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9 통영운하-윤이상

청풍헌 2014. 5. 23. 00:07

비가 내렸다. 가볍게 온다는 비가 추적 추적 내린다. 우산을 챙겨 들고 버스를 탔다. 해저터널 입구에는 소장님이 먼저와 계셨다. 우리가 먼저와서 기다려야 하는데... 인사를 드리고 나니 김성안 국장이 왔다. 산양면사무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통영학에 까지 진전 되어 통영학을 제대로 연구를 하면 박사 학위까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제다. 깊이가 있는 학문인 통영학이  필요한 싯점이다. 통영학을 세분화 시켜 연구하면 좋은 논문이  나올 것이다. 오늘 코스는 해저터널-착량묘-김삼주비-산양면사무소터-백운서재-윤이상 생가터 순이다. 짧은 거리지만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 보석같은 길이다. 


용문달양龍門達陽 용문은 바다밑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바다 밑으로 들어가 이르는 곳이 육지다. 용龍은 물에 살며 음이고 양陽은 육지이고 양이다. 이 이름도 음양의 이치가 숨어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름은 당시 통영읍장이던 야마구찌가 지었을 것이라 한다. 이곳은 물이 나면 거의 육지와 맛닿아 수차례 메웠다 뚫었다 하다가 결국 다리를 놓게된다. 이곳을 메우면 견내량이 입구요 이곳이 출구인데 출구를 막으면 전염병이 생기고 탈이났다. 결국 김삼주씨가 사제를 털어 돌다리를 놓았는데 그 돌이 통영성의 돌을 가져다 다듬어 다리를 놓았다. 수로가 좁아 그 곳으로 통과하는 배들이 호안 양쪽으로 손으로 밀면서 지나갔다. 이후 일본인들이 통영의 수산물 특히 좋아하는  아카다이(참돔),광어등이 많이 잡혀 이주 어촌인 오카야마무라와 히로시마무라인들의 통행이 불편하고 미륵도를 돌아가면 거리가 멀어 운하를 파기로 한다. 본토는 네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언젠가는 자기네 섬들도 연결 할 것이라 생각하고 실험적으로 운하와 해저터널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당시의 경비 25%는 국비요, 25%는 도비이며, 50%는 세금으로 충당하여 운하와 해저터널을 동양 최초로 만들었다. 자갈과 모래의 정확한 비율로 배합된 시멘트는 오늘날 까지 생생하며 이런 건축 공법은 본 받을 만 하다. 당시에 차가 다녔으며 이후 물이 새고 낧아 충무교를 세우고 보수를 하게 되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시절 예산을 받아 보수를 했다. 입구의 용문달양은 본래의 글자를 복사하여 다시 세겼으나 옛맛이 떨어진다. 지붕은 동판으로 씌웠는데 당시에 것인지 수리를 했는지 알 수 없다. 혹자는 양철지붕이라 하고 슬레이트 지붕이라 하고 본원사 지붕처럼 동판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지붕은 동판이다. 터널 내부로 걸어 들어가니 중간 즈음에 해저 13 m 라는 말뚝이가 서있다. 통영의 문화 예술인을 소개 했는데 살아있는 이한우를 소개해 놓았다. 통상 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을 소개해 놓는데 무슨 기준인에서 인지 살아있는 이한우 선생을 소개해 놓았다. 이는 형평성에도 어긋난 것이라 한다. 살아서 활동중인 유명한 문화 예술인이 많이 있다. 


터널을 나와 착량묘에 오른다. 착량묘에 서서 할말을 솟아 내셧다. 유교에서 법도는 엄격하다. 기신제를 여기서 지내는데 돌아가시기 전날을 기준으로 제례를 지내는데 어느날 양력으로 지낸다 하여 이사회때 강력 의의를 제기하니 탄신일이 국경일로 바뀌면서 양력으로 되었으므로 기신제도 양력을 해야 한다며 선고도 않고 양력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최근 또다시 슬그머니 음력으로 바꾸어 정책의 일관성이 없이 진행하는 것이 한심스럽다. 원래 착량묘는 초당 이었다. 초당에는 5점의 초상이 있었고 그중에 한명이 이순신 장군 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오면서 관왕묘가 오게 되었고 이곳에도 조자룡, 장비, 마초등 세 장수도 같이 모셨다고 하니 초기 관왕묘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순신 장군만 모신 사당으로 변했다. 이는 통영지에 서쪽10리에 당집이있는데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며 이곳이 착량묘이다. 이충무공 전서를 보관하며 그 위쪽 벽에는 다섯 화상이 결려 있는데 누군지는 상세히 알 수 없다고 했으며 착량영당중수기에도 같은 기록이 보인다. 소장님께서 2001년 6월 15일 한산신문에 기고하신 내용이다. 호상제는 초기에는 서재였다. 즉 이충무공전서라는 임금이 내린 서책을 보관해야 함으로 급히 호상제를 짓고 보관 하다 그곳에서 학동등을 일부 가르치는 역할을 하면서 서당으로 역할도 하게된다. 이곳은 당산이다. 지명도 서봉당동, 동봉당동 에서 서당동, 동당동 하다 당동이라 했으며 기신제를 지내기전 당신堂神에게 먼저 선고를 하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어느날 생략되었다. 지금은 뒷편으로 오래된 당산 나무가 푸르럼을 지랑하고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충무교를 건너면 김삼주시혜비가 나온다. 김삼주는 착량교 돌다리를 놓은 사람으로 그때의 돌은 통영성곽을 헐어 다듬어서 놓았다고 한다. 김삼주가 종이를 팔아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여러가지로 돈을 벌었다. 거제도를 건너는 견내량에도 나룻배를 모아서 전답을 주어 경비로 사용하게하고 섬 주민들의 편리를 도모하게하였다. 부자가 사회에 어떻게 배풀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이곳에 있는 벅수는 돌다리 끝에 있던 것으로 산양면 동편에 있던 것이다. 다른 한기는 봉평동 비석군에 있며 견내량 비석거리에도 공덕비가 한기 있다. 아래에 있는 산양면사무소 표석으로 내려가니 풀을 베어 놓았다. 초기행정구역은 동면(항남동부터 용남면) 서면(서호동-산양)이었으나 진남군으로 분군되면서 미륵도는 산양면이 되고 초기에는 가정집에서 면사무를보다가 당포진 관아를 헐어 이곳에 면사를 짓고 업무를 보았다.  일제 강점기 1919년 3.1운동당시  격문을 인쇄하기 위하여 통영면 사무소 등사판을 훔쳐 이곳 산양면사무소에서 격문을 인쇄하고 착량교를 건너가다 체포되는 아픔을 겪은 역사의 현장이다. 2016년 산양읍사무소 신축 준공예정인데 그곳에다 이 빗돌을 옮기고자 문의를 하여 역사적인 현장을 홰손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옮기는 순간 훼손이 된다, 독립운동의 순고한 얼이 서려있는 이곳을 성역화 하여 후세에 길이 남겨야 하거늘 어디서 그런말도 않되는 발상을 하는지 공무원들의 안이한 발상을 꾸짓으셨다. 차후에라도 이런 이동 할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적극 반대 해야한다. 유적 유물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최대한 가까운 곳에 원형대로 이전 해야 그 가치가 있다. 


백운서재로 이동했다. 백운서재 가는길 삼거리에 방향표지판을  요청 했는데 아직 아무런 표식이 없다.  나는 여러차례 와서 잘 찾아 가지만 처음 오는 사람은 이 삼거리에서 방향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시청에 방향 표시를 요청을 했으나... 백운은 고시환 선생의 호이다. 이곳을 백운정사 라고도 한다, 정사는 정신세계가 머무는 곳이라 한다. 무당집도 XX정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이치다. 즉 백운선생의 정신이 머무는곳이 백운정사이다. 백운정사 안내현판이 엉터리다. 안내판의 첫머리가 내용과 전혀다른 것이 인쇄되어 있다. 이는 컴퓨터의 오류로 생각되나 검토도 않고 설치된것을 보니 통영의 문화정책의 현주소를 보는것 같아 씁쓸하다. 이곳에는 두가지의 설화가 전한다. 통제영 군점을 보고 싶어 하는 학동을 위하여 주술을 부려 부적을 연못에 던지니 연못이 군점 장소로 변하여 군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나타 났으며 용화사로 놀러간 못된 통제사를 혼내준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곳에는 현판이 많이 있는데 대월탄對月灘은 폰데다리를 여울로 생각하여 달이 걸린 여울목이란 뜻이며 천곡정사川谷精思는 착량묘가 있는 곳이 냇골이다. 그 냇골을 가르키는 뜻이며 정사는 정신이 머무는곳이다. 


윤이상 생가터로 이동했다. 윤이상이 누구인가? 세계 5대 현대음악가로 유럽에서 인정받는 위대한 사람이 통영사람이다. 윤이상 기념관과 국제음악당이 왜 통영에 생겼겠나? 윤이상 이라는 거장이 있어 가능했다. 그 음악가의 생가를 허물어 없애려 하고있다. 그래서 생가터 지키기 운동이 조용히 일어나고있다. 오늘 그 현장에 왔다. 초기 윤이상 생가터라는 표석을 세웠으나 기존 살고있는 사람이 옮기라 하여 기념관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방도로가 나면서 집은 헐리고 이웃하여 있는 통영의 무형문화재인 통영소반 추용호의 생가터 집만 남았다. 다행이 이 집이 버티고 있어 도로가 여기서 중단되고 있는데 일간 강제수용하여 길을 낸다고 하는데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약간의 편리를 위하여 생가터를 도로에 편입시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소중한 유산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 후손에게 무었을 물려줄 것인가. 좁은 소방도로가 중요한가? 이 터를 물려주는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인식을 못하는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가 파괴하고 허물게 아니라 우리가 못하면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어 개발 하도록 해야한다. 우선의 이익을 위하여 장래를 망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기념관에 갔다. 이층의 기념관에는 통영문화협회의 기념사진이 있는데 이사진에는 최상한이 있다. 이분이 나중에 월북을 하게 되는데 윤이상 선생이 이북과 가까워진 계기가 최상한의 소식이 궁금하고 사신도를 보고 작곡에 참조하기 위하여 당시 경계가 모호한 베를린에서 여러 정황이 맞아 떨어져 이북을 드나들게 되었다. 이것이 동백림 사건으로 변질되어 큰 곤욕을 치르고 귀국 직전에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고향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윤이상 선생의 영혼이 깃든 생가터 만이라도 지켜 드리는게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의 도리가 아니겠나. 꼭 생가터가 지켜지기를 바래본다. 우중에 3시간을 열강하신 소장님의 열정을 따를 수가 없다.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신 소장님의 향토사 강의를 들는 날은 귀가 트이고 지식이 쌓이는 날이다. 


2014.5.20 향토사9강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