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섬 이야기

구국의 성지 제승당을 다녀와서

청풍헌 2012. 2. 6. 23:48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때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제승당을 짓고 삼도수군 본영을 삼은 유서깊은 곳이다.

몇번을 방문했지만 그저 그런 곳이려니 했는데 오늘은 감회가 남다르다. 

제승당을 가는 파라다이스호 선미에 있는  태극기가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통영별로를 완주한 양말이다.(두켤레를 번갈아 신었다)

                                                                                         닳아서 구멍나기 직전이다.ㅎㅎ 

제승당 입구의 거북등대.1963년도에 세웠다. 

배에 내려 사적지 입구에 화장실을 짓고있다.

기와를 올리고 있는 장면은 정말 오랫만에 본다.흙을 이용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보는것같아 흐뭇하다 

 

이곳은 제승당 시절 사용하던 우물이다.바다가 가깝지만 지금도 짠물이 전혀없는 맑은 물이다.(직접 먹어봄ㅎ) 

수루의 마루에서  

수루의 마루다.마루의 복원이 잘못되었다.

세병관의 마루를 보았는가?촉석루의 마루는?한벽당의 마루는?수원화성 장안문의 마루는?

 

제승당 이다.중수한 건물중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현판은 조경 통제사의 글씨다. 

제승당 실내에 엄청큰 현판이 있다.

다른 통제사의 현판인데 누구 글씨인지 정확하게 물어보지 않아서... 

제승당에 있는 한글비석.

이 비석은 1948년도 경남도 초,중학생의 성금으로 세운 비석인데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은글을 김충현 선생이 쓴 내용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비를 새긴 날자를 <대한민국 30년 2월>로 기록한 점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이 비석은 지금보아도 글이 아주 잘 되었다고 한다.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은 비가 남해에도 있다고 한다.(해설사님의 진언)

이 비석을 세우기 위하여 배로 싣고와서 한산국민학교 4,5,6학년 학생들이 개미떼처름 모여 비석을 옮겼다고 한다.

1,2,3학년 아이들은 옥바우와 장자개에서 몽돌을 30개씩 주워다가 비석 아래에 깔았다고 한다.(74세 한산도 토박이 할아버지)

 

 

 제승당 유허비의 앞면과 뒷면이다.사암의 무른 재질때문에 아래부분은 마모가 심하다.

1739년 제 107대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중건하고 세운 비석이다.

제승당은 임진왜란시 충무공이 작전 지휘소를 세웠던 곳인데 정유재란때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전멸로 일부 후퇴하는 12척의 전선이 청야작전으로 제승당을 불태워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것을 방지했다.

이후 142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조경 통제사가 장계를 올려서 중수했다.

 

제승당을 중건한 조경 통제사의 유허비는 거제 오량에도 있다.

제143대 통제사로 부임한그의 아들 조심태가  오양역을 순시하다가 역민이 세운걸보고 수치스럽다 하여 

비를 묻고 그 위에 통제사 조경비 매치처라는 비석을 묻었는데 경지 정리 작업중에 발굴되어

오량 신계부락 들 가운데 당산나무 아래에 있다.

 거제 오량 신계에 있는 조경 통제사 유허비와 매치처비(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사진으로나옴)

 

조경 통제사는 제승당 중수시 거제 하청 앵산 정수사 스님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통제사 조경과 거제와는 깊은 관련이 있는것으로 보여진다.

거제 사등면지에서

 

한산도 두억포에 있던 군창둔전 3두락을 획부하여 거제 앵산사 승도들로 하여금 이곳 제승당을 수호하게 했던 것이다.

김일룡의 통영 향토사 언구 논문집에서 

충무사인 영당

일제 강점기때는 통영군수가 직접 관장 했으며 이후 제승당장을 선임하여 3년 임기로 관리했다.

1920년 초대 당장인 이영재씨가 사재를 들여 제승당을 중수하고 한산 모충계를 조직하여 모금을 하여 영당을 건립하고

여기에 청전 이상범 화백의 영정을 모셨다.이후 1952년 이당 김은호 화백의 영정으로 바꾸고 1967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영당을 다시 짓고 이후 1976년 충무사를 중건하고 1978년 정형모 화백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김일룡의 통영 향토사 연구논문집에서 

특별한 감회의 참배를 했다.

한산정에서 활도 쏴본다.

무과에 급제할수 있는지...

첫눈이 내린다.

첫눈 내리는날 데이트는 즐거운 일...

추봉도로 왔다.추봉도 연도교는 2007년도에 연결된 다리이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맑은 물에서 자라는 조개 양식장과 수초들

다리를 건너니 기념 공원에 있는 胎夢이라는 자연석 작품돌

한산사의 해상법당이다. 스픈지에도 나왔다.오늘은 방생을 하러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했다.

봉암 몽돌해수욕장 송림에 있는 만고청풍이라는 표석.

만고에 그치지 않고 불어오는 맑은 바람처럼 변하지 않는 지조와 높은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이다.

노송과 너무 잘 어울리는 만고불변의 진리. 

바라보이는 바위섬에 물이 빠져 급 궁금했다.

흙한줌 안보이는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는 강인한 섬사람의 기질을 말해준다.

한산도는 섬이다.섬중에서도 바다가 보이지 않은곳에 이렇게 넓은 들이 있다.

옛날 군량미를 생산하던곳이란다.

한산도 토박이 할배(74)

끝내 성함도 안 밝히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한산국민학교 저학년때 가을되면 제승당에 청소하러 왔단다.당시에 제승당을 지키는 수방장이 있었는데

목조로된 사당이 있었으며 초상화는 눈빛이 무서워 겁이 났다고 한다.

배를 타고오면 선창에서 내려 바로 올라오도록 되어있었는데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한참 걸어서 오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봄이나 가을에 오는 사람들이 술을 먹고 싸움을 해서 배를 타고 도망을 못가게 부두를 옮겼다고 한다.

 

문화관광 해설사님과 대화중에 어느 할머니가 한분 오셔서 50년만에 방문한다 하시며 너무 변하여 잘 모르겠다고 한다.

지금부터 50년 전이면 1962년도이다.즉 성역화 하기전의 제승당 모습이다.

당시에는 배를내려 바로 올라왔으며 조그만 사당이 있었다.

비석에도 비각이 없었으며 주춧돌만 있었다고 회고한다.  

새우깡에 길들여진 갈매기들

무분별한 관광객이 자연의 섭리를 망치고 있다.

이 갈매기는 새우깡만 먹고  비만하여 날지 못하고 고기잡는 법을 잊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뒷짐에서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의 애환을 본다.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오신다고

차타고 배타고 통영에 내려 다시 차타고 병원으로 또다시 차타고 배타고 차타고 집으로 갈것이다.

섬사람의 애환이다.가끔씩 가는 우리는 자연이 좋네 경치가 좋네 여기서 살면 좋겠내 하지만

막상 살고있는 주민은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하루빨리 연육교가 생겨 평등하게 문화혜택이 갔으면 한다. 

 

2012.2.5 한산도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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