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비록 12척의 배만 남았지만 죽기로 싸운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벽파진,우수영,회령진)

청풍헌 2017. 5. 19. 23:46

회령진에서 출발한 조선 수군은 창사로 진을 옮겼다

다시 어란 앞바다로 나간 충무공은 적선 8척을 격퇴하고 장도를 거쳐 정유년(1597) 829일 벽파진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벽파정은 최근 복원을 했다. 벽파 정으로 오르는 길을 바위를 깎아 계단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충무공벽파진전적비는 19561129일 진도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명량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고 

해전에서 순절한 진도출신 참전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특히 귀부는 거대했다. 현장의 큰 바위를 정교하게 조각하여 바닥에는 항상 물이 고이도록 하여 물위에 떠 있는 비를 세웠다

귀부(받침돌)는 높이(h) 1.2m (w) 4.7m 길이(l) 5.7m이다

또한 비신은 h 3.8m w 1.2m이며 이수(머릿돌)h 1.2m w 1.2m l 2.1m 이다


915일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겨 다음날 명량대첩을 승리로 장식했다

전라우수영 터의 이충무공명량대첩비는 여수 고소대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운명을 같이 했다

즉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하여 강제 철거되어 서울로 옮겨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근처의 땅속에서 찾아내어 제자리로 옮겼다


작년 명량대첩 축제 때 대첩비는 보았는데 방죽 샘을 보지 못하여 궁금했다

동네 이발소가 있어 들어가 방죽 샘은 물어보니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도 있고 지역에 도움도 주고자 이발을 할 것이라 말씀드리고 방죽샘을 확인했다

방죽샘은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좋은 새미였다

어느 곳 없이 새미는 생명수이므로 철저한 관리와 청결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부하여 우물을 중수 하고 고마움을 비석에 새겨 세워 놓았다

이곳도 역시 여러 기의 비석이 있고 보수했을 때 나온 석재들도 있다


다시 이발소에 와 이발을 했다

안 씨 어르신이 이발을 시작 했던 동기와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를 리얼하게 들려 주셨다

1944년생이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도 이야기해 주셨다

마을의 유적이 파괴되고 없어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수 년 전 마을의 옥(감옥)터도 헐리어 사라졌다고 했다

다른우물도 물어보니 사또만 마셨다는 구수 샘이 있다고 했다

이발을 마치고 구수 샘을 찾았으나 날이 저물어 마을 사람들도 보이지 않아 찾지 못하고 대신 바닷가 선창 입구에서 옛 우물을 찾았다

석재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대형 우물이다

위에는 시멘트로 발랐지만 안쪽은 옛날 돌로 쌓았다.

 

날이 어두워 해남으로 나왔다

홍어 생각이 간절하여 식당 주인에게 부탁하여 맛볼 수 있었다

홍어의 특유한 아린맛과 꼬리 한 맛이 어우러져 개미가 있었다

마지막 목적지는 회령진이다

녹우당과 다산초당을 거쳐 청자박물관까지 보고 회령 진으로 향했다


회령 진은 충무공이 전선을 정비하고 출항했던 곳이다

군영구미에서 출발한 장군은 이곳에 여장을 풀고 교서에 숙배 하도록 했다

지휘권을 확보하고 군기를 세우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

이 때 배설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 이방과 영리를 잡아 곤장을 쳤다

수군재건을 위해 확보한 군량과 무기를 싣고 바다로 나갔다


회령진성을 일부 복원해 놓았다

성벽에서 내려다 본 포구는 아늑해 보였다

성벽은 약 사분의 일 정도 복원 되었으며 많은 예산을 들여 공원화 했다

공원에는 풀이 나 관리의 실태를 알 수 있었다

성안에는 큰 노거수가 한 그루 있으며 집이 들어서 어디가 성 이고 성벽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의 지형으로는 알 수 없지만 당시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간척지가 바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곳에서 우국충정을 생각하며 적들을 물리칠 계책을 짰다

수일 후 명량대첩이 일어났다


수군재건로의 육로구간 종점이다

칠천 랑의 참패로 다시 통제사에 수임되어 수군을 재건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달려온 마지막이 회령진이다

이곳에서 출정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비록 오늘은 차를 타고 왔지만 먼 바다를 내려다 보며 당시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12척의 배만 남았지만 죽기로 싸운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20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