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수군재건로6(능파정-승주읍사무소) 이 더위에 뭐단다꼬 댕기 쌓소

청풍헌 2016. 7. 25. 23:25

본래 계획은 능파 정에서 학구 삼거리까지이다.

이 여름에 이 더위에 이 거리(33km)를 간다는 것은 무리다. 

그리하여 거리를 좁혀 승주읍사무소까지 목표를 삼았다. 

몸이 무거워 빨리 움직이기 싫었다. 

7시에 고상안 회장이 전화를 해 3명 출발 했다고 한다. 

승주읍사무소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8시경 나왔다. 

승주에서 픽업하여 다시 석곡  능파 정으로 왔다. 

도대체 이곳에 몇 번이나 오는지? 

벌써 여섯 번째다. 


김응함 지부장님, 정경달님, 통제사2님 까지 세분이 함께했다. 

'오늘 가는 길은 저도 처음이라 길을 함께 찾아가야 합니다.' 

또한 지도상에 접치고개가 있는데 길고 힘들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능파 정에서 하룻밤을 지낸 장군은 그날 밤 꿈에 죽은 군관이 나타나 

『물레방아 터에 있는 나룻배로 군사와 물자를 건너라』 라는 말을 듣고 일찍 서둘러 강을 건넜다. 


강변 둔치를 걸었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천에 피었으며 강가에는 새들이 많았다. 

수변공원에 코스모스 축제장이 있으며 늪지대에는 산책로를 잘 조성해 놓았다. 

보성강 강변을 따라 계속 올랐다.


주암 사거리로 가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국도로 올라섰다. 

고속도로 지하 통로를 지나 27번 국도에 진입했다. 

주암댐이 멀리서 보였다.

갈증도 나고 땀이 비 오듯 했다. 

날씨가 무덥다.


주암 사거리 가기 전에 목을 축일 겸 부광마트 평상에 앉았다.

막걸리와 맥주 한 병을 시켜 시원하게 들이켰다.

역시 지역에서 먹는 막걸리는 에너지원이다.

주인아주머니는 어디서 왔는지 뭣 하는 사람인지 꼬치꼬치 물으신다.

주암댐이나 선암사를 가보라고 추천했다. 

특히 선암사 인근 서재필 박사의 기념관을 꼭 가보라고 말했다.


젊은 아들이 나와 사진도 찍어주고 친절히 설명도 했다.

알고 보니 119 소방대원이다.

역시 직업의식이 투철한 대한민국의 소방대원이다.(승주 입구에서 다시 만남)


절민공 죽촌 조숭문 선생 신도비가 있다.

조금 더 가니 겸천서원 안내판이 있어 확인해보니 

겸천서원은 절민공(節愍公) 조숭문(趙崇文)과 그의 부친 조유(趙瑜), 

조숭문의 아들 조철산(趙哲山) 등 삼대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조숭문은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과 함께 참살 당했다. 

단종복위 사건과 관련하여 김종서, 박팽년 등의 위패를 같이 모시고 있다.


강변 둔치로 들어섰다. 

아스팔트는 딱딱하고 열기가 올라와 걷기가 힘들었다. 

둔치로 나왔는데 높은 습도로 인하여 더 후끈 거렸다.

흙바닥 이지만 풀이 자라고 거미줄이 뒤엉켜 걷기는 더 불편했다. 


창촌 부유 창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멀리 주유소가 보였다.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하여 주유소 인근에 가니 

동네 아주머니가 복숭아를 팔고 계신다.

진한 전라도 토박이 말씀으로 “긍께“를 연발 하시고 

창촌 까지 걸어간다 하니 애처로워 하신다.


그래도 우리는 간다.

꾸역꾸역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전날 걸음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에서 덥기까지 하니 힘들었다.

점점 뒤로 처지기 시작한다.


특이한 모습의 효행비가 보였다. 

큰 비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 있는 형상이다.

크게 반성하고 공경하는 모습으로 세워 놓았다.


드디어 창촌에 들어섰다. 

부유 창으로 가는 길은 안내판도 없다.

창촌 초등학교로 진입하여 마을로 가야한다.

배수로에는 우렁이 알이 붉게 꽃을 피웠다. 


창촌 부유 창은 후방 병참 창고다. 

관아와 환곡 창고인 부유 창이 있었다. 

환곡 창은 식량을 비축 했다가 춘궁기 때 빌려주는 역할을 하는 창고다.


이른 새벽어둠을 뚫고 달려 왔지만 한발 늦었다.

이미 이복남의 부대가 청야작전으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난 후였다.

퇴각 할 때는 병장기와 군량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못 하도록 소각하는 전술이다.


당시의 부유 창에는 현령비만 남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암면사무소 터였으며 수년전 마을 회관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부유 창 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과 벽화가 서 있다.

풀이 자라고 정자에는 먼지가 쌓여 쓸쓸했다.

가져간 충무김밥으로 속을 채우고 휴식을 취했다.


사포교로 접어들었다.

드디어 접치 재(구치 재) 입구다.

완만한 경사로로 이어진 긴 구간이다.

더위와 피로가 겹쳐 자꾸 처진다.

때로는 거꾸로 걷기도 하고 주먹을 꼭 쥐고 힘을 내어본다.


간간히 물로 목을 축이며 소금도 먹고 

나름대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하여 노력했다.

접치고개는 정말 힘들었다.

힘든 만큼 보람도 있었다. 


고개를 넘어와 길가에 드러누웠다.

시원했다.

하늘에 구름이, 귓가에는 새소리가,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더위에 접치 재를 걸어서 넘는 것은 무리였다.


나머지 물을 나눠 마시고 민가가 나타나면 물을 구하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한참을 내려가도 민가가 없다.

목이 말랐다.

그렇다고 논물은 먹을 수 없지 않는가?

군대 훈련병 시절 논물을 벌컥벌컥 마신적은 있었다.


그래도 구 길(舊 路)은 예스러움이 남아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와 자연정원수가 예쁜 길이다.

흑 잠자리가 무리지어 나르고 

밤나무에 달린 밤송이는 햇살을 받아 여물고 있었다.


내친김에 승주까지 내려왔다.

갈증을 참으며 오다보니 승주 이정표가 보였다.

마당 있는 민가에 들어가 물을 얻어 마셨다.

역시 물맛이 꿀이다.


승주로 진입 하는 구간에는 각종 열녀, 효행비가 있으며

독립운동가, 충신 정려비등이 수 기 있었다.

소작인들이 세운 감찰우공규환시혜비(監察禹公珪桓施惠碑)도 있었다.


드디어 승주읍내로 접어들었다.

도로가에는 각종 비석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필 힘도 없다.

그냥 빨리 읍사무소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만세를 불렀다.

지도 어플을 보니 27km를 걸었다.

1박 2일은 이번이 마지막임을 예감했다.

나도 점점 체력이 떨어지나 보다.

“이 더위에 뭐단다꼬 댕기 쌓소” 하신 아주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정유년 8월 8일 새벽에 출발하여 부유창에서 아침밥을 먹으려는데 병사 이복남이 이미 명령하여 불을 질러 놓았다. 광양현감 구덕령, 나주판관 원종의, 옥구현감등이 창고 바닥에 숨어 있다가 내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급히 달려가 배경남과 함께 구치(주암 행정리 접치)에 이르렀다. 내가 말에서 내려 명령을 내렸더니 한꺼번에 와서 인사했다. 내가 피해 다니는것을 들추어 꾸짖었더니 모두 그 죄를 병사 이복남에게 돌렸다. 곧장 길을 떠나 순천에 이르니, 성 안밖에는 인적도 없이 적막했다. 오직 승려 혜희가 와서 알현하므로 의병장의 직첩을 주고 총통등은 옮겨 묻게했다. 장전과 편전은 군관들에게 나누어 소지하게 하고 그 관부에서 잤다.


  

2016.7.17.() 승주읍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