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해안선 탐방

1.통영항

청풍헌 2014. 8. 5. 02:21

통영항은 항구목에서 부터 천대 국치까지라 한다. 협의狹意로는 남망산 수책水柵안을 강구안이라 했다. 항구가 확장되면서 이순신 공원에서 천대국치까지를 통영항구에 포함한다. 오랜 역사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내재한 통영항구는 영욕과 질곡의 역사를 함께했다.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한적한 어촌마을에 이경준 통제사가 이곳으로 통제영을 옮긴지 어언 300여년을 조건수군의 본부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역사를 쌓았으며 폐영후 수산업의 발달로 번영을 이루었던 수산업의 도시였다. 통제영과 수산업의 영향으로 수많은 문화 예술인을 배출했으며 역사를 오롯히 간직한 도시로 성장했다.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유가  남해안의 해상방위가 용이하고 천혜의 조건을 갖춘 항구였다. 통제영과 바다는 불가분의 관계다. 바다가 있음으로 통제영을 열었으며 수군과 수산업은 한몸이며 바다를 이용하고 활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통제영 시절 춘조때 500여척의 전함과 3만여명의 수군 조련식은 장관을 이루고 그 많은 전선과 수군들이 통영을 다녀간후로 많은 문화가 뒤섞이게 되었다. 통영은 남해안의 리아스식 해안선이 발달하여 아름다운 해안선을 자랑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된 통영을 몽양 여운형 선생이 방문하여  동양의 나폴리라 칭했다.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인 우물을 찾아보고자 한다. 천대 국치재는 천수답이 있던 육지가 바다로 길게 뻣어나온 곶이(串)를 말한다. 당초 통영항구는 서쪽으로는 착량鑿梁까지이다. 그러나 항구가 확장 되면서 천대국치까지를 항구에 포함 시킨다. 착량은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에게 쫓긴 왜적들이 퇴로가 막히자 이곳을 파고 도주 했다는 종래의 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설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등 여러 문헌을 비교분석한 김일룡 향토사연구소장의 [통영운하에 관한 연구논문]에서 자세히 밝혔다. 착량은 원래 미륵도와 가늘게 연이어져 있었는데 임란 이전에 항로단축을 위하여 수로를 개통한 이래 여기를 [착량] 혹은 [판도]라 했다. 이후 수차례 메우기와 되파기를 거듭하다가  나무다리를 놓았다. 나무다리가 썪어 이고장의 독지가 김삼주가 돌다리를 놓았다. 일제 강점기 연안항로의 단축과 미륵도의 강산촌(오까야마무라)주민들의 편의을 위하여 운하를 파서 넓히고 해저터널을 건설하게 되었다. 지금은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미륵도의 교통을 분산하고 있다. 통영대교는 1996년에 철골 트러스트 아치교를 세우고 녹색 조명을 설치하여 통영운하를 더욱 운치있게 만들었다. 통영대교 아래부터 걸음을 시작했다. 이곳은 과거 동당동 이었으나 다시 당동으로 지금은 도천동으로 통합 되었다. 바닷가로 설치된 산책로는 야간 조명과 함께 많은 시민들이 즐겨 산책하는 코스로 변했다. 때로는 낚시를 즐기고 좁은 수로를 지나는 멸치잡이 배들을 보면서 손을 흔드는 아름다운 풍경도 연출한다. 2002년 매미 태풍시 신아조선에서 건조중인 5만톤급 탱크선이 떠밀려왔던 곳이며 활어를 보관하는 각종 수산회사가 즐비한 곳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장어통발수협의 장어를 보관하던 대통발이 떠있던 곳이다. 프라스틱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대통발 장인은 도산면 원동으로 이전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항로 가까운 곳에서 바지락 조개를 잡는 어부도 있다. 갈쿠리를 바다 밑으로 내려 뻘을 파서 조개만 선별하여 캐는 원시적인 어구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항구다. 착량교터를 지나오면 착량묘가 있다. 착량묘는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최초 서당동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듬해(1599) 슬퍼하며 초당을 짓고 기신제(돌아가신날의 제사)모셨는데 1877년 이규석 통제사가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착량묘라는 편액을 달고 지금까지 기신제를 올린다. 착량묘가 있는 곳은 서당동으로 나중에는 당동으로 변했다. 즉 당산나무가 있으며 당산제를 지내던 곳인데 중간에 관왕묘와 같이 운용되었던 흔적이 있다.(착량묘사적기) 착량묘를 지나면 해저터널 입구가 나온다. 해저터널은 통영운하 공사를 하면서 미륵도를 통행 할 수 있도록 만든 터널이다. 터널 입구의  용문달양은 바다밑으로 들어가 육지로 나온다는 뜻으로 당시 통영읍장이던 야마구찌 아기라의  글씨라 한다. 한때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 이라 하여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이 터널에 들어가면 물고가가 노니는 것이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막상 방문하면 일반 터널이라 실망을 하기도 했다. 통영해안로를 따라 산책로를 걸어오면 횟집이 즐비하게 있다.무질서한 간판을 통일하여 아름답게 디자인하고 설치하여 누구라도 쉽게 횟집을 방문하여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도록 시설을 정비했다. 통영은 반도지형으로 터가 부족하다. 매립을 하던지 아니면 파일을 박아 건물을 세웠다. 통영잠수기조합의 위판장도 도로에서 바닷가쪽으로 돌출되게 건물을 지었다. 서호동 활어위판장도 마찬가지다. 통영에는 수협 위판장이 동호동 위판장은 선어를 취급하며 활어 위판장은 이곳 서호동과 견유마을 위판장, 당포 위판장이 있다. 경매를 위하여 활어가 수족관에서 입찰을 기다리고 있다. 해양파출소가 있으며 해방다리에서 내려오는 서호천의 마지막 출구가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다. 서호천 살리기 예산을 확보 했는데 사업을 반납했다고 시끄러웠다. 이 사업이 시행 되었더라면 통영항을 좀더 깨끗하게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해안도로가 예전에는 바다였다. 서호동 시장 상인들은 해방다리 옆의 새미에서 물을 길러와 생활을 했다. 1980년도에 아내를 만나 데이트를 즐길때에는 서호동에서 남망산 공원까지 걸어 다녔다. 그래서 그곳의 기억은 뇌리에 남아있다. 서호시장은 아침장으로 섬 사람들이 배를 타고 올라와 싱싱한 해물과 농산물로 장을 열었다. 지금도 아침 일찍가면 싱싱한 생선과 해물을 살 수 있으며 우짜, 시락국, 빼때기 죽, 꿀빵등이 태어났던 곳이다. 매립을 한곳에 통영연안여객터미날이 들어서 섬으로 가는 여객선의 입출항 하는 곳으로 변했다. 대부분의 섬 여행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다른곳에서 출발하는 섬도 있다. 바다의 땅 통영은 570여개의 섬이 있다. 그중 유인도는 44개에서 42개로 줄었다고 한다. 섬에는 사람들이 떠난다. 놀러가는 섬과 생활 터전인 섬은 근본이 다르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지식들 공부시키고 돈이되면 시내에 집을 산다. 가끔씩 가는 여행객과 주민들과는 그 느낌이 180도로 틀리다. 과거 세모해운의 엔젤호가 다니던 부두는 매립되어 항만청 건물이 들어섰고 엔젤다방은 한산호텔이 들어섰다. 부두 앞의 김밥가게는 불야성을 이루고 밤낮없이 낚시꾼들과 여행객들에게 요깃거리를 제공한다. 터만 있으면 건물은 올려 모텔을 짓고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통영 하면 네임의 브랜드 가치가 상당하다. 보통 사람들 통영을 동경하고 가고 싶어 한다. 그만큼 통영이 가치가 있으며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많다는 말일 것이다. 통영세관앞의 부두 하역장은 통영의 물자가 오가는 대외적인 항구다. 과거 일본으로 수출이 활발 할 때는 번영의 상징 이었다. 또한 밀수가 성행하여 세관 감시가 활발 했었다. 밀수선으로 들어오던 밀수품을 단속배가 뜨면 추를 달아 물속에 던지 놓는데 먼저 건져가는 놈이 임자였다고 한다. 통영부두 옆으로 다시 매립공사가 한창이다. 크루즈를 입항할 수 있도록 부두를 만든다고도 매립을 하고 있다. 통영항 다목적 부두건설은 정부의 남해안 관광밸트 연계사업으로 크루즈 기반 시설 구축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안쪽로는 한산대첩 병선마당을 조성 한다고 한창 공사중이다. 당초에는 이순신 광장이었으나 여수의 전라좌수영 복원사업으로 이순신 광장을 먼저 조성하여 이름을 쓸수 없어 병선마당으로 했으나 과거 병선마당이 엄연히 존재 하는데(지금의 문화마당) 이곳에 조성하는 것이 병선 마당이라 하니 참말로 아이러니하다. 2015년 2월까지 공사기간이라고 한다. 이곳은 항목으로 項목덜미 항이다. 항구의 목덜미를 뜻하는 항구의 입구다. 이곳 언덕에는 천척루를 세워 만하정과 쌍벽을 이루고 시인 묵객들을 받아 들였다. 항목에는 수책을 세워 망일루의 누각에서 치는 인정(저녁10시경)과 파루(새벽4시경)시 수책을 여닫았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서 건너편으로 건너는 나루선이 있어 통구미를 타고 선비船費를 주고 건너 다녔다. 좁은 항목에서 작은 통구미로 건너다 물에 빠지기가 일수였다. 아내가 초등학교시절 할머니와 같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배가 뒤집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나루선을 하던 분이 아직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정량동 협동빌라) 항목을 돌아가면 맛집인 서울낙지가 있다. 한때는 통영의 맛집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요즘은 어떠한지? 각종 철공소와 기계 수리소 다방등이 어우러져 있으며 국민은행 자리에는 과거 통영극장이 있던 곳이다. 과거 통제영 시절에는 중영의 선소였다. 이후 윤선머리 싼판으로 여객선이 드나들던 곳이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에는 용옥이 기두를 만나러 부산으로 떠나는 부두가 이곳 싼판이다. "연지와 분이 얼룩진 얼굴을 하고서 용옥은 윤선회사 대합실의 딱닥한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침배가 있다하여 선표를 사려 했으나 누군가가 그 배는 마산가는 배라 했다. 대합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배도 작고 초라하여 용옥은 그런가보다 하고 멍청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배가 떠나고 나서야 그 배는 마산을 돌아서 부산으로 가는 배였다는 것을 알았다." 여수에서 부산까지 가는 중간 기항지로써 큰 역할을 한 통영항은 수많은 애환이 있는 항구다. 여수와 통영 부산으로 직행 하는 배도 있지만 중간 기항지가 많은 배도 있었다. 그런 배들은 완행 열차 처럼 갖은 짐들을 싣고 삼등객실에 몸을 맏기고 항해를 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수산물의 수출로 활기를 띌때 부둣가에는 각종 술집과 여관 여인숙이 있었으며 청루골목이라고 윤락가가 형성 되었다. 하동집도 이곳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다가 하도 시끄러워 명정골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제옥례 여사님 증언) 문화마당 코너부위에 있던 필그림사는 와이샤츠 전문점 이었는데 사라졌다. 문화마당은 경상남도 해운항만청 소속으로 한시 바삐 병선마당으로 그 이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곳이 통제영8전선을 계류했던 통제영 선소다. 통제영 8전선은 천자제1호좌선, 부선, 중군선, 좌한선, 우한선, 통구선, 좌탐선, 우탐선이다. 도로까지가 바다 였고 선소문인 수항루가 있었으며 전선에 필요한 각종 창고가 즐비하게 있던 곳이다. 지금도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척을  계류해 놓고 있다. 통제영의 전선이 있는 곳이 병선마당이다. 조선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전라좌수영 거북선2척과 통제영  거북선 1척이다. 병선마당에 오래전에 자리잡고 계신  칼가는  할아버지 강갑중씨는 어느새 유명 인사가 되었다.  통영은 개도 시를 읊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40여년을 병선마당에서 한 세월을 보낸 칼갈이 아저야 말로 시 한 수 쯤은 누워서 떡먹기 일 것이다. 아름다운 시어에 곡이 붙여져 노래로 만들어졌다. 중앙시장은 통제영의 역사와 함께한 장시다. 통영성 남문아래 성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장시는 동문밖 비석거리에 있던 것을  이곳 남문 밖으로 이설하고 매달 초 이튿날 시장을 열고 5일 간격으로 열었다. 사전四廛(같은 물건을 놓고 파는 4대 전문 도매점)은 싸전(쌀)과 포목전, 잡화전, 담배전이 있었다. 장배는 고성 거제 창원 하동 곤양 김해등 고을에서 모두 영인을 두고 배 한척이 그 읍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싣고와서 장에서 팔고 거래를 했다.(통영지統營志 장시場市편) 동피랑이 유명해지면서 더불어 통영꿀빵이 수요가 폭발하여 오래된 대장간(삼성 공작소)이 달세를 이기지 못하고 강구안 골목을 쫏겨갔다. 중앙시장안에는 통새미가 있다. 과거  통을 매던 곳에 있었다 하여 통새미로 불려진다. 복원을 하여 처험을 할 수 있도록 두레박을 달이 놓았는데 짠물이 비쳐 우물가에 심어 놓은 고추가 말라 죽는다고 한다.(관광객이 물을 떠 고추나무에  줌) 매립한 부분은 주차장으로 활용을 하고 그래도 부족하여 도로 이면에 관광버스 전용으로 주차 공간을 만들었다. 중앙시장에  내다 파는 활어를 싣고온 각종 어선들로 강구안은 항상 붐빈다. 중앙시장의 생선 골목은 어느듯 명소가 되었다. 좌판에서 회를 떠 초장집에서 먹는 시스템이 정착하여 휴일이면 발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빈다. 통영의 어선들과 관공서 배들이 내년이면 강구안을 비워야 한다. 관공서 배는 인평동으로 어선은 미수동으로 이전 할 것이다. 갈등없이 잘 조절 되었으면 한다. 남망산 공원 입구는 좁은 목을 형성 했었다. 하지만 매립으로 인하여 육지화 되고 남망산은 시민 공원으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 되었다.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오르내리며 작품 구상과 작품을 쏫아 내었다. 남망산 아래는 철공소가 있던 곳인데 대부분 정량동 철공단지로 이전하고 효성 엔진사라는 큰건물의 작업장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금성수산의 냉동 공장과 운반선이 얼음을 받는 현장은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볼 수 있다. 금성수산(http://www.keum-sung.co.kr/)은 대형 선망과 기선권현망이 있으며 냉동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알짜기업이다. 과거 통제영 시절 배를 만들던 곳이 이곳 남망산 아래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운룡 통제사의 거영일기에는 당포에서 전선 만드는 것을 감독 했다는 말이 있어 당포 만호진에서도 전선을 건조 했다.(三月初一日 맑음 中軍 禹僉使와 함께 道尾로 가서 耕田狀況詳細히 살피고 또 內浦農所에 가서도 살폈으며 唐浦에 가서 戰船 建造自初至終을 두루 보았으며 小船을 타고 還營하였다.) 제제소와 조선소가 같이 공존하던 시절에는 크게 성행 했으나 지금은 매립되고 이전되어 폐허가 되고 다른 작업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나무를 가공하여 도마를 깎아 파는 아저씨는 아름 아름 주문이 들어와 도마를 팔고 있다. 중앙시장이나 서호시장, 거북시장의 어물전 상인들이 단골이다. 도마는 소나무를 제일로 치는데 요즘은 국산 소나무 구하기가 힘들단다.  해핑이에 있던 해양경찰이 이곳으로 이전했다. 매립하여 해경 전용 부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과거 바닷가였던 조선소 터는 육지로 변하고 제기능을 잃었다. 남망산은 금광이 있었다. 이는 동문밖 작은 고랑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이  고개를 치켜드니 저쪽 공주섬 앞에서 마구 할미가 치마자락에 금은 보화를 담아 성큼 성큼 걸어 오길래 방망이를 가르키며 저기 마구할멈이 온다 하고 외치니 깜짝놀란 마구할멈은 금은보화를 버리고 그 자리에서 장자섬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에 남망산에 금광이 있다는 확신으로 굴을 파고 금을 채굴 했다. 굴의 깊이가 깊어지자 옆 장자섬까지 파고 들어가 섬의 중앙이 무너져 협곡이 생겼다. 이 굴은 멀리 한산도 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지금은 물이차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실제 남망산에도 금굴이 있으며 장자섬에도 굴이 있다. 몇 해 전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조사를 해간 적이 있다. 본디 섬이었던 장좌도는 신아조선이 한창 잘 나갈때 매립되어 블록 공장으로 쓰다가 부도로 지금은 방치되어 있다. 장좌도를 깃점으로 정량동 매립공사가 이루어져 긴다란 방파제를 만들고 흰 등대를 세웠다. 등대는 항구를 바라본 방향에서 오른쪽은 붉은 색 등대이고 왼쪽은 흰색 등대이다. 그러므로 장좌도에서 매립한 방파제는 동호항을 들어오는 왼쪽이므로 흰 등대를 세웠다. 통영수산업협동조합 공판장은 선어를 취급하는 곳이다. 고등어, 갈치, 병어, 참치, 등 선망에서 어획한 생선을 경매하여 판매하고 있다. 통영에는 수협이 여럿 있다. 일반 수협과 기선권형망 수협, 멍개수협, 통발수협, 굴수협이 있으며 어류양식 수협도 있다. 대한민국의 수협의 효시가  한산도와 가조도에서 발생 되었다. 1908년 대한제국 농상공 대신의 허가를 받아 한산도에는 거제 한산모곽전 조합과 가조도와 가덕도 일원에 거제 한산가조어기조합을 설치 하였다. 이후 1910년에는 두 단체가 합병하여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전조합이 되었다. 여기서 모곽전조합은 한산도에서 많이 나는 해조류를 취급 했으며 어기조합은 어장의 설치 장소의 허가권을 말한다.(한산면지참조) 수협의 면세유 보급선과 식수 보급선이 계류되어 있으며 시끌벅적 하던 아침이 지나면 적막강산이다. 조금 내려오면 굴수협 공판장이 있다. 통상 굴 박신(굴까기)은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한다. 가장 성수기는 김장철인 겨울이다. 굴양식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크다. 굴 박신은 많은 인력이 소요되는 작업으로 겨울 한철 큰 벌이가 된다. 정량천은 물이 썩어  악취를 풍긴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청량천 복원사업이 확정되어 공사를 한다고 했는데 아직 예산이 확보가 안되었는지 시작을 않고있다. 이전된  철공단지안에 기선권현망 수협공판장이 있다. 기선권현망은 멸치를 잡는 어업이다. 즉 마른멸치를 경매하는 곳이다. 멸치는 산란기인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금어기다. 멸치는 기선권현망이 전체의 5~60%차지하고 나머지는 정치망이나 유자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등으로 잡고있다. 7km(통영대교아래-통영해안로-이순신공원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