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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의 역사를 찾아서1

청풍헌 2012. 2. 20. 21:16

이곳 당포는 남해안의 왜구를 방어하는 중요한 진지였다.

고려공민왕 23년  (1373)왜구들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최영장군이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성벽을 구축하고 대승을 이룬곳이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 진지를 이용하여 당포대첩을 이룬 역사적인 곳이다.

또한 이곳은 오랬동안 어업을 하던 한적한 어촌마을로써 지금도 당제堂第의 원형이 살아있는 중요한 마을이다.

오늘 이곳 당포의 역사를 찾아본다.

이 성은 이중 기단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말 조선시대의 석성이다.

시에서는 예산을 들여서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

산양삼거리에서 원항 마을로 가기전에 좌측 삼덕사로 가는길로 가면 우측 주택가 뒷편에서 만난 거대한 성벽이다.

관유마을 당산나무다.

할매 할배상을 세워놓고 각종 제수음식이 있다.

관유 마을은 일명 동박골 마을이다.즉 당포성 동문밖의 마을이었다.

동박골 노인정도 있다.

서문 입구는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다.

이곳 서문 입구에는 양쪽에 구멍이 뚫린 성문의 주춧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아마도 새마을 운동으로 홰손되고 없어졌다. 

서문으로들어섰다.돌담의 원형이 살아있다.

돌담사이 끝에 보이는 삼덕사절.(이 절은 근년에 세워졌다고 함)

이곳 성안은 돌담과 대나무가 많이있다.

대나무는 시루대로 화살을 만들던 재료라 한다.

중간 중간 옛 성곽이 이어져 있다.

복원된 성곽의 모습이다.

성위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다.

동그라미와 네모가 점점이 있으며  떠 있는 섬들이 다가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순신 장군이 이곳 당포에서 왜구를 물리친 경위는이러하다.

 

2일 진시(07:00~09:00)에 <왜적선이 당포 선창에 머물며 대어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시(09:00~11:00)쯤 곧장 그곳에 이르니,

왜적들이 무려 300여 명인데, 반쯤은 성으로 들어가서 재물을 다 없애고,

또 많은 왜적들이 성 밖에서 험한 곳에 의거하여 함께 철환을 쏘고 있었습니다.

왜적선은 크기가 판옥선만 한 것이 9척과 중․소선을 합한 것 12척이 선창에 흩어져 대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큰 배 위로 높은 층루가 우뚝 솟아 높이가 3~4길(10자)이나 되고, 밖으로 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휘장의 사면에는『황(黃)』자를 크게 썼으며, 그 안에 왜장이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아래로 들이받을 듯이 가면서 용아가리로 현자 철환을 치쏘고,

또 천자총통에 대장군전을 지자총통에 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리자, 뒤따르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마구 쏘았습니다

중위장 권준이 돌진하여 들어가 왜장이라는 놈을 화살로 쏘아 맞추자, 쿵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므로,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흥양 보인 진무성이 그 머리를 베었습니다.

왜적의 무리들이 겁내어 달아나면서도 철환과 화살에 맞은 놈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넘어지는데,

머리 6급을 베고, 그 배들을 모조리 (21척)불태워 버린 뒤에, 여러 전선의 용감한 군사들이 그대로 상륙하여 끝가지 쫓아서

수색하여 적의 목을 베려하던 때에 『또 왜대선 20여 척이 소선을 많이 거느리고 거제도에서 와서 대어 있다』는

탐망선이 보고해 왔습니다.

당포는 지형이 좁아서 교전하기에 합당치 않아서 바다 밖에서 요격하려고 노를 바삐 저어 바다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왜적선들이 5리쯤 되는 거리에서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는 달아나 숨을 겨를도 없이,

우리 여러 전선이 외해까지 뒤쫓아갔습니다.

이미 날은 땅거미지고 어두워져서 싸울 수 없어 진주땅 창신도에서 머물면서 배를 대고 밤을 지냈습니다.

 

1592년 6월14일 이순신의 승전장계에서 발췌

 

이후 통제영 시절에는 이곳에 당포진을 설치 했는데 여기는 수군 만호(종4품)가 근무 하며

만호는 전선(戰船) 1척, 장교(將校) 6명, 사부(射夫) 18명, 화부(火夫) 19명, 포수(砲手) 24명, 타공(舵工) 3명,

격군(格軍) 120명과 군량미(軍糧米) 57석, 중미(蒸米) 3석, 미식(味食) 3석을 관장하였고, 병선(兵船) 1척에 장교 1명, 사부 10명, 포수 10명, 타공 10명, 격군 14명과 사후선(伺候船) 2척에 격군 5명과 좌초관영귀선(左哨官營龜船)을 관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포항 증축시 이곳에서 목책이 발견되어 문화재청에서 조사를 한다고 공사가 약 1년간이나 지연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원항마을의 서쪽 끝에 있는삼덕 조선소 쪽인데 동네 어른들의 진언으로

이곳에 토성이 있으며 성곽의 꼭대기에 기와조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탐방을 했다.

목 부분에있는 양어장 우측으로 오르는 소로가 있다.

석성과 토성이 혼합된 형태로 계속 이어져 있다.

성곽은 원형이 거의 살아있는 형태이며 산정에는 기와조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성곽의 탐방은 반드시 겨울에 해야한다.

봄 여름 가을은 수풀이 우거져 사람이 다닐수가 없다. 

이곳을 감싸고 있는 형상의 토성이었다.

이곳이 당시에 중요한 시설이나 역할을 한곳이 아닌지 추정해본다.

이곳이 당포성지를 만들기 전의 구당포성이다.

 

고려말 최영장군이 당포성을 쌓기전에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원항마을에있는 우물.

원항院項은 조선시대 당포수군 만호진 입구의 원문轅門에 해당하는 잘록한 목을 형성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토박이 지명으로 원목 그리고 한자지명으로 원항轅項이라 칭한데서 유래했다.(지명유래집에서)

예전에는 70여호가 이 물을 먹었다고 한다.지금도 이웃 집들은 이 물로 애벌 빨래를 한다고.

당포의 여러 역사를 알려주신 동네 어르신                                   

 

2012.2.18 당포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