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과 충무공 이순신

청풍헌 2017. 6. 15. 21:44

2017 충무공 학술 세미나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과 충무공 이순신

일시: 2017. 6. 2() 13:30~ 17:30

장소: 해군사관학교 웅포강당

주최: 해군사관학교, 국립 진주 박물관

주관: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지 7주갑 되는 2017년에 정유재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특히 칠천량 해전을 집중 조명하면서 원균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진다 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 토론자로 참석하는 김 일룡 원장님이 20여 년 전 칠천량 해전과 원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시어 학계에서 인정을 받으시고 토론자로 참석하게 되어 꼭 참가하고 싶었다. 보행환경 실태조사와 함께 세미나 참석까지 결심하고 연차 두 개를 사용했다. 통영문화원에서는 톡톡 이순신 사업을 획득하여 겸사겸사 행사를 하게 되었다. 이배사의 격군님이 주관을 하여 카페에도 공지가 되어 전국 경향 각지에서 많은 회원들이 참여 신청을 했다. 버스로 이동하여 박물관을 견학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세미나에 임했다. 멋진 해군사관 생도들이 입장하고 교장의 축사와 국립진주박물관장의 축사가 있은 후 기조강연을 tv에서 인기리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의 명사인 신 병주 건국대 교수가 했다. 제목은 난중일기 속 인간 이순신, 장군 이순신이다. 인간 이순신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들에 대한 애틋함,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 등이 일기에 담겨있다. 어머니의 생신과 소식을 듣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 불효를 표현 했으며 413일 백의종군 중에 들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하늘의 해 조차 캄캄하고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어찌 이루 다 적으랴, 천지 난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까" 하고 통곡했다. 또한 1014일에는 막내아들 면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느냐" 하며 간담이 타고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아내에 대한 언급은 단 6번 언급 되었는데 병을 걱정하는 모습은 최대한 절제된 모습이었다. 그 외 전쟁에서 백성들을 보살피는 여러 구절도 보이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사리 분별이 명확한 인물이었다. 원균에 대한 증오와 유성룡에 대한 신의도 살펴볼 수 있다. 일기 곳곳에 원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으며 정유재란 후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원균에 대해서는 절제된 표현이 보였다. 그에 반해 유성룡은 자신을 천거 했으며 깊은 우정과 신뢰를 보였다. 난중일기는 전시에 기록한 소중한 유산이다. 그 가치가 입증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제 되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덧붙여 고려 말 성삼문의 평가로 신숙주가 절하 되었으며 이순신의 평가로 원균이 더욱 평가절하 되었다고 언급했다. 해군사관 생도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휴식시간을 가졌다. 휴식시간에 이배사 동료들과 반갑게 재회하고 인사했다. 해사 생도들 중에 예쁜 여학생들이 많아 여 생도들의 선발기준에 대하여 물어보니 10%내에서 따로 선발 한단다. 만약 자유경쟁을 한다면 여 생도들이 더 많을 것이다. 전투병과와 함정생활 특성상 여 생도는 따로 지원자를 받아 선발한다고 했다. 그래서 경쟁률이 다르다고 했다.

 

칠천량 해전 관련 주요 사적 다시보기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

패전 빌미가 된 통제사 교체와 본 해전 이전의 주요경과를 살펴보고 칠천량 해전 관련 주요 경과와 쟁점사항을 언급했다. 발표문의 내용을 자료집에 근거하여 살펴본다.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해전시작 초기부터 있었다. 다만 조정에서 거론된 것은 159411월이다. 이후 원균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교체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원균으로 통제사가 교체되기까지 6차례의 논의 끝에 교체되었는데 이는 전시에 장수를 교체하는 무리수가 칠천량 패전의 한 원인이 된 것이다. 통제사가 된 원균은 정유년 39일 기문포에서 소규모 전투를 하여 승리하고 전과를 보고한다. 하지만 이는 나무를 하는 일본군을 유인하여 기습한 전과이다. 정유재란의 전투를 어느 시점에서 볼 것인가는 기문포 해전보다 안골포와 가덕도 해전이 시작점이라 보아야할 것이다. 조정에서 효율적인 수군 운용에 대하여 세력을 절반씩 나누어 교대로 부산을 진격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장문포에서 안골포로 다시 가덕도에서 접전 하는 도중 평산포만호는 부상을, 보성군수 안홍국은 철환을 맞고 전사 하였다. 한산도로 귀가 했다 다시 절영도로 출진 하였다. 칠천도와 옥포 다대포 등지에서 8척을 불태우고 절영도 외양으로 나아가다 일본군선 1,000여척을 만나 공격 하였으나 싸움을 회피하고 바람이 불어 7척이 표류하여 몰살 하였다. 한산도로 복귀한 원균은 권율의 출전 재촉에 의하여 곤양으로 불려가 곤장을 맞고(부하가 대신 맞았다고 생각 됨) 모든 세력을 동원하여 부산으로 진격 하였다. 그 날자는 714일이다. 부산 외양까지 무리하게 추격 하다가 지쳐 가덕도로 돌아와 물을 긷다가 기습을 당하여 400여명이 전사를 하였다. 영등포로 후퇴하여 밤을 새우고 휴식을 하다 칠천도로 후퇴 하였다. 716일 새벽닭이 울 때 기습공격이 시작 되었다. 등선 육박전으로 속절없이 당한 조선수군은 궤멸 되었다. 12척의 배를 이끌고 후퇴한 배설만 퇴각에 성공하고 원균은 춘원포에서 전사했다. 이로서 조선수군은 궤멸되고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에 수임하였다. 실패한 전쟁인 칠천량 해전은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함이다. 조정의 오판과 수군 모집의 어려움, 훈련의 부족과 지휘관의 교체로 인한 부대 장악 미흡 등등 복합적인 원인에 의하여 전멸 당했다. 성공에서 교훈도 얻지만 실패에서 얻는 교훈은 더욱 절실하다.

 

통제사 원균의 공과 재평가

김경록(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원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의 흐름과 전황 상 불가항력이었다는 주장을 검토하기 위하여 당시의 수군의 편제와 시대변화를 확인하고 원균의 지휘관으로서의 전쟁수행 과정과 비판론과 옹호론을 함께 재평가함으로 임란 해전 사 및 수군관련 연구에 기여하고자 목적이 있다. 당시 주진, 거진, 제진을 두고 수사, 첨사, 만호를 두고 있었다. 주력함선으로 맹선, 판옥선, 거북선, 추 왜별선, 해골선, 방패선, 병선, 사후선, 포작선 등이 있다. 원균은 무장집안 출신으로 1567년 식년무과 을과에 급제하여 조산보 만호를 거처 15921월 경 경상우수사에 부임 하였다. 동년 4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순신과의 갈등으로 통제사에 수임된 후 수군단독의 해상작전을 요구하는 조정에 반하여 수륙연합작전을 요구 하였다. 전쟁초기 경상우수영의 포기현상은 청야작전에 기인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순신과 비교되는 지휘권 확보는 여러 역량 면에서 차이가 난다. 독단적이고 성격이 강한 지휘통솔은 휘하 장수와 병력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순신에 이어 통제사가 된 원균은 막하 장수들을 명확하게 통솔하지 못하여 지휘권이 흔들리게 되었다. 전임 통제사와 손발을 맞춘 휘하 부대원들을 화합하고 융합 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임진왜란 당시의 각 수군진의 병력과 전선, 화포등은 어느 정도인가? 임진왜란 해전 및 수군 관련 연구는 이순신이 지휘한 전라좌수영의 사례로 전체 조선 수군을 추정하지 않는지와 조명 연합군의 참전으로 인한 성격 규명과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수군의 재건 과정과 호남

김만호 전남대 사학과 강사

칠천량 해전 전의 조선수군은 전선 약 180척이었으나 대패로 인하여 12척만 남았다. 다시 재 수임된 이순신은 159783일 진주에서 교지를 받고 전라도를 순행하면서 병사와 군량을 확보하고 819일 회령포에서 배설에게 12척을 인계 받는다. 조선수군의 현실은 참혹 했다. 12척의 전선과 형편없이 떨어진 사기와 전라순찰사의 부재였다. 또한 전라우수영의 물길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삼중고에 부딪쳤다. 13척으로 133척을 물리친 기적 같은 명량해전이 있은 후 후퇴하여 고군산열도까지 갔다 고하도로 옮겨 겨울을 나면서 전선을 건조 하였다. 고하도시기에 전선, 병력, 병량미, 무기 순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전선을 건조하기 위하여 소나무가 필요한데 호남의 소나무 생산지(의송지, 봉산, 황장봉산)를 일목요연하게 표현했다. 대동여지도의 봉산을 추적했으며 진도에는 11곳의 봉산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여 고하도 시절 40척을 건조했다. 병력충원은 수군의 근무 환경 상 많은 애로가 있었다. 40척의 배를 새로 만들어 근무할 격군을 모집하는데 포작인 들을 구하기도 했다. 고하도 인근 여러 군현들을 돌면서 수군을 모집 했을 것이다. 남구만의 이순신고하고유허비문중에 전쟁이 한창 벌어질 때는 군량 공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형편을 살펴보고 나주 고하도를 얻었다라고 기록했다. 소금 생산과 이를 통한 무곡(貿穀)으로 병량미를 확보 했으며 해로통행첩을 발급하여 식량을 확보했다. 또한 사부들이 쏠 궁시(弓矢)등의 무기는 전죽의 생산지를 분석했다. 고금도 시기의 전선, 병력, 병량미, 무기 확보도 같은 방법으로 조명했다. 고하도 시절의 전선 건조와 병력, 병량미, 무기 확보의 근거를 제시한 본 논고는 가장 가치 있어 보였다. 젊은 학자의 논고가 전남지역에서 신선한 이순신 학문을 일으키기를 기대해본다.

 

명량해전의 승리요인과 이순신 리더십(판옥선의 전투력, 병법, 리더십을 중심으로)

임원빈(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소장)

판옥선의 질적 전투력 우위와 일부당경 족구천부의 병법, 필사즉생의 리더십으로 강의를 했다. 임원빈 소장님의 강의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생략한다.

 

인터미션 후 많은 질의가 있었다. 특히 생도들의 날카로운 질의가 있었으며 원균의 재조명에 대해서도 기존 학설대로 신랄한 비판과 질의가 있었다.

 

저녁식사를 한 후 시간이 남아 진해를 둘러보았다. 남원, 북원, 중앙 로터리를 중심으로 진해 우체국, 흑백다방, 등을 둘러보고 통영에도 많은 근대유산이 있는데 활용을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일간 진해를 다시 방문하여 차근차근 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