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미륵산의 제일 도량 용화사 탐방

청풍헌 2013. 9. 20. 23:04

용화사,용화사수원지

몇주전 지인으로 부터 한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영수의 통영 찾아보기 "아하,그래서 이렇구나!"하는 책이다.

이책을 정독하니 수차례 지나쳤던 통영의 문화재가 내가 알고있는게 다가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은 미륵산의 절집 용화사를 자세히 알아 보고자 한다.

 

용화사는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때(서기 632~646)은점화상이 처음 절을 세우고 '정수사'라 하였는데

1260년 산사태로 절이 무너져 3년뒤 자윤,성화 두 스님이 옮겨짖고 절이름을 '천택사' 불렀다고 한다.

('정수사' 자리는  용화사 짓기 13년전 청안, 담찬 두 스님이 관음전을 세웠다고 함)

이후 1628년 큰 불이나 다시 벽담선사가 지금의 자리에 다시짓고 '용화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름은  정수사-천택사-용화사라는 이름으로 변천 되었으며

장소는  정수사(현 관음전 자리)-천택사(?)-용화사(현재)로 변천 되었다.

건립자는 은점화상(정수사)-자윤,성화스님(천택사)-벽담선사(용화사)이다.

 

용화사 광장의 나무에 있던 오래된 돌무더기는 치워진지 오래고 나무 위로 오르내리던 청설모는 깊은 산중으로 이사를 갔다.

 

'나무아미타불'                                                                                     

[불교] 아미타불에게 돌아가 의지한다는 . 중생 깊은 믿음 표현한 이지만, 자체 주문 가진 공덕 크다고 한다.

나무(@)’ 산스크리트 나마스(Namas)’ 음역어이.(국어사전)

나무아미타불 표석을 지나 올라가면 우측편에 테크가 있다.이곳은 활터가 있던곳이다.

군사도시답게 곳곳에 활터가 있었다.사정은 한량의 놀이터이면서 무예를 익히고 사냥을 위한 교류장소의 역할을 하였다.

 

데크를 따라 오르면 용화 수원지가 나온다.

용화 수원지는 통영성의 9정 이후에 일제 강점기 이주한 일인들이 물이 모자라 이곳 용화사 아래에 수원지를 만들었다.

1922년 5월에 착공하여 1924년 3월에 준공 문화동 배수지로 보내 일일 542여톤의 식수를 생산했다.

지금은 사용을 않아 물이빠진 바닥에는 문어단지같은 시멘트 구조물이 있다.

자연 수림이 우거진 산책길을 따라 용화사에 이른다.

 

▲나무아미타불

▲용화 수원지 가운데 있는 시멘트 구조물(요놈이 무었일까?)

▲용화사 가는 산책로~

 

해월루,용화사사적비,불사리4사자법륜탑

용화사 입구는 해월루의 옆으로 계단이 있다.

해월루는 원래 문루로써 용화사의 입구가 있던 건물인데 원래 문루는 출입구와 누각의 구실을 동시에 했다.

천택사의 화재로 용화사가 건립되고 미륵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하여 해월루 입구에 연못을 조성하고 옆으로 입구을 내지 않았나 생각된다.

통영성을 건설할때 미륵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하여 항아리를 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군의 남쪽 10리에 있으며 곧 군치의 안대봉이다.영을 설치한 처음에는 물을 묻는 항아리가 많았으며 화살(화산의 살기)의 기를 누르기 위해서다.위에는 봉대가 있고 아래에는 한 절과 두 암자가 있고 등림하면 대마도를 볼 수있다]-통영군지2권 산천편-

 

입구를 들어서서 우측에 서있는 8각형의 큰 비가 있다.이는 미륵산 용화사 사적비다.

용화사의 창건유래를 소상히 적어 놓았는데 아래 귀부는 4마리의 거북이 조각되어 있으며 비신은 8각형의 오석이고

이수는 9마리의 용이 용트림을 하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가운데 용은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다.

 

그 옆에 불사리4사자법륜탑이 있다.이 탑은 형식이 전혀 다른 탑이다.

신라의 형식이 아닌 '아쇼카필라'양식의 원주형 석탑이다.

아쇼카 양식은 부처가 열반한 뒤 인도의 마우랴 왕조의 아쇼카 왕이 인도 전역에 세운 원기둥 돌탑을  '아쇼카필라'라고 한다.

일각 스님이 인도 유학길에 태국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 7과를 받아 1979년 이 탑을 세우고 봉안했다고 쓰여있다.

 

▲용화사 산문

▲해원루(앞에는 연못이 있다)

▲용화사의 창건 연혁이 자세히 기록된 사적비

▲사적비 이수(용 9마리가 용트림 하는 형상)

▲불사리4사자법륜탑

보광전,명부전 시왕목상

용화사의 금당인 보광전은 도지정 유형문화제 제249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구조의 맛배지붕 건물이다.

보광전 앞에 있는 당간지주는 절의 큰 행사시 괘불탱화를 거는 장대를 거치했던 곳이다.

안정사 괘불탱화는 가로 10m 세로 12m 나 되는 거대한 그림인데 이를 세우는 장대도 크야 했다.

(세병관 앞뜰에 있는 기삽석통은 통제사를 상징하는 수帥자기를 세웠던 곳이라 한다.)

 

"명부전의 시왕목상"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었인지 잘 모르는곳이 명부전에 있다.

명부전 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4호로 지정된 목조지장시왕상이 있다.

즉 나무로 조각된 지장보살과 10분의 시왕이 있다.(지장보살은 미륵불이 이 세상에 올때까지 중생을 제도 한다는 보살)

 

지장보살의 좌우에 서있는 목상은 지장보살의 좌우보처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다.

양쪽의 의자에 앉아있는 목상은 명부를 맡아 다스리는 10명의 시왕이다.

그 앞에 서있는 작은 목상은 시왕을 모시는 동자상으로 하나가 없어져 9상이 있다.

다음으로 왕을 대신하여 심판하는 판관이 2명,문서기록을 맡은 녹사가 2명,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하는 사자가 2명, 문을 지키는 신장이 2명

이렇게 지장보살과 총 29체의 목존상이 있다.10명의 시왕은 제1진광대왕, 제2초강대왕, 제3송계대왕, 제4오관대왕 등등이다.

 

이 목불들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소재했던 영은사가 폐사되며 1903년 용화사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용화사 사적기를 볼때 1680년경(숙종9년)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을 지키는 신장의 왕방울 눈은 사천왕상을 닮았다.

이 불상이 목상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9호 보광전

▲괘불탱화를 거는 장대를 세우는 당간지주대

▲명부전

▲중앙의 지장보살과 좌측의 도명존자와 시왕들

 

 

▲서있는 판관, 녹사, 사자와 동자승들

 

 

▲지장보살의 우측에 있는 시왕과 판관, 녹사, 사자

 

▲문을 지키는 신장

▲신장

▲동자

▲동자

용화전

명부전 다음 건물이 용화전이다.

용화전 현판을 자세히 보면 성파星坡라는 글귀가 보인다.

거제 출신의 성파 하동주(聖坡 河東州, 1879~1944)는 거제사람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가장 잘 쓰는 당대의 명필 이었다.

용화사, 안정사, 옥천사, 영남루, 촉석루등에 글씨가 있다.

용화전과 종루가 추사체인 성파 하동주의 글씨이다. 

▲용화전 현판(성파 하동주의 글씨)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

종루와 범종

용화사 범종은 종루에 매달려 있다.

종루는 장대석의 기단위에 팔각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범종은 신라양식의 범종이다.신라 양식의 범종이 가장 깊은 울림을 내며 거의 완벽한 종소리를 내는 발명품이다.

 

즉 용뉴(종을  매다는 부분)와 종신(몸뚱아리) 종구(종의 입)로 나뉘는데

용뉴는 용두와 음통으로 이루어져 품위를 높이고 잡음을 걸러주는 놀라운 발명 장치이다.

종신은 종의 윗 테두리인 상대,아랫 테두리인 하대가 있으며 4개의 도드라진 부분인  유곽이 있으며 각 유곽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

종복이라고 하는 배가 불룩한 부위에는 각종 명문이 쓰여지고 돌아가며 부처님과 보살이 있고 종을 타종하는 위치인 당좌가 두곳 있다.

타종기는 목어로 되어 있으며 종구 아래는 울림통인 명구가 있다.

 

신라 범종은 종소리가 맑으며 잡음이 없고 여운이 뚜렷한 맥놀이가 있다.

맥놀이는 종을 쳤을때 타음과 진동 여운이 있는데 1분 이상 지속되는 여운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여 길게 여운을 가지는 현상이다.

즉 음통,당좌,유곽,유두,비천상 등의 적절한 배치와 구리와 주석의 완벽한 배합에 의하여 맥놀이가 이루어지는 신라종이 된다.

그래서 신라 범종이 세계 최고의 종이 되었다. 

 

▲종루(성파의 글씨)

▲종루

▲용화사 범종

▲종을 매다는 용뉴와 유곽의 9개 유두

▲목어 형태의 타종기

 

효봉석상과 부도전

효봉스님은 한국불교계의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었다.

일제 강점기 평양복심원의 판사로 재직시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날 며칠을 고뇌하다가 엿판을 들고 팔도를 종횡무진 유랑했다.

금강산 신계사의 석두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출가 하였다.

이후 6.25때 부산에서 통영으로 오시어 용화사 도솔암과 토굴에서 안거했다.

1962년 불교계의 초대 통합종정으로 추대되어 계시다가 1966년 밀양 표충사에서 앉은채로 열반 하였다.

스님의 제자로 법정스님과 구산스님 일초스님(고은시인)등이 있다.

▲효봉석상

▲엣절터의 기둥돌

▲효봉스님 사리탑

 

미륵산의 자연

꽃무릇이 화려하게 핀 부도전 앞과 관음암 입구이다.

부도전에서 관음암 오르는 데크 주위에는 희귀종인 새우난 군락지가 있어 데크 작업시 논란이 있었다.

이식하여 몇년간 모니터링 하는걸로 결론이 나서 이식되어 있었다.

청설모와 딱다구리, 원시림이 존재하는 미륵산 용화사 주위는 훌륭한 휴식처를 제공 하였다.

▲꽃무릇 군락지

▲청설모

▲새우난 이식지

미륵산의 수도 도량 통영 용화사를 좀더 깊숙히 들여다 보았다.

성파 하동중 글씨도 보았고 명부전 시왕목상도 알았다.

효봉스님의 생애도 살펴 보았으며 통영 불교의 변천사도 더불어 알게 되었다.

과거에 용화사가 있었다면 현재의 용화사도 있으며 미래의 용화사도 어떻게 변해 있을까 생각해본다.

 

2013.9.17 가을을 기다리며 용화사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