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104회 일요걷기(거제 사또 길)빠름의 세상에서 느릿느릿 옛길을 걸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청풍헌 2018. 5. 23. 21:14

거제 사또길 답사기

 

통영은 변방(邊防)의 시절부터 호국의 장소이다. 고려시대에는 왜구들의 도적질이 심하여 소탕작전이 이루어졌으며 그 흔적은 여러 섬에 남아있다.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하여 견내량에 모여 출동을 했으며 임진왜란으로 한산도에서 승첩을 이루고 통제영을 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지금의 장소에 통제영을 열고 조선을 지키는 파수의 역할을 담당했다. 1895년 폐영 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암흑기를 지나고 광복의 기쁨도 잠깐 6.25남침으로 풍전등화가 된 대한민국을 지킨 것은 통영해병대상륙작전이다. 2중대의 진격로인 견내량에서 장문을 거쳐 원문(轅門)까지 이르는 길인데 이 길이 사또길과 겹친다. 거제로 가는 옛길이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 있는 길을 가고자 한다.

 

원문공원 입구에서 만나 원문마을로 내려갔다. 북신만 쪽의 원문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원문성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 허가를 내어 주어 많은 분란이 있었다. 이후 문화재청에서 보존 명령이 떨어져 복토 후 방치되고 있다. 죽림 쪽의 원문마을은 성벽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원문 성문터에서 동네 주민을 만나 오횡묵비의 원래 위치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옛 지도를 살피 보며 우물과 창고, 오횡묵비의 귀부의 위치를 가늠하고 이곳이 원문 성문터임을 확인했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나눠져 하나는 통제영으로 하나는 거제로 간다. 우리는 거제로 가는 길을 따라갈 것이다.

 

원문마을에서 기호마을까지는 인도를 신설해 놓았다. 기호마을은 텃개라 하고 이곳에 터를 잡아 생긴 마을이란 뜻이라 한다. 장문리 대안마을 입구에는 폐교된 장문 초등학교가 있다. 한 때 승마장을 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방치되어 있다. 이 길 옛길임을 증명하는 것이 곳곳에 있다. 즉 길가에 효열비, 쌍효비 등이 있다. 이 비석은 가문의 영광으로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길가에 설치를 한다. 정려비나 효열행비가 있다는 것은 옛길임을 증명하는 지표다. 대안마을 입구에는 노거수가 버티고 마을을 지켜주며 또 예쁜 집이 있어 살펴보니 우수주택 인증을 받은 집이다. 회관 앞 정자에서 간식을 먹고 고개를 넘을 채비를 했다. 진드기 예방을 위하여 바짓가랑이를 양말 속에 넣고 진드기 기피 제를 뿌리는 것이 전부다. 출발하기 전에 발 패션쇼를 했다. 알록달록한 각자의 발을 나란히 세우고 두 발로 걸어서 통영을 힘차게 가기로 하고 이동했다.

 

거제 사또 길은 대안마을을 가로질러 달 비치 펜션으로 오른다. 입구의 우측 유자나무 밭으로 올라가면 희미한 길이 있다. 전날 온 비로 인하여 대지는 촉촉이 젖어 풀냄새, 흙냄새가 향기롭다. 때죽 나무의 별꽃이 떨어져 있다. 어느 별에서 왔는지 물어 보기도 하고 장희빈의 사약 재료로 쓰였다는 천남성의 꽃도 보았다. 박쥐나무의 꽃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자연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잘 흘러가고 있다. 스스로 나고 자라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자연은 그냥 두어도 일정한 법칙에 의하여 연결되고 있다. 옛길을 따라 오르면 좌측 가장자리에 축대를 쌓은 흔적이 있다. 이 길이 조선시대 관로이므로 이웃 마을에서 부역을 하여 보수를 하고 공사를 했다. 축대를 쌓거나 평탄작업 및 빗물에 쓸려 간 길을 보수하기도 한다. 좀 더 오르면 우측으로 큰 넓적한 바위가 가매바우이다. 거제 사또가 가마를 타고 오르다 이곳에서 쉬어 갔다는 구전에 의하여 이곳이 가매바우라 할 것이다. 가매바우를 지나면 밋밋한 언덕이 나오고 드디어 고갯마루가 나온다.

 

고갯마루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다. 성황당, 서낭당, 돌무지 등으로 불리어지는 민속적으로 중요한 지표이다. 이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이 안녕을 빌면서 오다가다 던진 돌들이 쌓여 서낭당을 이루었다. 이곳에는 고려 의종의 돌도 있으며 조선의 유배객 이행의 돌도 있고 우암 송시열의 돌도 있다. 거제 부사의 돌도 있으며 나무꾼 지게꾼의 돌도 있다. 뭇 사람들이 이 고개를 사연을 안고 넘었다. 고개에 올라서면 목적지인 거제가 보인다. 오지인 임지나 유배지로 가는 심정을 헤아려본다, 고개 너머에는 황토 길이라 가마가 내려갈 때 미끄러워 박석을 깔았다. 이곳도 지역민들의 부역으로 길을 다듬고 박석을 깔았을 것이다. 옛길은 고개를 넘어 유자 밭으로 이어져 소류지를 지나 양촌의 경계지점인 고개 마루로 연결된다. 고개 마루에는 효자 열부비가 두 기나 서 있다.

 

옛길은 적촌 마을 쪽으로 있으나 들판을 가로질러 견내량 유방산 아래에 왔다, 이 근처가 장평언(長平堰)인데 통영지 제언 편에 <장평언(長平堰)은 영의 동쪽 15리 유방 경계에 있다. 옛적 전라, 경상 양도가 합동으로 수조를 행할 때 수조에 참여한 군졸들이 흙은 메워 방죽을 막고 영의 염전으로 사용 했는데 중년에 소나무를 훔쳐(투송偸松) 소금을 굽다가 염전을 폐지하고 둔전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소금 생산 방법은 나무를 때어서 소금을 굽는다. 모든 연료가 나무이므로 금송 구역의 소나무를 훔쳐 소금을 만들다가 염전이 폐지되고 둔전으로 바뀌었다. 난중일기 을미년(1595) 5월에는 한산도에서 소금 굽는 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방산 고개를 넘어오면 견내량이다. 이곳은 통제영의 우후가 풍화 시(3~8) 방영을 서던 곳으로 중영이 옮겨 올 정도의 관아가 존재 했었다. 견내량은 왜구들의 출몰이 잦은 최전방의 변방이다.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 임진왜란 이후 통제영 시대에도 매우 중요한 방영이었다. 유방(留防) 터를 가늠해보며 해안 길을 따라 견내량 나루터로 향했다. 나루터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나루터 사람이 있다. 이곳에서 본인의 선대가 거제로 가는 나룻 선을 운영 했으며 부산이나 마산을 가는 여객선의 손님을 거룻배에 태워 옮기기도 했다고 한다. 건너편 거제 견내량 쪽에는 견내량 조창이 있었으며 노거수 아래에는 거제 부사 불망비와 김삼주 공덕비도 있다. 그러나 유방 쪽은 현재 아무런 흔적이 없다. 7~80년대 까지 이곳에서 해군에서 해상 검문소를 운영했다. 그러나 지금은 두 개의 거제 대교가 건설되어 거제는 육지화 되었다. 또한 이곳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처음으로 상륙한 지점이라 기념 표석을 세워 놓았다. 즉 이곳이 조선과 대한민국을 구한 곳이다. 점심을 먹고 몽하로 이동하여 멋진 분위기에서 차 한 잔으로 정담을 나누다 이동했다.

 

길이란 소통이고 연결이다. 사람은 두발로 걷는 동물이다. 동물들은 이동하는 일정한 패턴이 있으며 그 길을 따라 물자가 이동하고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제로 가는 사또 길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녔던 원형이 살아 있는 길이며 이 길을 따라 걷는 것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빠름의 세상에서 느릿느릿 옛길을 걸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2018.5.13. 거제 사또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