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학교

교학을 정립한 서원 道東書院

청풍헌 2022. 6. 9. 06:51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한휜당 김굉필을 모신 서원이다. 9시에 문을 여니 시간에 맞추어 갔다. 해설사도 관광객도 없었다. 입구의 은행나무는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을 옮기면서 심은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라 한다. 노거수는 가지가 옆으로 누워 받침목을 세워 놓았다. 도동서원도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서원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형식의 서원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세운 남계서원 때 갖춰진 형식이라고 한다.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입구의 좌측에 사당이 있었다.

수월루는 교류 공간으로 대문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층은 사방으로 틔어있다. 중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인공적으로 돌을 다듬어서 쌓은 흔적이 보였다. 중문인 환주문의 바닥 중앙에는 연꽃 모양의 돌이 여닫이문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이가 매우 낮아 유생들이 드나들 때 머리를 낮추고 들어가라는 의미란다.

마당을 바라보면 바닥에 중앙으로 박석이 깔렸으며 양 옆으로 계단이 있는 약간 높은 곳에 중정당이 있다. 중앙에는 도동서원이란 현판이 있으며 안에는 중정당이라는 현판이 있다. 양 옆으로는 유생들의 기숙사가 있으며 서재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중정당 축대에는 각종 석재 장식품이 있었다. 석재 중간중간에 끼워 넣은 장식품으로 용을 상징한 것 같았다. 자세히 살피나 거북도 있고 다른 신령스러운 동물을 조각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정당 마루에 앉으니 낙동강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서원이 존재한다. 내부에는 각종 현판이 걸렸으며 양 옆으로 방이 있었다. 뒤쪽의 창틀을 바라보면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모란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고 있었다. 비를 머금은 모란의 잎도 푸르럼을 더해 경이로운 상태로 보였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측으로 돌아가면 성생단이 있었다. 성생단은 희생을 검수하는 곳으로 남계서원, 소수서원, 필암서원 등 몇 곳만 남아있다. 중정당 뒤의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돌을 다듬어 만들었다. 뒤 언덕은 4개의 계단이며 모란을 심어 놓았다. 계단 오르막 위쪽 바닥에 거북 머리를 만들어 가운데 세워 놓았다. 사당은 현판이 없었다. 중정당 좌측에는 장서각이 있고 담장 밖 우측은 고직사가 있다.

서원을 나와 좌측을 끼고돌아 올라가면 측면에서 사당을 볼 수 있다. 안내판에 한휜당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하여 안내판을 따라 산으로 올랐다. 한참을 오르니 가족묘지인지 셋째 아들의 묘소가 나왔다. 좀 더 오르니 딸의 묘와 그 위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었다. 대학자 선현에게 인사드리는 것이 도리인지라 재배했다. 좌우에는 문인석이 있으며 약간 후대에 세운 석등도 있다. 그 위에는 부인의 묘소가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대학자에게 참배드리니 기분이 참 좋았다. 말단 미물인 내가 대학자인 한휜당 김굉필 선생께 인사를 드렸다는 자체가 크나큰 영광이다. 묘소에 참배함으로써 오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답사는 어떤 목적도 있지만 가서 느끼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후학들은 여기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그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은 어떻게 유지 관리되는지도 궁금했다.

 

교학을 정립한 서원 道東書院

도동서원은 1605년에 한휜당 김 광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성리학 교육 시설이다. 정유재란 때 현풍읍에 있던 쌍계서원이 불타자 김굉필의 외증손자 정구가 주도해 대니산 김굉필의 무덤 아래인 현재 위치에 다시 세우고 보로동서원이라고 불렀다. 1607(선조 40)에 왕이 ‘도동서원’이라는 이름의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실제 현판은 1610(광해군 2)에 도착하였다. 도동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는 뜻이다.

서원은 북쪽으로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경사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400년 넘은 은행나무는 서원 재건을 기념하여 정구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정문 역할을 하는 수월문은 찬 강물을 비추는 밝은 달’이라는’ 주자의 시구에서 따왔다. 수월 루를 그쳐 안으로 들어가면 환주문에서 곧게 뻗은 중심축을 따라 건물들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 공간에는 강당 중정당과 기숙사인 동재 거인제, 서제 거의제가 있다. 중정단 외부의 도동서원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이며 강당 내부의 현판은 선조의 사액 현판이다.

사당에는 김경필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왼쪽에 정구의 위패를 모셨다. 김굉필은 인간교육의 기본을 담고 있는 <소학>을 따르고자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부르며 일상생활에서 유교 윤리를 엄격하게 실천했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 당시 김종직과 연좌되어 귀양을 간 후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다. 사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한국에 뛰어난 다섯 유학자를 일컫는 동방오현의 한 분으로 성균관 문묘에 모셨다. 사랑 내부에 김굉필의 선비 정신을 기리는 벽화 두 점이 있다.

재향 공간

사당에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제향의 의례를 실행하고 있다. 제향 인물과 관련된 벽화가 좌우 벽 상부에 그려져 있다. 전사청은 제향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있으며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이다.

강학 공간

중정당은 서원 강학 활동을 위한 핵심 건물이다. 원장과 서원 임원의 집무실과 유생의 강학을 위한 대청마루로 구성된다. 거인제, 거의제는 유생들의 기숙과 개인 학습을 하던 건물이다. 장판각은 서원에서 만든 목판 등을 보관하던 건물이다. 이곳의 장서는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교류와 휴식공간

수월루는 서원의 교류와 유생들의 휴식을 위해 건립한 누각이다. 그 외 고직사, 유물전시관, 신도비각, 보호수, 서원 뒷산에는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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