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길 이야기

3월 통영성길걷기 (통제영 블랙박스는 어디에?)

청풍헌 2014. 3. 9. 23:21

한동안 끊어졌던 통영성길 걷기가 지난 정기총회를 계기로 다시 이어졌다.

통영길문화연대와 통영인뉴스와의 협력 사업으로 통영성길을 다시 걷게 되었다.

통영성은 통제영이 폐영된후 여러 이유로 훼철되어 사라졌다.

성돌은 이리저리 뜯기어 다리 공사에 남의 집 축대로 담장으로 이동되고 없어졌다.

성벽을 벽채삼아 피난민들과 영세민들이 달동네로 산먼당으로 올라와 살던곳에 지금의 성벽이 남아있는 유적이 되었다.

 

당시의 통영성은 높이 4.6m 길이 3.6km 4대문과 2암문 3포루가 있는 영성이었다.

오늘 그 흔적을 따라 통영의 역사를 알아보고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제대로 하는 것인지 따져보기로 한다. 

▲산성청

 

망일루 지나 좌측에 들어선 건물이 산성청이다.

산성청은 산성의 중군들이 지키는 곳. 지과문 바깥 서쪽에 있다.(오횡묵의  함안총쇄록 1889)

산성청은 통영성을 지키던 산성 중군이 근무했던 곳으로 강희 무자년(1708) 오중주 통제사가 처음 세웠다.(통영지統營志 공해편 1894)

산성청에는 수성중군 1명, 천총 2명, 파총 4명, 기고관 2명, 기폐관 2명, 치총 6명, 친병초관 16명, 성정군 440명,친병군 2,034명,

표하졸 248명, 대기수 47명, 의승군 34명  도합 3,440명이 있다.(통영지統營誌 공해편 산성청 1895)

 

통영지(1894) 공해편에는 산성청은 강희 47년 (1708 무자)에 오중주 제82대 통제사가 처음 설치 했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현판에는 숙종44년 1718년에 건립 되었다라고 했는데 이는 오기인가?

▲1900년대부터 1975년까지 세병관의 모습

▲통제영 복원후 모습

▲두룡포 기사비는 통제영을 옮긴 이경준 통제사의 치적을 기록한 비다

▲번역본 

 

두룡포 기사비에는 통제영을 여기로 둔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두룡포가 옳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한갖 여우와 토끼가 뒤놀던 어촌인데 비로소 공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서쪽으로 판데목에 의거하고 동쪽으로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 넓은 바다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 천혜의 요지였다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앝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였다.

 

그래 이 비석이야 말로 통제영의 블랙박스다.

당초 이 비석은 병선마당 수항루 근처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며 아랫부분은 글자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다고 했으나

창원대도호부사를 지낸 박홍미의 관포선생문집에 비문이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번역이 가능했다.

 

<頭龍浦記事碑〉는 昌原 府使로 재직 중인 1625년에 지은 것으로, 李慶濬이 三道水軍統制營을 두룡포에 설치한 치적을 기록한 것으로,

현재 통영시 문화동에 碑가 보존되어 있다.(한국고전종합DB 관포선생문집)

 

▲세병관 뜰에 휘날리는 수자기帥字旗

▲세병관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김상현님

▲세병관 성역화 작업시 축대에서 발견된 석인상

▲출토된 석인 다섯기에 오방기를 세웠다.(청룡기, 백호기, 주작기, 현무기, 황룡기는 없음)

 정확히 고증이 않된 상태에서 오방기를 세웠으며 그도 구멍을 메워 원형을 훼손했다.

 

▲운주당내 좌측

▲명조 팔사품을 모방해 놓았다.

▲운주당은 통제사 집무실로 좌우에는 명조 팔사품을 거치하여 통제사의 위엄을 갖추었다.

 

세병관 단청작업부터 발굴된 석인연구와 운주당 크기까지 우여곡절 끝에 통제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개관을 했다.

번듯한 하드웨어는 완성 되었으나 그 속에 들어갈 소프트웨어가 문제다.

민관이 힘을 합쳐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싯점이다.

▲태평성당은 통제영 영노청에 세워진 일본절 동본원사 건물에 들어섰다.종탑에 있는 종은 프랑스에서 온것이라고 한다.

▲성벽에서 북신동을 바라보고있는 탐방객들

▲북포루에서 바라본 통영항

▲서포루 전경

▲서문터

▲서포루 가는길에서 본 통제영 뷰 포인트

▲일본식 석축의 형태가 남아있다

 

북포루에서 내려오는 길은 토성 구간이다.

이 길은 토성으로  내려오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에 나오는 굿당 옆으로 내려온다.

본래의 성벽길을 찾아 걷고싶다.

호주 선교사터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근세 문화 르네상스를 이룬 문화 예술인 들이 호주 선교사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아버지대는 통제영의 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문화 예술의 DNA를 그들에게 물려주었다.

 

무궁 무진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통영은 문화 예술의 마인드가 확실한 정치인이 나온다면 획기적인 발전이 될 것이다.

좋은 하드웨어와 강력한 소프트웨어로 무장하면 확실한 관광 포인트가 될 것이다.

바다의 땅 통영은 매력의 땅이다.

그중에 통영성도 있다.

 

2014.3,7 통영성길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