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가족 이야기

한줌의 흙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다.

청풍헌 2012. 5. 1. 11:43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원초적인 물음에 나의 뿌리를 생각하게 된다.

효는 모든 행위의 근본이라 충의 밑바탕이 된다.

오랫동안 면면히 내려오는 조상을 모시는 풍습은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라 생각한다.

나의 조상을 아는것은 나의 뿌리를 아는것이요, 당연히 알아야 할 도리라 생각한다.

증조 할아버지 산소와 할아버지 산소 큰어머니와 큰형님 산소를 오랬동안 관리를 해 왔는데

할아버지 산소를 두번이나 이장 할 수 없다는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파묘 산골 했었다.

아버지께서 부모님(할아버지)의 묘소를 지극 정성으로 관리를 하셨는데

운이 맞지않아 그렇게 되셨다고 항상 서운해 하셨다.

특히 다른 집안의 잘 조성된 산소를 볼때마다 가슴아파 하시고 당신이 못나서 그런것 처럼 하셨다.

문중에서는 매년 지내는 시제와 벌초로 인하여 여러 가지를 신경 써야 함으로

조상의 묘소를 통합 관리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평잔묘를 조성 하기로 결의하여

둔덕 학산에 있는 달마  할아버지 산소에 허가를 득하여 문중 평잔묘역을 조성 하였다.

선대 조상의 묘소를 파묘 산골한것을 서운하게 여기시던 아버지께서 이렇게 좋은 묘원을 조성했는데

본인도 여기 오고 싶으나 무슨 낮으로 올것인가 하시고 고민 하다가

비록 유골은 없더라도 그 혼만 모시면 우리 후손이 할 도리는 다 한것이라

신위만 모시고 이장을 하기로 결심 하시고 몇번의 의논끝에 이장을 결정 하였다.

오늘은 윤3월 10일 아버지께서 만세력을 보시고 길일을 잡으셨다.

아버지께서 날짜를 받아놓고 그동안 무슨 큰일이 생기면 어쩌나 노심초사 했다고 한다.

죽기전에 마지막 할일이라 생각하시고 추진한 일인데 그 기다리는 시간이 여삼추 같았다고 하신다.

오늘은 비가 예보되어 있어 잠 한숨 못자고 꼬박 뜬눈으로 지새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 하신다.

새로 조성된 묘원 입구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할아버지 산소다.

파묘후에 비석은 잘 묻기로 했는데 조선 경기의 불황으로 업자의 부도로 비석이 몇년째 방치되어

결국 우리 손으로 처리를 하기 위하여 산소에 왔다.

비석 주위를 파서  묻었다.

입석을 할때에는 포크레인으로 작업 했는데 무게가 어림잡아 7~800kg는 됨직하다.

비석을 묻고 삼 형제가 기념 사진을 남겼다.(좌로부터 본인,동생,형님이다)

잘 조성된 문중 묘원에 도착 했다.

여든아홉의 아버지는 이곳에 오시니 만감이 교차하시는지 생각에 잠기시고...

여든 일곱의 어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오르시어 큰아버지 와석을 보시고 계신다.

큰집 용섭 형님과 담소중인 아버지

 

 

 

씨줄과 날줄을 날아서 상석을 미리 수평을 잡아 다시 세우고 고운 흙을 깔고

그위에 한지를 깐다.

한지 위에 신위를 놓는다.

신위를 놓는 위치는 음의 세계이므로 양의 세계와는 반대이다.

즉 서쪽이 상석이 되므로 산소 위에서 아래로 향하여 볼때 오른쪽에 남자의 신위를 놓는다.

상석을 덮고 그 위에 와비를 놓는다.

처자 호자 할아버지는 나의 증조부이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신위이다.

산소의 아래에서 위로 볼때에는 왼쪽이 할아버지(남)이다.

할아버지의 와석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세살때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내 나이 21살에 돌아가셨다.

운명하신날을 훤히 기억한다.

할아버지의 형님이시다.

부산 영락공원에 안치되어 있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두 형님이 모시고 오는 모습

유골이 안치될 자리를  파고있다.

평잔묘에는 나무 상자나 한지에 싸서 묻는다.

이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법칙이다.

한지에 쌓인 두분의 유골이 합장 되었다.

42년을 떨어져 계시다 이제 영원히  함께 잠들다.

큰집 아버지의 비다.

큰집 큰 형님의 신위이다.

소설책을 무척 좋아 했다고 한다.

점심 시간이 훌적 지나 부슬부슬 내리는 우중에 요기를 하고 계신다.

미숙누님과 어머니(좌로부터)

큰집 형수님과 숙모님(좌로부터)

멋쟁이 정자누님.

제물을 차리고 계신 어머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언제 또 이곳에서 이런 일을 하실런지?이것이 정녕 마지막 일까?

오늘 이장을 한 열두분을 위한 제를 올린다.

아버지 께서 밤새 뜬눈으로 쓴 축문을 읽으셨다.

축문을 읽으시는 목소리가 떨렸다.감회가 남다르신지 ...

축문을 불살르고 음복후 모든 절차를 마무리 했다.

 

장묘문화도 시대에 따라 변해간다.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부터 옹관묘 석곽묘 목곽묘 등등...

기끔씩 조선시대의 미이라가 출토되어 당시의 기록이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점차 정착되어 가는 시점에

우리 문중에서 이렇게 휼륭한 묘원을 조성 사후 걱정을 않게 되었다.

인간은 태어나 한평생 살다가 이렇게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12.4.30(윤 삼월 열흘날 문중묘원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관조 시자 흥자 27세손 이며 파조 문자 기자 19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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