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22회 토요걷기(귀신잡는 해병대 길) 돌격 앞으로! 원문고개를 사수하라~~~~~~~~~~~

청풍헌 2013. 11. 11. 22:43

제22회 토요걷기 공지 합니다.

한산대첩은 조선을  구한 전투이고 해병대 통영상륙 작전은  한국을 구한 전투였습니다.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명칭을 얻은  해병 호국의 길을 답사 합니다.

일시:2013.11.9(토).10시 구거제대교 입구(원문공원에서 9:30 일부 이동 합니다)

코스:견유 해병 상륙지-원평-적촌-두타사-음촌-신리-대안-원문 해병대기념관(10.8km / 3시간 30분)

기타:편한신발,도시락,물,간식

연락처:김용재 017-585-9319

전화,문자,댓글로 신청 바랍니다. 

 

 

오늘은  해병대 호국의 길을 걷기 위하여 우리는 구대교 입구에 모였다.

구대교는 거제와 통영을 잇는 다리이며 여러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견내량은 과거와 근세에 까지 육지와 거제를  연결 하는 요충지로 많은 역사의 기록에 등장했다.

고려 의종왕이 정중부의 난을 피하여 둔덕 기성으로 귀양 왔다하여 임금이 건넌 "전하도"란 지명도 있으며

임진왜란시 와카자키의 공명심에 의한 단독 출전을 사전에 감지한 이순신 장군이 한산 앞바다로 유인하여

전세를 역전시킨 역사 깊은 견내량이다.이후 통제영 에서는 한산도에 있던 유방을 이곳으로 이전하여 매년 풍화(4~9월)시 

우후가 이곳을 방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방영

영의 동쪽 20리 견내량에 있으니 좌우 연안으로 왕래하는 선박을 검문하는 곳이다,.건륭19년(1754갑술)에 조동점 제115대 통제사가 계문에 따라 제승당에서 방영을 옮겨와 퐁화시에는 우후가 유방장으로 나아가 방어하고 풍고시에는 철수한다.배를 점검하는 일은 유방장이 겸하고 신창감은 명령대로 시행한다.,부속 아사는 건륭20년(1755을해) 우후 이우평이 처음 세웠다.서해정,대변정,군관청,장관청,무사청,진무청,사부청,하포청,군뢰청,취수청,사공청등 이와같이 함께 설치 되었다.  -통영지 공해편-

 

▲구거제대교 입구에서 지원군과 함께

▲견유마을에서 발견한 장어 대통발

 

 

견유마을은 견내량 유방의 합성어이다.이곳 횟집 수족관의 생선이 맛 있다는 소문이 수달에 까지 퍼져

매일 밤손님으로 수달이 다녀 갔다고 "TV동물농장"에 방송 되었다.

수달은 건너편 거제의 오량 저수지에 서식하는 수달이었다.

수달과 공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해병대처음상륙한곳 이란 커다란 표석이 우뚝 서있다.진입로는 흙더미로 울툴불퉁 하며 안내표시도 없다.

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오고가는 휴계소인데 최소 안내판 하나라도 설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베어난다.

이곳에서 박한동님을 만나 함께 행동했다.

기록된 전사를 기준으로 대략적인 설명과 우리가 가야할 2중대의 길을 짚어 보았다.

 

 

 이곳 어디쯤에 11채의 아사衙舍가 있었을 것이다.옛지도에 표시된 건물은 선명히 나타난다.

14번국도 지하 통로를 지나기전 굴뚝같은 구조물이 궁금하였다.

이곳으로 자주 운동 하시는 박한동님이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예전 담배잎 말리던 곳이라고 했다.

특이한 건출물이다.아무도 없어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해안길은 비릿한 냄새가 풍기고 푸른 바닷물이 넘실 거리는 안구가 정화되는 길이다.

 

▲수달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해변과 건너편 거제가 보인다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 표석이 우뚝 서 있건만!

▲이곳 어디에 유방의 아사가

▲요상한 구조물

▲밤개마을의 옛 선착장은 선소를 연상케 한다.

▲파키스탄 노동자와 악수를 ~

▲배흥안 어른의 6.25 참전기를 듣고

 

 

논싯골에서 대방포로 가는 길은 공동묘지로 가는 산길이다.

지난번 탐방시 멧돼지 자국과 고라니를  세마리 만났다.

멧돼지와 고라니 이야기를 했더니 일행들은 머리가 쭈볏 거린다며 바짝 붙었다.

이 길은 호젓한 산길이며 혼자 다니기는 좀 무서운 길이다.

대방포에서는 생강을 수확하는 사람은 만나 그곳에서 생강을 구입했다.

좀 있으면 김장철이라 생강이 필수 양념이다.현장에서 구입하는 농산물은 믿을 수 있으며 싸게 살 수 있어 좋았다. 

 

 

대방포를 넘어 양촌의 원두막 쉼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날씨가 흐려져 비가 올려는지 쌀쌀해졌다.

서둘러 길을 나서니 비가 흩날렸다. 쉬지않고 걸어서 원문고개를 접수했다.

원문 고개를 사수하라!

▲논씻골로 접어들며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산길로

▲바위 산에서 자라는 다육이 종류의 꽃

▲낙엽과 단풍과 각종 열매가 익어가는 호젓한 산길을 내려온다

▲한 봉지에 만원하는 생강을 사고

▲좀 더 주세요! 흥정도 하고

▲한때 대학 나무로 통했던 유자가 향기를 더해간다.

▲대안마을의 노거수는 당시 진군하는 해병대를 기억 할 것이다.

 

8월 16일 밤10시 거제도 서남쪽의 적의 상륙을 저지 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진해를 출발하여 지도 동남쪽에 정박을 하였다 

17일 2개의 수색조를 운용하여 적정을 살핀 결과 넓은 지역을 방어 하기보다는 상륙하여 공격 탈환후

원문 고개를 사수 하는게 유리하다 판단되어 703함의 이성호 함장과 협의후 3번의 요청으로 작전 변경 승인을 받고

저녁 야음을 틈타 20여대의 통구미에 박격포와 포탄을 싣고 살금살금 장평리로 향했다.

칠흙같은 어둠은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500여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륙 하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밤11시경에 상륙을 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민간인들을 동원하여 지게와 구루마등을 이용하여 분덕골에 집결 하였다.

비장한 결의로 각 중대별 임무를 다시 한번 다지고 2중대는 원문고개를 점령 하기 위하여 원평리로 향했다.

 

 

18일새벽 우리가 적촌을 거쳐 음촌으로 가는동안 703함과 소해정에서 포격을 퍼부었다.밤새 포성이 진동을 하였다.

우리의 상륙을 위장 하기 위하여 적의 눈을 돌리고자 703함의 이성호 함장과의 사전 약속 이다.

그래도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정찰대를 앞세우고 원문고개를 향했다.

3중대와 7중대의 근황이 궁금했는데 마침 무전이 왔다.

7중대는 매일봉을 점령 했으며 3중대는 여황산을 점령 할려고 하니 적의 반격이 매우 심하여 주춤거리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모든게 계획대로 움직여 준다.

 

 

원문 고개는 예나 지금이나 약 1km의 가는 목으로 이곳만 틀어 막으면 인민군의 추가 집입을 막고

보급품을 차단하여 독안의 쥐로 가두어 사살 할 수 있다.

아군의 생명을 보장하는 중요한 전투다.목숨을 걸고 사수하라!

새벽에 도착하여 높은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여 박격포와 총을 거치 할 수 있도록 배치를 했다.

인민군들이 이곳 원문 고개를 통과하여 시내를 진입 하여 시내를 분탕질 하고 있으므로 원문 고개는 무사히 점령 했다.

날이 밝아지니 긴장감이 더했다.좌우 사주 경계를 하고 있는데 시내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렸다.피아간에 치열한 교전이 있는듯 하였다.

 

이날(18일) 시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3중대가 맡은 여황산은 충렬사 뒤편의 적들의 저항이 완강하여 고전 하고 있었다.

그때 자갈길에서 트레일러를 단 소련제 지프 소리가 들렸다.인민군 군관들이  타고오는 지프였다.

일제 사격을 가하니 타고있던 인민군들이 꼬꾸라지고 지프는 논구덩이에 쳐박혔다.

살아있던 인민군은 날살려라 도망을 가고 지프와 각종 무기를 탈취했다.

본부에 무전을 하여 지프의 노획을 보고하니 김성은 부대장이 이동수단이 없었는데 전용 차가 생겼다.

하루의 전투로 인하여 탄약이 거의 바닥이 났다.

해군에 보급품을 공급받기 위하여 불필요한 사격을 금지하고 보급품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에 매일봉뒤 동남쪽에 상륙한 보급품이 분배되었다.

 

 

19일 7중대는 매일봉에서 내려와 시내를 점령했다.남은 잔적을 소탕하고 3중대는 충렬사 뒤의 적과 교전했다.

전세는 완전히 우리의 뜻대로 되었다.승리를 장담하고 충렬사에 승전을 보고하는 참배를 했다.

오후 세시쯤 우리 중대가 지키는 원문고개에 집중 포탄이 떨어졌다.원문을 점령하기 위한 인민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5시쯤 7중대가 합류를 했다.우리 중대(2중대)는 원문의 우측(죽림만)을 맡고 7중대는 좌측(북신만)을 맡았다.

밤 11시쯤 인민군의 대 부대가 개미때처럼 쳐들어왔다.

총을 쏠 수 없는 거리였다.M1소총에 대검을 장착하고 해병대의 기질을 발휘하여 백병전이 벌어졌다.

우리 해병대는 징집당시부터 체격과 근성이 있는 사람을 뽑아 싸움이라면 한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들은 다시 물러갔다.이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전사를 한 군인은 고종석 하사였다.

새벽에는 퇴각하는  인민군 80여명을  7중대가 포로로 잡았다.

 

9월 20일 까지 약 1달간  9번의 공방이 있었다.

도산면의 도산초등학교에 본부를  둔 인민군들은 양지마을의 바위굴에 진지를 구축하고 원문을 점령하기 위하여 수시로 공격을 해왔다.

하지만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의를 상실한 인민군의 퇴각으로 원문 전투는 끝났다.

이 전투로 인하여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노획한 야포와 중화기 차량 등이 있었다. 

9월 23일 전과를 보고하는 자리에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가 귀신이라도 잡겠다는 기사를 타전해

한국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으로 호칭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시바삐 원문을 점령하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잘도 간다.

▲드디어 진지를 점령하다.

▲출발은 7명이었는데 5명만 참배를 ...

 

 

원문고개에 무사히 도착하여 기념탑에 참배 했다.

상륙지를 나설때는 7명이었는데 5명이 참배를 했다.

2명이 전사를 했는가???

 

 

 

해병 호국의 길은  의미있는 길이다.

한산대첩으로 왜군을 물리쳐 조선을 구한 전투는 360년후 또다시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해병대가

풍전 등화인 한국을 구한 전투였다.

 

 

2013.11.9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