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섬 이야기

용초도2 용초포로수용소 육성 증언

청풍헌 2012. 8. 12. 15:37

호두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8시경에 걸어서 용초로 향했다.

바닷가에 예쁘게 자리잡은 용호분교다.

운동장아래 큰소나무밑에는 한무리의 피서객이 쉬고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기 끊어진 쓸쓸한 어촌 학교다.

1943년은 해방전이며 69년의 역사가 있는 초등학교였다.

언덕에 방치된 폐 페인트통들...

이것이 무었인지???

선창에 있는 크레인과 시커먼 통을 보니 가두리 어장의 그물에 페인트를 칠하는 곳이다.

방오용 페인트는 환경 오염물질로 지금은 선박에도 사용을 할 수 없다.

이 페인트는 해양생물의 부착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환경 호르몬을 분비하여 생태계의 혼란을 초래하여

국제적으로 사용 금지 되었는데 혹시 방오용 페인트가 아닌지?

마을앞 어촌계에서 관리하는 가두리 어장이다.

올해 86세인 동네 어르신

작은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고 계신다.

마을의 역사와 포로수용소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보니 본인은 당시에 부산에 있었다며

수용소의 흔적을 물어보니 길따라 위로 올라가면 있다고 한다.

당산나무아래에 있는 안내판.

수용소 올라가는길 예쁜집의 정원에 있는 귀한 유리부표

유일하게 남은 포로수용소의 흔적이다.

물을 가두어 저장하는 물탱크였다.

깊이가 상당하여 고라니 새끼들이 빠져 올라가지 못하면 동네사람들이 몸보신을 했다고 한다.

집수장 아래쪽에는 포로들의 영창이 있었다고 한다.

언덕에서 내려본 작은용초마을이다.

이곳이 포로수용소의 본부였다.

선착장도 없이 바닷가에 큰 철부선을 모랫바닥으로 들이밀어 불도자및 각종 장비를 내렸으며

차들도 싣고와서 길을 내고 분주히 움직였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군배가 마을을 들어닥쳐 포수용소를 짓는다고 전답을 소개했다.

영문도 모르는 동네사람들은 인근 호두마을로 또는 친인척집으로 또는 한산도 본섬의 화포 동네 등넘어

조선소하던 자리의 멸개골에 수용을 했다.

 

큰이모님집에 왔다.

기와처럼 생긴 강판의 지붕이 붉은 집이다.

바람이 많아 담을 높이쌓아 조망은 없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고추를 말리는 좁은 마당이 온통 붉다.

사리문 밖에는 검은콩을 말리고 있다.

검정콩은 콩깍지도 검네.

하도 더워 수영도 했다.

땡글땡글 햇살에 여물고 있는 수세미다.

콩을 까고 계신 이모님(82세)옆에 앉아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 이장이 잘 모르고 용초가 무인도인가 하고  물어보니 무인도라고 해서 미군들이 밀고 들어왔다.

이장이 잘못해서 사람들이 살고있는데 들어왔다.

우리집 밑으로 콘센트를 짓고 했다.

이집은 높아서 집만 무너 트리고 나중에 와보니 구덩이에 옷을 묻어 놓았다.

당시 소개된 사람은 친인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5월달에 멸개 로 나갔다.

반이나 얼어죽은 사람도 있었다 엄청 고생을 했다.

나는 친정이 있는 호두를 가서 친정곳에서 살았다.

 

보상관련 서울을 갔는데 갈때마다 조금씩 했는데 다니는 인간들은 좀 타먹었는가 다른사람들은  일절 없었다.

 

작은 마을의 논이 본부였다.길을 딱고 차가 다니는 길 을 만들었다.

철부선에서 각종 장비들을 내려놓고 미군들이 길을  만들었다.

큰동네에는 콘센트가 여러동이 있었다.작은동네는 본부가 되어 길을 내고 사람만 오고갔다.

큰논골에 전답이 좋은곳인데 그곳에 콘센트을 짓고 악질포로들을 수용했다.

한번식 소리를 지르고 데모를 하면 뿌연가루가 나면 기척이 없었다.

데모를 심하게 했는데 호두에서 들어도 소리가 쩡쩡 들렸다. 뿌연 연기가 나고나면 조용해 졌다.

약친다고 했었다.(최루탄?)

산등성이로 가는 길로 계속가면 작은 논골 ,큰논골이 나온다.지금은 아무 흔적이 없다.

작은 마을은 본부 큰마을은 포로 콘센트 가 있다.

 

해수욕 하던곳 넘어 똥통을 묻었던 곳이 있는데 사상자(변절자)를 죽이면 똥통에 버려다.

그 밑에 가면 사람 뼈가 있었다.

악질포로들이 사상 변절자를 몰래 죽여 똥통에 넣어 지고 가서 버렸다.

 

젊은 사람들이 겁이나서  못다녔다.

특히 젊은 처자들이 군인들이 굶주려서 위험하니 일절 나오지 못하게 했다.

당시에 사고는 없었다.(추행등)

선창은 없었으며 모래사장을 대고 차를 내리고 했다.

전에 이장들 무식하여 무인도라 하여 아무 보상도 없었다.

전시라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보도연맹 가입한 사람들 구덕에 파묻었다.충렬사 넘어가는 곳 큰개 가는데 큰 굴을 파서 사람을 묻었다.

부산배 복운호에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한배 싣고와서 해거름에 나오면 총소리가 난다.

돌을 채워서 물어 넣고 나오는 사람들에 총을 쏘았다.

보도연맹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다 죽었다.

요때되어 밭을 매면 남자는 얻디려 떠밀려오고 고 여자는 배를 내고 뒤비져 떠밀려 왔다.

호두에는 영장이 안 말렸는데 용초에는 시체가 많이 밀려 영장이 썩었다.

몇년전에 개발가면 손가락 뼈가 나왔다.

발바닥이 가만 그대로 였다. 발을 두개 주워 산에다가 묻어 주었다.동네사람들이 불쌍타고 묻어 주었다.

참 무서웠다.

부산 복운호에 여러사람을 싣고 왔다.복운호는 통영-성포-부산으로 다니던 배다.

복운호가 가고 나면 총소리가 탕탕 났다.돌을 엮어 물에 빠트리면 총을 쏘았다.

보도연맹은 명단만 있으며 죽였다.시 고모집에도 좋은 청년 두명이 죽었다.

통영 사람 좋은 사람들 많이 죽었다.

증언에 의한 대략적인 위치도

이곳 큰마을에는 콘센트를 여러동 짓고 포로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용초마을의 나무벽화 앞에서

마을을 나오며...

싼판 아래에는 망상어가 유유히 헤엄친다.

오후 4시경에 오는 섬누리호는 화도 좌도 죽도 호두를 거쳐 이곳으로 온다.

즉 용초를 갈려면 아침 7시배는 행선지가 용초-호두-죽도-좌도-화도-통영이며

2시배가 화도-좌도-죽도-호두-용초 이므로 바로 나올 수 있다.

 

6.25의 아픈 흔적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용초마을 사람들.

당시의 내용을 제대로의 평가하고 그것을 널리 알려 

다시는 이땅에 그런 아픈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12.8.3 용초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육성증언 -  20120803 142521.wma← 이 파일을 클릭하셔서 '열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20120803 142521.wma
1.7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