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통영의 "물" 그 역사를 찾아서-2(용화 수원지와 문화동 배수지)

청풍헌 2011. 11. 13. 22:47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1604년 삼도수군 통제영을 이곳 두룡포로 옮긴이래

1895년도에 폐영될때까지 통영성내의 9정에서 새미물을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의 지배로 중요 요지에 많은 일인들이 들어와 어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식수가 부족하여

 

1924년 3월에 용화 수원지를 준공(520톤/일) 사용 했으며

1933년 9월~1935년 3월에 용화 수원지및 문화 정수장을 확장(2,000톤/일)

1938년 3월~1940년 6월에 노산 취수장 신설및 문화 정수장을 확장했다.

1960년 12월~1964년 12월에 우동 수원지 수원을 확보(40,4000톤)했으며

1970년 7월 봉평 정수장을 신설 봉평동 일대에 급수를 했다.

1976년 8월 거제 둔덕계통 상수도를 확장(10,000톤/일)

1989년 남강 광역 상수도가 일시 통수가 되어 물부족이 어느정도는 해소 되었다.

 

 용화 수원지에 왔다.

용화 수원지는 배수장치가 없으며 물이 만수가 되면 자연적으로 넘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래서 보면 성벽같은 느낌이 든다.

화강암을 다듬어서 잘 맛물리게 튼튼하게 쌓아 놓았다.

 배수 밸브가 있는 시설물이다.

 문을 열어보니 두개의 배관이 있다.

 구조물 상단에 있는 글씨다.

원천장청(源泉長淸) 즉 "수원지의 원래의 샘물이 오랫동안 맑게 잘 흘러가라"라는 뜻이란다.

잘 보아두자.이와 유사한 형태의 화강암 글씨가  문화 배수지에도 있었다.

 지금은 사용을 않지만 예전엔 통영의 유일한 수원지 였다.

 오늘은 문을 개방 했었네.

안쪽은 시멘트로 되어있고 밖은 경치돌(화강암)로 쌓아 올렸다.

마치 중세의 성벽을 보는것 같다.

 이곳은 전혁림 미술관 뒷쪽에 있는 봉평 정수장이다.

1970년도에 건설 되었으며 용화 수원지에서 여기를 거쳐 각 가정에 배수 되었다.

 2지의 완속 정수지로써 바닥은 고운 모래로 되어 있다.

지금은 방치되어 잡초가 우거져 있다.

 

여기서 취수장,정수장,배수장을 알아보자.

취수장은 원수를 취수하는 수원지이고 정수장은 원수를 먹을수 있는 물로 여과 소독 처리하는 시설이며

배수장은 먹을수 있는 식수를 모아서 각 가정으로 공급하는 곳이다.

이곳은 용남면 삼화삼거리에 위치한 취수장이다.

흉물스럽게 시설만 덩그러이 남았다.

각종 밸브와 배관 모터자리 등등...  

여기가 문화 배수장이다.

1933년 9월 건립된 것으로 기계실 건물과 초소가 있으며, 기계실의 평면은 6각형에 낮은 돔을 가지고

상부에 점탑을 세운 독일 바로크식 구성을 보여준다.

  ‘문화배수지’는 1933년 축조된 근대 공업시설물로 역사적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출입구에는 ‘천록영창(天祿永昌)’이라는 화강석 현판이 있었으나 2004년 통영 시민단체의 극일 행사로

글귀를 시멘트로 삭제시켰다.

‘천록영창’은 ‘하늘로부터 받는 복록이 길이 창대하고 영원하리라’는 뜻으로 배수지에서 일반가정으로 나가는 물의 의미를 상징하는 축원문. 그러나 일제가 통영의 정기를 억제하려고 지은 건물이라는 이유로 시민들이 근대문화유산 등록을 거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천록영창 이라는 글자가 있었다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누가 떼어갔나? 그 행방이 묘연 했다.문화원 원장님도 잘몰랐다.

용화 수원지 배수실 상부의 화강암에 있는 글귀와 비교를 해보면 아하!

 

 

시멘트로 덧발라 그 글귀가 없어졌다.

 

문화동 배수지의 전경이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시대 유적지인 통제영내의 뚝사당을 헐고 지은것이다.

뚝소홀기(纛所笏記·뚝제 지내는 순서를 적은 문서) 원본이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뚝(纛)은 대가(大駕) 앞이나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군기로 큰 삼지창(三枝槍)에 붉은 삭모를 많이 달았으며 행진할 때에는 말을 탄 장교가 받들고 2∼4명의 군사들이 벌이줄을 잡고 다녔다.

지붕안이 궁금하여 창으로 통하여 사진을 찍었다.

남강물을 잠시 저장하여 일정 시간에 아래로 급수한다.

이곳 어디엔가 뚝사당이 있었고 그 뚝사당은 기와집에 기둥이 4개인 3칸 짜리 집으로 마루가 나무로 돼 있었고 집 주변에 대나무 밭이 있었고 이 대나무 뿌리가 뻗어나와 마루가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뚝사당에는 화살이 달린 2질짜리 나무봉에 소털같은 깃털이 아래로 달린 것이 2∼3개 서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고 문헌을 보니 장군신을 상징하는 뚝(纛)기였던 것 같다. 또 그 기와집에는 옻칠로 된 제기와 나무제기, 그리고 제사에 쓰이는 제물들이 구석에 남아 있었고 ‘용궁각’이라는 큰 현판이 걸려 있었다. 크기는 요즘 사무실에 쓰는 큰 탁자 크기로 용 룡(龍)과 궁(宮)자 가운데 민갓머리로 된 글자 (宮)과 각(閣)이라는 한자가 해서와 행서가 섞인 해행서(楷行書)체로 쓰여져 있었다. 그때도 ‘왜 궁자 갓머리에 점이 없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한산신문 2005.1.28 참조

문화동 배수지를 시청 상하수도과에서 관리를 하다가 올해부터 수자원 관리공사에서 관리를 한다고 한다.

배수지 관리인인 김일한씨(32)와 대화를 했다.

전국에서 1~2곳밖에 없는 제한 급수지역이 이곳 통영 이란다.

지금도 누수율이 40%이상 된다고 한다.

일전에 단수를 하지 않고 누수를 탐지하는 기계를 도입했다고 보도 되었다.

배수지 기계실 하부의 구조가 이중으로 시설되고 그 사이를 문으로 통과하도록 하여

일제시대 일인들이 유사시 반공호 역할이 되도록 건설 되었다고 한다.

 

이번 통영의 "물" 그 역사를 찾아서를 취재하며 많은것을 알게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로 지정된 통영이 물부족 도시이며 아직까지 제한 급수를 하고있다고 한다.

바다의 땅 통영 그 섬에도 아직 간이 상수도에 의존하는 곳이 많으며 많은 투자가 되어야

더욱 살기좋은 통영이 될것이다.

 

2001.11.13. 통영 용화 수원지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