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97회 일요걷기(문화예술인 유택 탐방)

청풍헌 2017. 12. 17. 20:07

제97회 일요걷기(문화예술인 유택탐방)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삼봉산 호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통영의 문화예술인은 그 이름을 남겼다. 예향 통영에서 그들의 활동을 기리고 그들의 유택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유택탐방을 기획하였다.


해방직후 통영출신의 예술인 및 예술지망생들이 고향에 모여 통영문화협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시인 청마 류치환씨가 회장직을 맡았었다. 지금은 서독에 국적까지 옮겨버린 작곡가 윤이상, 시인 초정 김상옥, 작고한 극작가 박재성, 또 한 사람의 작곡가 정윤주, 그리고 화가 전혁림씨가 주요 멤버였다. 내가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그랬는지 총무를 맡아 행사와 준비와 뒤치다꺼리 같은 것을 책임지곤 했다. 〈민족 문화의 밤〉이란 거창한 제목을 내걸고 거의 매주일 무슨 행사든 행사를 벌이곤 했다. 김춘수, -전혁림 화백의 편모 중-


고향에 묻힌 문화예술인은 전혁림, 박경리, 정윤주, 김용익이며 청마는 둔덕에, 초정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386에‬, 대여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 산17에 묻혔다‬. 정윤주의 유택은 아드님에게 연락하여 지난여름에 만나 함께 했으며 초정과 대여 선생님은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에서 묘소에 참배했다. 마지막 독일에 묻힌 윤이상 선생만 국내로 이장하면 대부분 뵐 수 있다. 이 정부에서 그 뜻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전혁림 미술관에 모여 그의 작품세계를 보았다. 『구십, 아직은 젊다』라는 제목으로 아들 전영근 화백과 함께 전시회를 했던 것이 수년 전이다. 미륵산 등산길에 들리면 미술관 한편의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노 화백을 보았다. 전혁림 화백은 1916년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하고 전공과는 다른 미술의 길을 택했다. 오로지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여 한국화단에 거목으로 우뚝 선 독보적인 인물이다. 고향에 은둔하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풍경을 노래해 왔다. 통영 앞바다의 색채를 주요 모티브로 삼아 독특한 화면구성과 색채사용으로 한 일가를 이룬 그를 화단에선 한국적 추상화의 시조로 평가한다. 통영의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 바다의 화가로 불리며 청와대, 국제음악당, RCE, 통영대교 맞은편에 그의 작품이 살아있다.

풍화리 양화마을의 유택은 소박하다. 상석도 없이 석등 하나만 놓인 소박한 유택이다. 유택 옆에는 아들 전영근 화백의 작업실이 있다. 겨울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날 따뜻한 차 한 잔을 올렸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지만 유택이나마 우리들 곁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로 불리어지는 작가다. 천형의 세월을 살아온 사마천을 생각하며 토지를 집필 하셨다고 한다. 고향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통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김 약국의 딸 들』이 그렇고 『파시』가 그렇고 『토지』가 그렇다. 특히 『김 약국의 딸 들』은 나고 자란 공간을 배경으로 생생하게 고향에 대한 기억을 그려내었다. 젊은 날 그를 품어주지 못했지만 유택이나마 고향으로 모신 것은 천만다행이다. 꽃피던 5월 5일 날 우리 곁을 훌쩍 떠나버린 선생은 해마다 후학들이 정성을 다하여 추모제를 하고 있다.

남부지방에는 1~2mm만 온다던 비가 제법 내렸다. 몇 번 찾아가는 묘소이지만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이 꼭 선생의 살아생전의 모습과 흡사하다. 차 한 잔을 올리고 묵념했다. 기념관으로 내려와 작품세계를 관람했다.


정윤주 그는 누구인가? 통영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동피랑 언저리에서 태어나 한약국집 아들로 자랐다. 통중 음악선생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유치진의 〈까치의 죽음〉을 작곡하여 음악의 열정을 불태운 그는 이후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예술음악과 실용음악(영화음악)이라는 두 영역에 풍성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에 한국적 정서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적 정서에 머물지 않고 서양음악의 현대적 어법을 자신의 작품에 수용하고자 노력하여 서양적 요소와 동양적 요소가 융합된 독특한 작품을 낳았다.

그의 묘소는 산양읍 신전리 183번지 산언덕에 있다. 걸망개 숲에서 마리나 쪽으로 약 360m 지점의 신봉입구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산으로 오른다. 걸망개 숲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계신다. 안내판이라도 세워 그의 음악세계를 기억하고 알렸으면 한다.


점심을 먹고 김용식, 김용익 기념관에 갔다. 아담한 가정집을 기념관으로 단장했다. 형 김용식은 외무부장관으로 김용익은 해방 후 미국으로 건너가 습작 중 1956년 《하퍼스 바자》에 영어 단편 〈꽃신〉을 발표, “가장 아름다운 단편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했다. 해녀, 푸른 씨앗, 등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그의 작품은 미국, 영국, 독일,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지의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문학이란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고정적인 형태가 없는 것이어서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면 벌써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는 훼손 된다”고 했다.

그의 묘소는 용남면 동달리 산 13번지 선영에 있다. 그의 유택은 통영예술의 향기에서 노력을 기울려 묘소의 행방을 찾고 추모제를 하여 유족들을 감명시켜 기념관 건물을 기부채납 받아 기념관을 꾸미고 묘소를 단장했다. 선영에는 수 기의 묘소가 있으나 김용익 묘소만 벌초를 하였다. 묘소에서 바라본 소나무 숲 사이의 바다는 기막힌 조망을 준다.


차를 돌려 거제 둔덕으로 향했다. 약국을 운영하던 부친 유춘수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이 극작가 류치진, 차남이 류치환이다, 일찍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진명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권재순 여사와 결혼하였는데 이 결혼식의 화동이 김춘수였다. 김춘수는 청마를 따뜻하고 소탈한 인물로 기억한다. 미당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청마는 통영으로 돌아와 1945년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지내며 문화운동을 펼쳤다. 평생 교육계에 몸담으며 많은 시작을 남겼으며 특히 시조시인 이영도와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유명하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의 유택은 부산에서 거제 둔덕 선영으로 이장했다. 청마 꽃들 오른쪽 언덕으로 오르면 둔덕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혔다. 부인 권재순 여사를 옆에 두고 멀리 통영까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잠들어있다. 청마 문학관은 통영에, 기념관은 거제 둔덕에 각각 특색 있게 운영되고 있다. 최근 청마 문학관을 유료화 하면서 발길이 뜸해졌다 하는데 지금은 어떠한지 알 수 없다.


문화예술인의 고향은 작품의 원천이 된다. 통영은 예술의 DNA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전혁림이 그러하고 박경리, 정윤주, 김용익, 류치환이 그러하다. 이 분들의 작품 속에는 통영이라는 고향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고향은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며 내면 깊숙이 내재되어있다 어느 순간 작품으로 표출된다. 우리는 그 내면의 세계를 바라볼 때 가장 통영스러운 작품과 생각을 접할 수 있다. 기념관과 유택을 찾아서 그분들의 채취를 느낀 보람찬 하루였다.



201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