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발해 1300호 기념탑

청풍헌 2011. 11. 19. 22:02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 세운 발해

발해사가 우리 역사속에 자리매김 한것은 사실 얼마되지 않는다.

발해는 698년 건국이래 926년 거란에 망한후 800여년간이나 우리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겨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몇 줄 언급됐을 뿐이다.

발해가 다시 등장한 것은 멸망한지 858년이 지난 뒤였다.

1784년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를 창건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점과 

발해땅이 고구려 땅이었다는 점을 들어 고려가 의당 발해사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 발해는 자연환경의 열악함을 활발한 대외 무역을 통하여 해동성국을 일으켰다.

그 해상경로를 탐험하기 위하여 통영의 아들 장철수 대장을 비롯한 네명의 젊은이들이

물푸레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항해를 나섯다.

그 뗏목이 발해 1300호이다.

 여기는 통영 산양읍 통영수산과학관내에 있는 발해 1300호 기념탑이다.

1997년 12월31일 한 척의 뗏목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발했다.
높이 올린 앞 돛에는 전설 속 치우(蚩尤)천황의 얼굴이, 뒷 돛엔 에밀레종 비천상이 그려져 있었다.

길이 12m, 이물(앞넓이) 6m, 고물(뒷넓이) 4m 크기에 10.8m 자리 2개의 돛을 단 전체 넓이 20평 남짓한 뗏목의 이름은 '발해 1300호'.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제주 성산포까지 1천244㎞를 항해할 예정이었다.

뗏목을 타고 동력 없이 바람과 돛에만 의지해 겨울철 망망대해를 20여일간 떠다니면서도

탐사대는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네티즌들에게 항해장면을 생중계하는 등 만주땅을 차지하고 북동아시아를 주름잡았던

우리 조상들의 기개와 용기를 유감없이 재현해 보여줬다.

그러나 1998년 1월24일 발해항로 뗏목탐사대가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전원 희생됐다.한산신문 참조

 장철수 기념 사업회는 꾸준한 활동으로 시의 협조를 얻어 여기에 그 기념탑을 세웠다.

통영의 앞바다가 휜히 내려보이는 이곳 산양읍 양지바른 언덕에 그들의 호연지기를 기리는 기념탑이다. 

 

 희생된 네명의 얼굴들.

장철수 대장, 이덕영, 이용호, 임현규 대원.

 고 장철수 대장 그는 누구인가?

통영초교 63회이며 한국 외대 러시아어 학과 81학번으로 일찍 독도문제 연구회를 조직하여 독도를 연구 했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뗏목을 타고 건너 갔다는 역사적인 사실를 직접 92km의 바닷길을 건너 증명 하기도 했다.

발해까지의 해상 교역로를 증명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대학을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푸른 독도 가꾸기' 활동으로 알게 된 울릉도의 이덕영(당시 49세) 선장,

국제 요트대회로 알게 된 창원의 그래픽 디자이너 이용호(당시 35세·촬영담당)씨,

부산 한국해양대 후배인 임현규(당시 27세·통신담당)씨가 대원으로 합류했다.

 

위대한 역사의식을 가진 진취적인 젊은 청년들의 뒷모습.

 

기념탑은 돗대의 형상으로 이렇게 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당시의 항해일지의 한편이다.

의로운 대원들의 사진들

치우천왕의 문양

붉은악마에서는 공식적으로 치우천왕을 상징으로 채택하고 있다. 붉은악마에서 치우천왕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도안은 신라의 귀면와를 토대로 한 것이다.[1] 참고로 한국사학계에서는 해당 귀면와의 도안과 치우는 무관하다고 보고 있다.

치우(蚩尤)는 중국의 여러 기록과 전설에서 헌원과 함께 탁록의 전투에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전쟁의 신 또는 옛 부족의 지도자이다. 묘족에서는 치우를 선조로 여기며, 한국의 일부 야사에서는 한민족을 이루는 하나의 부족 또는 군주라 주장하기도 한다.

치우와 헌원이 전쟁을 벌였던 사실은 흔히 '황제 신화'라고 부르며 이러한 신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의견이 존재하였다.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족(九黎族)은 먀오족의 조상이라고 하며 양쯔 강 유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치우로 상징되는 양쯔 강 유역의 남방 부족과 황제로 상징되는 황하 유역의 한족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2]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2]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3]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흩어져 사는 묘족, 흐몽족 등은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한다.[4] 한국의 일부 야사에서는 치우씨(蚩尤氏), 치우천왕(蚩尤天王) 등으로 부르며 치우 또는 그 부족이 한민족에 속했다고 주장한다.위키백과

정동명의 ‘침묵의 영웅’은 ‘발해1300호’ 학술 뗏목 대 탐사대를 상징하는 돛대 형상과 저 넓은 바다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장철수 대장 등 4명의 대원 모습을 너울거리는 파도와 함께 표현해 순간 포착의 미를 더했다.

양쪽으로 뻗은 돛대 형상에서 개개인의 이상과 꿈은 다르지만 저 푸른 바다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고 싶은 욕망과 꿈은 일치함을 보여주고, 현대적인 조형성과 공간감, 동적인 선율을 통해 과감하면서도 부드러움을 표현했다.

작은 돛대에는 치우천왕과 발해 1300호가 항해한 해도가 그려져 있다. 또한 반대편에는 발해 1300호와 함께 산화한 4명의 대원들 사진과 “그들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는 1998년 1월 23일 오후 고 장철수 대장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구조를 기다리다 왼손으로 쓴 항해일지의 마지막 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산신문

 

 

참으로 진취적인 기상의 대한민국 사나이들.

무모하리만큼 위험한 항해를 성공 했지만 결국 바다에서 산화한

4명 대원의 숭고한 정신은 우리 후세가 길이길이 세겨 본받아야 할것이다.

발해

신당서에는 "발해 13대 경왕에 이르러 고금의 문물과 제도를 완비하여 드디어 해동성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발해는 분명 한국사에 포함해야하는 여러 정황이 있다.

통일신라와의 관계,일본에 존재하는 각종 기록들과 장철수 대장이 목숨으로 증명한 해상항로등

이보다 더 확실한 역사적 진실은 없을것이다.

 

2011.11.19 통영 산양읍 발해 1300호 기념탑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