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행사, 축제

21세기 아시아에서 윤이상의 음악적 유산을 재조명하다

청풍헌 2017. 4. 8. 00:14

21세기 아시아에서 윤이상의 음악적 유산을 재조명하다. 올해가 윤이상 100주년이다. 우리 동네 작곡가를 확실히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윤이상 평전을 읽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제 음악제가 개막 되었지만 여러 가지 신경쓰야할 일 때문에 소홀 했었다. 일요일 세미나를 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확인 후 윤이상 기념관 메모리 홀에 갔다. 통영의 작곡가를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음악적 유산을 조명하는 세미나다. 매우 관심 있어 기대 되었다


이희경(연세대 객원교수)의 사회로 발표가 시작 되었다. 첫 번째 발제자는 최애경(충남대 강사)"미래를 향한 기억: 윤이상 음악에서 한국 문화의 위치와 의미" 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1959년부터 1996년까지 118곡을 발표한 윤이상의 음악적 정체성은 한마디로 "미래를 향한 기억" 으로 대변된다. 1956년 한국을 떠나 유학 시절을 거쳐 70년대 망명 예술가로 정착하게 된 유럽의 지리적. 역사적 공간과 유럽 현대음악 문화의 흐름 속에서 작곡 되었다. 한국과 독일, 동아시아와 서유럽은 윤이상의 삶과 예술에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그러나 강제로 추방당한 한국의 사회 문화 및 전통에 대한 기억은 개인 및 예술가로서의 윤이상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핵심이라 하겠다. -최애경- 윤이상 음악의 기조에 흐르는 바탕은 통영의 음악적 토양에 있다. 음양오행과 도가사상은 한국적 음악의 특징이다. 통제영에서 유래한 취고수청과 신청에서의 무가와 민간에서 유래한 각종 굿판과 용왕제 등은 음악의 토양이 되었다. 제목에 유난히 메모리가 많은 것은 고향을 떠나온 자의 미래를 향한 기억이다. 동백림 사건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한 작곡가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여 저항과 전통이 어우러진 작품을 작곡 하였다.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연대와 기억은 '나비의 미망인' '' '영상' '등이 있다. 발표자는 윤이상의 음악적 가치는 "미래를 향한 기억"으로 대변 된다


두 번째 발제자는 젊은 학자라고 소개했다. 장현경(이화 음악연구소 연구교수)"한국의 윤이상 연주, 제한과 수용의 역사를 찾아서" 이다. 새로운 시도의 연구 성과였다. 윤이상의 음악이 국내에 어느 정도 연주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살펴보는 연구였다. 연주의 역사는 유럽에서는 세계초연이 많았었다. 동백림 사건을 계기로 금기시 되어 블랙리스트 화 되었다. 각 연도별로 정부별로 연주와 금지가 반복되었다. 1967년 동백림사건을 계기로 금기 대상이 되었다. 특히 1974년 이후에는 간헐적으로 연주되던 윤이상 음악이 공식적으로 제한되었고 1993년 까지 지속 되었다. 통영국제음악제를 계기로 어느 정도는 활성화 되었으나 여전히 배타적인 정치적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장현경-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연주의 밀접한 관계를 조명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국내 연주 현황과 시대적 사건을 조명하여 윤이상의 음악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조명했다. 시대의 변화에 의하여 많은 부침이 있었으며 예술과 정치가 함께 움직인 것이다. 주의와 사상은 가을의 낙엽과 같으며 민족은 영원하다 는 사상의 윤이상은 앞으로 크게 조명될 것이다


세 번째 발제자는 이 경분(서울대 HK연구소 교수)"윤이상과 일본" 에 대한 연구였다. 윤이상은 일제 강점기에 두 번이나 일본에 가서 음악 공부를 했다. 해방 후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서 공부한 윤이상의 음악은 대부분 유럽에서 발표되고 연주 되었다. 전성기의 동백림 사건으로 국내보다 일본은 여행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일본인 제자를 두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제자가 호소가와 도시오다. 발제자의 인터뷰 결과 도시오는 1974년 일본 연주회에서 윤이상을 처음 접하고 유럽으로 가 제자가 되었다. 초기 기악곡을 무척 좋아 했지만 후기 정치적인 작품에 대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윤이상은 일어에 능통하여 일본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으며 주로 제자들과는 음악적인 이야기만 나누었다. 동양의 미학을 서양에 접목한 동아시아의 대표 작곡가로 우뚝 섰다. 일본에서의 윤이상 음악의 수용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인을 제자로 가질 수 없었던 윤이상은 12명의 일본인 제자를 가르쳤다. 또한 교향곡 4번이나 작품<에필로그><화염속의 천사>와 같은 중요한 작품 초연도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윤이상의 음악이 일본 현대음악에 미친 영향과 수용 등 관계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 경분- 일본에서 제대로 수용을 못했지만 윤이상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우뚝 섰다


네 번째 발제자는 윤신향(베를린 흄볼트대학교 강사)"윤이상과 한인 이주음악 '세대'의 문제"로 발제 했다. 세대란 낳음, 창조라 한다. 한국인의 이주 작곡가들의 세대구성과 장르구성에 대하여 백남준과의 만남에서 찾아보았다. 윤이상은 기억의 원천은 사람의 목소리다. 이를 기악화 한 것이다. 윤이상의 음악이 이주 한국인에 미친 영향은 생성이라는 개념을 넘어 세대를 의미한다. 박영희와 진은숙으로 이어진 한국현대음악의 계보는 윤이상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독일사회에서 이주민 신분으로 활동한 윤이상의 음악과 그의 사회적 존재방식은 그 이후 서구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의 이주 작가가 세대, 또는 앙상블과 어떤 세대 관계를 지니는가? 하는 질문이다. 윤이상과 그 다음 세대라는 박영희에게 이중 문화적 장르의 생성 경위와 그 다음세대에 어떻게 분화되었는지 알아본다.결국 윤이상은 이주 한인 음악인들에게 수평적인 세대연결이 되었다


발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왔다. 통영시민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다. 첫 번째로 동, 서양의 두 음이 다르다. 이를 윤이상이 표현했다. 그에 대한 소견을 묻는 질문이다. 동양의 음은 하나로 의미를 기지지만 서양의 음은 합쳐서 어우러지는 음이다. 그것은 환경적이다. 발표자들이 좋아하는 윤이상의 작품은 블릇 4중주, 예악, 에필로그 등이다. 윤이상 음악의 기조에는 통영의 토속이 포함되어 있다. 짓거리를 아느냐? 등등이 있었다. 북한의 윤이상 연구소와 교류가 있는지 물어보니 현재시국으로 전혀 교류가 없다. 결론적으로 윤이상의 음악적 가치가 영속될 것인가의 물음은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로 자주 연주가 되도록 해야 하며 고유한 특성과 진지한 창작자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아시아적 작곡가로 세계적인 작곡가로 미래의 가치가 있다. 서양에는 없는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창조하여 인정받는 작곡가로 영원할 것이다


세미나의 프롤로그를 싣는다.[ 한국 현대음악의 역사에서 윤이상의 위상은 단지 그가 세계적인 작곡가라는데 에만 있지 않다. 그는 제자들을 통해 한국 현대음악의 초석을 닦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의 음악은 많은 한국 작곡가들에게 세계 음악계에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민하게 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럼에도 윤이상은 한국 사회에서 온전하게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통영국제음악제는 국내 학자들을 모아 21세기 아시아에서 윤이상의 음악적 유산을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오랫동안 윤이상을 연구해 온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소장 음악학자 까지 가세하여 윤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본다. ] 



2017. 4. 2 윤이상 기념관 메모리얼 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