가장 많이 걸었다. 16km 4시간 50분이다. 16km이면 40리다. 특히 이경준님은 배 멀미를 심하게 하는 체질(그래서 통제영을 육지인 두룡포로 옮김)로 그래도 씩씩하게 완보했다. “16km 걸은 뇨자야!” 옥문을 나서 도원수 진영을 찾아가는 길인 경남의 백의종군로를 걸었다. 가악중에(갑자기)의기 투합하여 실행했다. 옛길을 찾아서 장군을 생각하며 그 당시를 상상하며 온몸으로 느낀 감정은 특별하다.  우국충정, 평화, 적개심, 온갖 걱정이 앞을 가려 발걸음이 무거웠으리라.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의문점: 26일 일기에는 사량만호 변익성이라 했는데 27일 일기에는 사량만호 이종호라 했다.

악양면사무소에서

이정란의 집인가?

비릿한 밤꽃향기

바람난 코스모스

고인돌?




 

의문점: 26일 일기에는 사량만호 변익성이라 했는데 27일 일기에는 사량만호 이종호라 했다.


2015.6.14.일 경남 백의종군로 악양-두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