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진주 박물관 통영 특별전2 삼도수군통제영

청풍헌 2013. 7. 28. 10:27

3.삼도수군통제영!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경상 전라 충청수영의 지휘계통의 일원화를 절실히 느낀조정에서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통제영을 만들어 그 초대 통제사에 이순신을 제수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시절 한산대첩을 이루고 한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산도에 통제영을 열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한산도 본영이 불타고 통제영이 이곳저곳으로 옮기다니다

1604년 두룡포(통영)에 정착 하였다.

1605년 세병관을 짓고 실질적인 업무를 시작 하였다.

통영의 통제영 시절은 두룡포기사비에 상세히 기록되어 전한다.

 

즉 1604~1895까지 291년간 통제영이 있었으며 그로부터 오늘날 까지 409년의 세월이 흘렀다.

통제영에는 통제사의 지휘아래 중군 이하의 여러 군관과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자체적으로 둔전을 경작하여 통영곡을 확보 했으며 상평통보를 주조 할 만큼 독립적인 지휘를 보장 받았다.

그 결과 통제영은 군사적 경제적 중심으로 발전하여 다양한 문화가 발달 하였다.

 

언제 보아도 위풍당당한 세병관 모습.

중앙의 높은부분은 전폐단으로 임금님를 뜻하는 전폐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망궐례를 올렸던 객사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학교로 쓰였다.

대부분의 지방 객사가 같은 운명에 처했다.

본래의 유허비옆에 다시 고종 14년(1877) 통제사 이규석이 새로 유허비를 세웠다.

유명수군도독조선국증선무공신여의정덕풍부원군행삼도통제사시충무이공순신한산도제승당유허비

제승당에 관한 자세한 포스팅은 http://blog.daum.net/backsekim/221

 

 

충렬사에 보관중인 명조팔사품.

충렬사 전시실에는 모조품을 전시하며 이곳에는 진품이 진열되어 자세히 살폈다.

 

명조 팔사품이 언제 어느 경로로 전달 되었는지?

또는 어떤 의미로 전달 되었으며 당초에는 통제사의 의장품으로 사용하다가 어떤 경로로 충렬사에 보관 하였는지 궁금하다.

 

팔사품은 보물 440호로 보호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신종 황제가 이순신장군의 뛰어난 무공을 기려

하사한 유물이다.도독인,영패,귀도,참도,독전기,홍소령기,남소령기,곡나팔이 있다.

 

도독인:도독인을 넣은 외함과 내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함에는 황조 어사인이라 쓰여있다.

          도독인에는 관방 이라는 글짜를 아홉번 꺾어 새겼다

호두령패:팔각형의 나무에 '대장''영'을 세기고 사슴가죽에 표범 그림을 그린 주머니에 넣어 보관 했다.

귀도:용머리와 귀신 머리로 장식된 칼

참도:칼자루는 상아껍질로 싸서 붉은 칠을 한 다음 소가죽으로 감았다.

       칼집은 나무로 만들고 쇠가죽으로 싸서 붉은 칠을 했다. 

곡나팔:구리로 만들어졌다.

독전기:지휘관이 전투를 독려하기 위하여 사용한 깃발이다.

          "무릇 군사로써 적진에 임하여 명령에 복종 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는 뜻이다.

홍소령기: 군대의 명령을 전달 할 때 쓰는 깃발

남소령기:상동

 

이운룡(1562~1610)은 임진왜란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적선 50여척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 되었으며 선조38년(1605)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통제영을 건설 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그는 이순신의 충절을 기리는 충렬사를 건립 하였고 전선을 건조하는 등 통제영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제령이씨 지암종중 금호서원 소장품인 선무원종공신록과 삼도수군통제사유서가 있으며

제령이씨 문헌공파 청도문중 소장품인 거영일기(통제사 재직시의 일기)와 계본등록(조정에 올린 장계)이 있다.

또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사 선생안이 있다.

선생안은 역대 통제사의 품계와 재임기간 중요업적 등을 기록한 책이다.

 

 

이 텍스트에 1648년 3월부터 1650년 1월까지의 통제사는 누락되어있다.

즉 제35대 김응해(1646.3~1648.3) 제36대 유정익(1650.1~1652.8)으로 기록되어있다.

누락된 기간의 통제사는 변사기라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http://blog.daum.net/backsekim/334

이 선생안도 기록할 당시의 여건이나 시대상을 추론해 보면 왜 기록을 누락 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한번 기록한 텍스트가 별다른 검증없이 대대로 이어져 온 경우가 있다.

 

통제영에서 군대 유지를 위한 자금의 확보를 위하여 직접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했다.

화폐를 발행 할 만큼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 했다는 뜻이다.

상평통보를 주조한 기록은 비변사등록,조선왕조실록,승정원 일기에 있다.

▲ 선무원종공신록

▲계본등록

▲거영일기

▲삼도수군통제사 선생안

▲상평통보

▲수군조련도

 

임진왜란 당시의 화포에 대하여 알아보자.

화포는 천天,지地,현玄,황黃을 따라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의 크기로 구별되며 대완구가 있다.

각 화포에는 단석(작은 돌)이나 비격진천뢰(시한폭탄), 조환란(새알 크기의 돌)을 장착하여 쏘았다.

 

대포는 판옥선 척당 한쪽에 10문씩 천자 1문,지자 2문,현자 4문,황자 3문 이라면

천자총통:대환 1개,대연자 100개(연자환은 납으로 만든 조란환보다 두배이상 큰 납환)

지자총통:종환 1개 중연자 60개 2문 120개

현자총통:소환 1개 소연자 30개 4문 120개

황자총통:소환 1개 소연자 10개 3문 30개

포알의 발사량은 약 370개이며

20척이 동시에 발사하면 7,400개의 돌공이나 쇠공이 비오듯 솟아져 적선을 걸레로 만들었다.

 

(천자총통 1발 발사 모형도)

 

비격진 천뢰는 대완구에 장착하여 발사하는 일종의 파열탄이다.

포탄의 폭발 시간을 조절 할 수 있는 무기였으며 인마 살상용으로 사용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왜구를 향하여 비격진천뢰를 쏘아 적진에 떨어지면

이상한 쇠덩이가 날아와 신기하여 보고 있는데 폭발하여 때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飛(날 비)激(부딧칠 격)震(벼락 진)天(하늘 천)雷(우뢰 뢰)

 

▲ 황자총통

▲천자총통

▲대완구

▲비격진천뢰

▲대환

 

통영의 중심은 통제영이다.

모든 행정 군사 산업이 통제영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이어져 나갔다.

 

                                                                                                          통영의 기상기구 측우대(도록에서)

통영 측우대                                                                                                                 

1800년대부터 지방의 측우기 관측망 확대로 인해 통영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1800년대 후반부에는 고성의 우량 관측이 보고된 기록이 나온다.

 

조선

43.8*43.8*44(명문석)

보물 제1652호

국립중앙과학관 소장

통영에서 발견된 사암재질의 측우대다.

제작년대는 신미 이월 일로 순조 11년(1811) 또는 고종 8년(1871)으로 추정된다.

제작연대가 확실하게 명기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집에와서 도록을 살펴보니 통영 측우대를 보지 못했다.

분명 3바퀴를 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소장 기관의 보이지 않은 알력에 의하여 대여불가로 도록에만 있는 유물이 되었다.

 

2013.7.14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