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9회 토요걷기(통영성) 통영성 흔적을 찾아서

청풍헌 2013. 3. 25. 01:01

제9회 토요걷기 공지 합니다.

통제영의 최후 보루인 통영성을 탐방하고 강구안에서 프린지 공연을 감상 합니다.

일시;2013.3.23(토) 10시 향토 역사관앞

코스:세병관-남문-동암문(시구문)-동포루-동문-북문-북포루-서문-서포루-남암문-남문

기타:물,간식,편한신발,중식은 매식

연락처;차미옥 010-9248-5746 김용재 017-585-9319

 

통영성에 대한 기록은 1894년 통영지(갑오경장이 일어나던 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강희17년(1678 무오)에 윤천뢰 57대 통제사가 쌓았다.

산성 둘레는 7리 성가퀴가 707타,자로는 11,730자,높이 한장반.도보로는 총 2,346보이다.

3개의 연못과 9개의 우물이 있으며 미나리밭이 동암문 안에 있다.

4대문과 두개의 암문과 3포루가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리저리 홰손된 통영성을 오롯이 걸어 보고자 한발 한발이 참으로 의미있는 발걸음이다.

이 지도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통영성 지도로 카페 '옛길따라 옛길 문화 발전소'에서 발췌했다.

옛 지도를 기준으로 다음 지도에 대략 표시를 했다.

향토 역사관 입구에 있는 통영성 지도에서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통영성은 통제영의 최후 보루로 세병관을 중심으로 성곽을 조성하고

군제는 중군 1명에 천총 2명.파총 4명,치총 6명,초관 16명,의승장 1명,기패관 11명,기고 2명,서장 37명,예차 기패관 50명,도흔도 5명

표하졸 248명,친병군 2,032명,화포수 37명,의승군 34명,성하군 440명,별아병 406명으로 도합 3,367명을 운용했다.

-통영지 공해편-

 

오늘의 탐방 코스는 통영성의 정문인 남문에서 출발한다.

 

남문터(홍예문으로 청남루라 했다)

통제영 복원 사업중 하나인 남문을 복원하기 위하여 주변 주택을 철거하였다

충무교회 앞쪽이 텅 비었다

이번에 철거된 건물지에서 통영성곽이 나타났다.

주택에 파묻혀 있던 성돌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곳이 남문이 있던곳이다.

이 성돌을 기준으로 좌측인 중앙시장쪽으로 간다.

옛지도에 나타난 미전(싸전) 쪽이다.

이 성곽 앞이 옛날 장시가 열린곳이다.

장시에는 4전이 있었는데 싸전,포목전,잡화전,담배전이 있었다.

중앙시장 끝 부분에는 동피랑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의 끝 부분이 일본절이 있던 곳이다.양 기둥이 도리이를 세웠던 흔적이다.

계단을 2m정도 올라 좌측에 있는 것이 동암문(시구문)터다.

자세히 살피는 탐방객.

동피랑을 오르면 황룡 벽화 아래에는 성벽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동피랑의 정점에는 동포루가 복원중이다.

18m3의 면적에 3량가구 팔작집으로 복원하며 올 5월 12일 까지 일정으로 공사중이다. 

다시 동포루에서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내려오면 동문터에 이른다.

동문은 신흥문이라 했다가 나중에 춘생문으로 고쳤다.

동문1길 이라는 골목으로 오른다. 

동문 1길 오르는 오르막의 좌측에는 성벽이 남아있다.

고개를 넘어 김용식,김용익 생가를 지나  주영 라이프 아파트를 지으며 짤려나간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북문터를 만난다.

북문터

북문은 본시 문루가 없었는데 129대 원중회 통제사가 지으면서 '공북루'라 했다.

이곳은 북문지(연못)로 추정하여 발굴작업을 오랬동안 하다가 최근 도로가 생겼다.

정확한 북문지로서는 알수가 없었다.

북문터의 아래 성벽은 배수구의 유구가 있다

북문터의 유구에서 일직선으로 바라보면 토성고개의 도로를 가로질러 언덕에 나타나는 성벽이다.

성끝마을의 집 아래가 통영성곽이다.

계속 오르면 산복도로를 지나면 당절 법운암이 나온다.

법운암은 축사당으로 노비들이 기도를 하고 축원을 빌고 지키던 곳이다.

 

북포루로 오르는 토성구간이다.

양쪽 옆으로는 온갖 야생화가 길손을 유혹한다.

북포루

삼포루는 동,서,북의 산 꼭대기에 있었다.

강희 33년(1694 갑술)에 목림기 제69대 통제사가 처음으로 세웠다.

통영지 공해편

 

 

오늘 토요걷기에 참여하신 고마운 분들이다.

사방이 탁트인 문루에 올라서 간식을 먹는다.

땀 흘리고 먹는 간식은 꿀맛이다.

다시 우측으로 내려오는 구간은 토성구간이다.

중간의 삼나무밭으로 천천히 내려온다.

원래 성벽 구간은 대나무 밭으로 길이 없으며 문화빌라 언덕의 옛 호주 선교사 집터 쪽으로 내려와 약간 아래로 내려온다.

복원된 성벽과 일직선으로 바라보면 목공소 옆 골목에 있는 성터다.

복원된 성터에서 바라본 목공소와 문화빌라쪽.

이곳이 서문터이다.

서문은 제144대 신응주 통제사가 고쳐 짓고(1790) 금숙문이라 했다. 

문화 배수지 옆으로 복원된 성곽을 따라 오르면 구 성벽이 나타난다.

구 성벽과 새로 복원된 성벽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성벽돌의 크기에서 부터...

완공된 서포루의 모습

서포루를 지나 아래로 내려서면 최근 성곽의 유구를 발견한 곳이있다.

복원된 성곽과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리면 정확히 일치한다.

차후 복원을 위하여 유구를 발굴 했었다.

남새밭을 지나 벼락당을 거쳐 내려온다.

담벼락으로 변한 거대한 성벽이 나타난다.

골목길과 함께...

남암문터.

남암문은 항시 잠겨 있었다고 한다.

미륵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하여 미륵산정에 항아리를 여러곳에 묻고 남암문은 항시 잠가 놓았다고 한다.

옛 성벽틈에 민들레도 피었네~

이 성벽은 골목길로 인하여 짤리지만 아래쪽으로 이어져 흔적이 있다.

우체국 주차장 뒤편의 성곽흔적이다.

 

이 성벽은 아래로 이어져 남문에 이른다.

다시 남문터에 왔다.

통영성의 주 도로인 세병관에서 남문을 지나 선소까지의 복원을 위하여 옛건물을 철거중이다.

현재 철거중인 건물도 몇 백년 후면 그것도 역사가 된다.

지금의 남문터 옆의 봉래극장만 보더라도 그렇다.

보존을 할 수 없다면 기록이라도 정확히 하여 자료를 오픈하고 후세에 참고 하도록  해야한다.

 

통영성은 방위개념의 산성으로 산성중군이 1년에 한번씩 성조(산성방위 훈련)를 했다.

성조는 성조홀기에 의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주조(주간훈련)와 야조(야간훈련)를 했다.

군점과 수조는 1년에 두차례 실시 하는데 춘조는 삼도의 수영이 모여 군점과 수조를 했으며

그때 성조도 실시했다.통제사가 군점 및 수조로 인하여 훈련중일때는 산성중군이 주장을 했으며

수조를 마치고 통제사가 돌아오면 통영성에 친히 임하여 야조를 거행 하였다.

그 절차는 성조 홀기에 준하여 실시 하였다.

 

"장원기향적다방 적근각병대함공타적패"

"만약 적이 멀리 있으면 적을 향해 화기를 많이 쏘고 적이 가까이 오면 큰 소리로 고함치며 돌을 내리 쳐서 적을 무찌르라"

(이에 해당 방면의 유병들은 재빨리 응원하러 나간다.해당면에서 적이 100보안에 이르렀음을 보고하면

불량기와 조총을 일제히 쏠 것을 호령한다.또 적이 50보 가까이 왔음을 보고하면 사수는 일제히 화전과 화살을 쏠 것을 호령한다.

한편 창부는 모두 성가퀴에 나와서 공격을 준비한다.이어서 명라뇌고가 울리고 적이 성 아래에 이르렀음을 보고하면 성위에서

큰소리로 "와!!하고 외치며 일제히 돌을 내리쳐 공격한다.그리고 적을 패퇴 시켯음을 보고한다)

-통영성 성조연구 논문에서(김일룡 소장님)-

 

탐방을 시작하며 오늘은 성조를 하기 위하여 통제영 친병인 좌,우병사가 사전에 성벽을 점검 보수를 했었는데

우리가 좌우 병사가 되어 성벽의 흔적을 찾아서 기록하고 알리는 역할을 하자고 했다.

우리 삶의 터전에 옛 통영성이 있다는걸 잊고 살았는지 모른다.

성벽 아래 위로 집이 들어서 복원을 할 수 없다면 현존하는 성벽이라도 보존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꾸준히 확인하고 걸어주고 공론화 시키는 역할을 해야한다.

그 일을 통영인뉴스와 통영길문화연대에서 매월 첫째주 금요일 하고있다.

토요걷기를 해보니 그 일이 참으로 중요함을 느꼈다.

(미진하여 일요일 다시 찾아서 한바퀴 돌았다.)

 

2013.3.23.통영성 한바퀴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