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생활 속에서

송진포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을 찾아서

청풍헌 2011. 9. 20. 22:59

가슴이 두근 거렸다.

천막을 걷어내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이 차가운 기운은 무엇일까?

 

 

거제시청 사회복지과 문서고 에서의 만남.

대리석은 약간 검은 빛을 띄면서 푸른감도 돌며 글씨체는 전혀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처음 접하는...

상단 삼분지 일 지점이 깨어져 있었다.

이것이 무었인가?

지금부터 추적을 해보자.

가조도의 취도기념탑을 보고 송진포가 궁금 하였다.

일본 해군기지 라는데 이곳에서 군함이 나와서 함포사격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송진포에는 어떤일이 일어 났는가? 

1903년 9월 30일자 군령해(軍令海) 제1호 "방비대 조례"에 의해서 '진해만 송진포방비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1904년 8월에는 진해만을 해군가근거지(海軍假根據地)로 하기 위해서 제3 임시축성단이 파견되었다.

마쓰이(松井庫之助)공병중좌 지휘하의 동 축성단은 8월 중순 가덕도와 저도에 상륙 1905년 1월까지 포대공사를 완료했다. 축성단은 거제 송진포와 진해만을 연결하는 해군가근거지를 설치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송진포 마을에 해군기지화, 주민들 강제이주 당해

1904년 8월 11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 430번지∼553번지 일대(송진포 국민학교)는 일본해군용지로 편입되었고, 송진포 주민들은 신촌, 궁농(森村) 마을로 강제이주 당했다. 일본해군비밀문서에는 "송진포 지역은 해군기지 설치에 따라 대한제국의 협조를 얻어 설치할 수 있었다. 이는 외부대신 조병직에게 이미 허락을 받았다. 이에 송진포 지역의 인민들은 당연히 철수해야 하며 보상에 대하여 대한제국에 있다" 고 적고 있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빌미로 강제로 토지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할 수 있게 허락한 것이다.

당시 해군기지 내에는 우편취급소, 해군용 통신소, 진해만방비대 사령부, 해군병사(海軍兵舍), 병원, 은치공장(銀治工場), 화약고, 수답창고 등을 설치하였다. 또 마산헌병대 송진포파견소, 마산주재 영사관 순사 2명을 파견하기도 하였고, 일본인 수산감독소, 송진소학교(일인 학교) 등을 설치함으로써 일본인 이주어촌보다 거대한 군사기지로 바뀌었다.-전갑생-

당시 송진포는 수심이 깊고(8m) 배산 임수의 지형으로

뒷산에서 대마도와의 관측이 용이한 천연의 요새였다고 한다.

배우근(74)할아버지.

국민학교 1학년때를 생생히 기억 하신다.(1943년도)

당시 일본인만 다니는 심상 소학교가 있었으며 저 건너 송림 너머에는 우체국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와 우측 골짜기에는  군함에 급수하는 큰 물탱크가 있었다고 한다. 

 

산 쪽에는 넓은 연병장에 양쪽으로 탑이 있었고 그 위에는 '게릴라' 라는 구조물(포탄처럼 생긴 둥근)이 있었고

위로 산쪽으로 3~4m 되는 돌 계단이 약 100여개 있었고 그 마지막에는 어마어마하게 큰(2~30m)탑이 있었다고 증언 하신다.

이것이 송진포 러일전쟁 전승 기념탑의 실제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재 넘어 장목 국민학교에서 걸어와서 기념식에 참석하여 "담뱃부 사이다" <민들레가 피었다>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하신다.해방후 이 탑을 동네에서 넘어뜨리기 위하여 주변을 파서 넘겨도 너무나 단단하여

꼼짝도 안해서 미군(해군) 공병대가 다이너 마이트를 장착하여 꾹 눌러 폭파 했는데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꽝" 했으나

끄떡도 않아서 다시 구멍을 파고 다이너 마이트를 더 설치하여 폭파하니 "꿍" 하고 뒤로 넘어가 비석 잔재는 물에 버렸다고 한다.

올라가는 계단도 각자 집의 축담 샇는데 쓸려고 지게를 지고 갔다고 한다.

 

계단을 찾으러 나서시는 할아버지

하지만 새로 집을 지어 계단을 찾을 수 가 없다.

할아버지가 일러준대로 송진포 초등학교터를 찾아간다.

송진포 초등학교(폐교) 정문에서 바라본 신작로 뭔가 집히는게 있기도 하다...

흙벽이 아름다운 옛집을 지나 위로 오른다.

유자밭에 나타난 시멘트 구조물 직감적으로 이것이다 생각되었다.

검색으로 찾은 구조물과 똑 같다.

가로 세로 1m 40cm 높이는 1m 90cm 이고 상단과 측면이 파손되어 있었다.

파손된 부위를 잘 살피니 당시의 자갈(작은 몽돌)을 사용하여 만든 구조물로 확인되었다.  

탑의 윗부분에는 사진처럼 볼트가  박혀 있었다.

저 볼트가 상부에 올려진 구조물을 고정하는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 된다.

이리 저리 더 둘러보고 상상해보고 하다 내려온다.

혹시나 하고  돌담이 아름다운 시골집을 들어갔다.

김금선(88)할머니가 마늘밭을 파고 계신다.

할머니를 도와 드렸더니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할머니의 과거와 당시의 기억을...

유자밭에 있는 탑은 아래의 것이고 위로 한참 올라가면 카이당(계단)이 있고 그곳에 큰 탑의 터가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칠천도에서 송진포로 왔다고 한다. 

 

<송진포 방비대는 1912년 진해만요항부사령부로 이전하고 그 일대는 도고의 전쟁기념 공원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헌병대 송진포분견대나 일인 소학교를 남겨 두고 일본신사터(현 송진포국민학교 뒷편)에

도고의 전쟁기념비와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5월 초부터 부산죽본조(釜山竹本組) 공장에서 기념비를 제작하여 진해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죽본조에서는 석공 10명이 진해로 출장하여 진해산 석재로 기념비를 제작하고 5월 23일

진해에서 출발하여 송진포로 선박을 이용하여 기념비를 운반하였다.

1931년 1월 22일 통영군청루상회의실(統營廳樓上會議室)에서 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일제는 "송진포 일본해전연합함대 근거지 기념비건설회(松眞浦日本海戰聯合艦隊根據地記念碑建設會)"를 조직하고 진해만 요항부 사령관, 통영군수, 거제경찰서장 다나까(山下), 가네마루(金丸) 도의원, 각급 학교장, 사등면장 조기륜(曺氣輪) 등이 참여하였다. 이날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지역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는 조직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날 준비위원회는 회장 통영군수, 부회장 가네마루(金丸原一, 일인, 도평회의원), 송병문(宋秉文, 경남도평회의원), 상임위원 김종원(金宗元), 김기정(金基正)외 4명 일본인(이하 통영), 지익강 이운면장(이운면민들이 친일면장이라고 지목하여 배척운동을 벌여 쫓겨남), 조기륜 장목면장외 4명 일본인(이하 거제) 등이 선임되었다.> ~전갑생~

수풀을 헤치고 한참을 오르니 숲속에서 나타난 구조물 하나.

기단 가장자리는 해자처럼 도랑이 파져있고 양쪽 모서리에 대리석이 보인다.

수풀을 헤치기 전에는 이것이 무었인지 알수가 없다.

대리석 기단이 뚜렸하게 보이고

정교하게 조각된 모서리 부분.

이끼하나 끼지 않은 흰색의 대리석 조각,이상하다

80년의 세월동안 이렇게 깨끗 할 수가?

탑의 뒤쪽으로보니 시멘트 덩어리가 있다.

한덩어리

두덩어리

세 덩어리

전체적인 윤곽으로 틀림없는 전승 기념탑으로 추정 되는데 그 사진을 본적이 없어

약간의 의문의 품으며 내려와서 다시 할머니에게 갔다.

송진포 국민학교에서 일직선으로난 신작로가 바로 그 탑으로 올라가는 직선 신작로였다.

지금은 평화로운 송진포 항구

당시에는 일본 군함이 수시로 들락거린 해군 기지였다고 한다.

일본 해군 군인이 약 3,000여명 일본인이 500여명 도합 3,500여명이 이 송진포에서 살았다고 한다.

 

ⓒ2003 전갑생
특히 지역내 일본인과 조선인 유력자들이 성금을 내었는데, 성금자는 진정률(陳正律, 장승포읍회 의원) 150원, 서태문 2천원, 김영수(金榮洙, 경남도회 의원) 10원, 김혁구(金赫救) 10원, 정대고(鄭大高, 장목면) 30원, 김경(金敬) 50원, 유주실(兪周實) 20원 등이었다. 지역 유지들의 성금으로 조성한 기념공원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해군기념일마다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러일전쟁 기념행사를 연례적으로 개최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신문기사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1931년 5월 27일 기념비 제막식과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축하행사를 펼쳤다. 또한 1935년 5월 28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제30회 전승기념제를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진해에 소림(小林)요항사령관을 비롯하여 각소헌병분대, 보통학교장, 소학교장, 소학교 생도, 지방유지 등 수백명이 참석하여 도고헤이지로 원사의 제문낭독, 소림사령관의 인사말 등을 하였고, 제국해군 만세삼창을 부르고 오후 2시쯤 마쳤다(<부산일보> 1935. 6. 1)

국궁터에서 인증샷도 찍고.

장목 지서를 찾았다.

검색에서 기념탑의 비석을 장목지서 오르내리는 발판으로 삼았다 하고

또는 그 앞의 고랑을 건너는 돌다리로 삼았다고 하나 지금은 어디인지 알수가 없다.

장목 지서 앞에서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다시 찾은 할머니댁.

할머니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오늘은 마음먹고 낫을 빌려 나무와 덩굴을 잘라 확실히 보련다.

낫으로 풀숲을 헤치자 나타나는 탑의 대리석 기단 구조물

자세히 살펴보니 다이나마이트를 장착했던 구멍이 두개나 보인다.

배우근 할아버지의 증언이 그대로 나타났다.

확실한 증거.

현재 남은 기념탑의 전체모습이다.

탑의 기단은 3m 20cm 이고 높이는 8m 이며 그 탑의 전면부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세워

도고 헤이하치로의 러일전쟁 출정문을 적어 놓았다.

그 비석이 장목지서앞 계단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도 동아대학교 김동호 교수가 발견하고 거제 경찰서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시청 수장고에 있다고 한다.

거제 시청에 형님편으로 부탁을 했는데 마침 연락이 와서 시청으로 이동한다.

담당자는 매우 조심스럽게 귀중한 자료이고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혹시 일본인을 대동하고 오는지 물어본다.  

드디어 시청 수장고에서 만난 도고헤이하치로의 송진포 러일전쟁전승기념비

오늘 더운 날씨에도 고맙게 동행해 주신 빨강머리앤님. 

비석 전문은 아래와 같다.

接敵艦見之警報聯合
艦隊欲直出動擊滅之
本日天氣晴朗波高
            平八郞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린다.
즉시 출동하여 적을 격멸하고자 한다.
오늘 날씨는 맑으나 파도는 높다.

 

역사는 흐른다.

같은 2차대전 당사국인 독일은 유태인의 학살을 진심으로 사죄하고 참회하여 유럽에서 존경받는 나라로 우뚝 섰다.

이웃 일본은 어떠한가?

아직까지 제국주의의 잔상에서 헤메는 정치인들이 판을 치고 

심심하면 독도야 교과서야 요꼬 이야기 등을 하여 속을 뒤집어 놓는다.

일제 잔재의 유물 들을 없애버린다고 치욕의 역사가 지워질까?
일제 잔재의 청산과 일제 침략의 망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말 청산해야 할 것들은 다른 정신적인 것들이다.

치욕의 역사를 잊으면 그 역사가 되풀이 된다는 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거제에 있는 일제의 잔재의 흔적

송진포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을 찾아 보았다.


거제근현대문헌총서 2 p419 

2011.9.15 송진포에서 百世淸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