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른길 이야기

지리산 둘레길2-1 마라톤 결승점에 골인하다(운리-백운계곡-마근담-덕산)

청풍헌 2012. 8. 4. 17:21

 

지리산의 아침은 상쾌하다.

산허리에 휘감긴 안개가  아침햇살의 먹이감이 되고

명당에서 자고난 나는 더불어 좋은氣를 받았다.

 

단속사지(斷俗寺址)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마을 한가운데 단속사터를 말한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 3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에는 신충이 그린 경덕왕 초상화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없다. 또한 단속사에는 두 개의 탑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법랑(法瑯)에 이어 선종을 익힌 명필 탄연(坦然)의 비인데, 부서진 것을 수습하여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위키백과)

 

 

 

 

금당지에 지라잡은 민박집.

금당지 초석이 그대로 있다.

 

민박집 안주인은 이곳이 고향이라 어린시절 문화재청에서 발굴을 한다고 몇달동안 온동네를 뒤집고 했다고 기억한다.

할아버지께서 명문이 있는 와당을 서울의 모 대학교에 기증했다고 한다.

 

가람의 복원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니 이 유적이 경주나 대도시 인근에 있었다면 이렇게 방치되었겠나.

완전한 복원은 못해도 발굴을 하여 보존해야 하는데 어느 힘있는 정치인이 나와서 예산확보 및 노력을 해야 하는데

제 밥그릇 싸움만 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희망이 없다고...

뒤곁에 앞마당에 댓돌에 등등 유심히 보면 유구들이 온통 뒹굴고 있다.

당간지주의 규모를 보면 이 가람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운리를 나와 원정리로 가는 길목이다.

농로 사이로 덕산 곶감의 원재료인 감나무가 즐비하다.

개울에 흐르는 맑은물은 면경지수

물이 있는지 없는지 헤엄치는 물고기를 봐야 구분이 간다.

수수빗자루를 매기 위하여 물에 적시고 있다.

빗자루는 손때가 묻고 애환이 있어 종종 도깨비의 분신이 되곤 한다.

 

보라색이 예쁜 칡꽃도 만나고

운리임도를 힘들게 올라와 쉼터에서

백운계곡으로 가는길~

적당한 폭으로 잘 정비된 둘레길이다.

산허리를 휘돌아 가는 아름다운 숲길은 맑은 피톤치드와 폭신한 땅기운으로 절로 힘이난다.

소나무 숲을 지나

참나무 숲이다.

끝없이 펼쳐진 참나무 숲길은 정말 혼자보기 혼자 걷기 아까운 좋은 길이다.

적어도 둘레길이라면 이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도 덥다.

땀은 비오듯 하고 중간  간간히 꾸미꾸미로 당분도 보충하며...

덜마른 속옷도 배낭뒤에 걸었더니 뽀송해졌다

산죽군락도 만나고

알탕도 하고~~~~~

마근담 계곡을 내려오는 길은 꽤 길었다.

갈가에 늘어선 감나무는 둘레꾼의 양심의 시험지이다.

 

남명 기념관 경내에 있는 선조대왕 조의제문

조식(曺植, 1501년 6월 26일 ~ 1572년 2월 8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조식(曺植)의 자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위키백과)

기념관 뜰에있는 모감주 나무에 꽈리가 달렸다.

꽈리속은 새까만 염주열매가 익어가고있다.

말년에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산천제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450년된 남명매의 기운을 받고있다.

산천제를 둘러보며...

수원과 제천에서 오신 둘레꾼 두명을 만났다.

남명매에 대하여 무슨 심각한 의견을 교환 하는지???

산천제 안쪽 현판위에 있는 벽화다.

 

운리에서 덕산까지 이르는 제8코스는 13.1km로  4~5시간 걸리는 코스다.

이 코스는 아름다운 참나무 숲길과 백운계곡 마근담을 지나  남명 조식 선생까지 만나는 숲,계곡,역사가 어우러진 좋은 코스의 둘레길이다.

 

덕산으로 내려와 시장에서 국밥을 먹었다.

좀 피곤하니 밥맛이 없다.땀을 너무 흘려서 그런가?그래도 오후의 갈 길을 위하여 꾸역꾸역 먹었다.

여기서 중태-유점-위태까지 9.8km다.

지금부터 산천제에서 만난 두분과 동행한다.

찬물을 한병 채우고 힘차게 출발한다.(계속)

 

나의 발자국http://www.endomondo.com/workouts/76326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