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통영 항일독립운동 학술 세미나) 통영학을 연구하는 통합 시스템이 필요하며 통영항일독립운동 사적지가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청풍헌 2015. 8. 21. 12:35


통영인뉴스 사진


통영 항일독립운동 학술 세미나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산대첩기간에 의미 있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통영지역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학술대회다. “일제하 통영의 항일 민족 운동과 그 과제라는 제호로 김상환 경상대 사학과 교수가 발표 했으며 김일룡 원장님은 통영의 항일민족운동 사적지라는 제호로 발제 하셨다.

 

김상환 교수 일제하의 민족운동에 대하여 먼저 정의 하였다. 순수한 민족주의가 시대 상황의 변화에 의하여 여러 단계로 변질이 되었다. 3.1 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운동은 규모나 영향 면에서 큰 파급효과를 내었다. 일제하의 통영은 거제와 함께 통영군이었으며 경남에서 4번째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통제영을 기반으로 자란 도시는 어업과 상업이 번창한 재정자립도가 높은 도시였다. 4번에 걸쳐 6회의 시위가 있었으며 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인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주도했다. 학생, 면서기, 기독교인, 유치원 보모, 기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통영청년단을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대처 했으며 청년운동의 연합이 결정적으로 크게 부각된 사건이 김기정 징토운동이다. 김기정은 일본법학교를 나와 판사를 역임하다 변호사를 했다. 경상남도 관선 평의원이 되면서 회의석상에서 한 발언이 발단이 되어 봉래좌에서 규탄대회가 열렸다. 조선인의 보통교육을 철폐하라, 조선어 통역을 철폐하자 등의 망언을 했다 하여 징토대회가 열렸다. 이 사건은 확대가 되면서 크게 보도되었고 이슈화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결국 김기정은 사퇴 후 통영을 떠났다. 통영청년단도 1930년 정기대회를 앞두고 강제 해산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통영은 통제영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사도 엄연히 존재한다. 불과 70년 전의 일제 강점기 때의 각종 사건도 곧 잊혀 질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으로 남을 근대사도 제대로 조명 되어야 한다. 통영이 통영스럽게 발전 하는가? 문화도시로의 지향이 통영의 미래다. 역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다. 통영학을 공부 하는데 통합적인 기구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당장 잊혀져 가는 일제 강점기의 통영과 근대사도 시급히 정리하고 조명해야 한다. 그 반대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영의 항일민족운동 사적지 라는 제호로 발제하신 원장님은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통영항일독립운동 사료전을 문화원 동락마루에서 열었다. 귀한 자료가 많이 나왔다. 자료 중에 통영의 항일유적지가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아 정확한 고증으로 위치를 비정했다. 지난 61일 향토사 수업의 일환으로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특히 산양면사무소터와 통영면사무소터, 관란재와 신정시장터, 통영우편국터, 통영공립보통학교, 통영예기조합터 등이다

산양면사무소터는 산양면 미수리 304번지이며 현 지명은 진남12(미수동 304번지 일대)이다. 산양면은 1902년 진남군 서면에서 분리 되었다. 초기에는 가정집에서 면 사무를 보다가 당포진 관아를 헐어 이곳에 면사를 짓고 업무를 보았다. 일제 강점기 19193.1운동 당시 격문을 인쇄하기 위하여 통영면 사무소 등사판을 훔쳐 이곳 산양면사무소에서 격문을 인쇄하고 착량교를 건너가다 체포되는 아픔을 겪은 역사의 현장이다

통영면사무소터는 태평동 성당 입구 근처라고 비정했다. 일제 강점기 초기(1916)의 통영지도에 면사무소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관란재는 어린 학동들이 공부하던 한문서당으로 통영면 신정 89번지이며 현 주소는 가죽고랑334-7(서호동 89-3번지)이다

신정시장은 아적제자(아침시장)로 신정 76,113~115번지 일대이다. 현 주소는 가죽고랑211, 13, 15 일대다. 이곳에서 박상건은 어린 학동들에게 조선독립만세라는 수기를 들고 아적제자에서 시가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상건은 주모자로 잡혀가 모진 매를 맞고 풀려나 다시 부도정 시장에서 만세시위도중 체포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2년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통영우편국터는 통영면 부도정 53번지이며 현주소는 중앙시장18(중앙동 53-1, 2번지)이다. 통영면 지도(1916)부분에 범례로 표시되어 있다. 당시 목조 2층건물이며 이후 붉은 벽돌로 다시 지었다. 지금도 한쪽 벽면은 붉은 벽돌이 존재한다. 거제 연초 다공리 출신 권오진이 조선국민독립단경고문과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일본 내각대신 및 총독부 앞으로 우편을 발송하였다

통영공립보통학교는 세병관이다. 일본 아동들이 다니던 통영공립심상소학교는 백화당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 하였다. 일제의 교장에 항거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감행하던 곳이다

통영예기조합(권번)는 통영면 길야정 57번지이며 현 주소는 항남1번가길 7(항남동57번지)이다. 현재 일려진 중앙동 새마을 금고 앞은 1930년대의 조합터다. 예기조합의 정막래, 이소선 등은 금비녀와 금반지를 팔아 광목을 구입하여 태극기와 처마저고리를 만들어 기생 30여명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잘못 알려진 독립운동 사적지를 사료에 의하여 정확하게 규명 했다. 앞으로 표석과 함께 코스를 개발하여 선현들의 호국정신을 교육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되기를 기대해본다. 통영청년단회관은 근세 통영청년운동의 산실이요, 통영인의 기개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문화원사를 옮긴 후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훌륭한 문화유산의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산 미문화원이 근대박물관으로 개장한 사례는 시사 하는바가 크다.


 통영의 항일독립운동 학술세미나 자료집에서

질의응답시간에 김기정이 통영청년단 회장을 역임했는지의 견해가 달라 물었다. 김상환 교수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며 중추원 조사에서 청년단장을 도용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김일룡 원장님은 동아일보 19231124일자 통영청년단회관 낙성식 기사에 전단장(全團長) 김기정의 식사(式辭)가 유()한 후()..“ 라는 기사에서 청년단장을 역임 했다고 단정하셨다. 송정택의 사랑방의 장소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곳은 문화원사 아래 문화 주차장이라 했는데 북신동 이라고 단정 하셨다. 그것은 서상호의 신문조서에 밝혀져 있다.

 

통영의 근대사를 연구하는 통합 시스템이 필요하며, 통영항일독립 사적지 코스를 발굴하여 교육현장의 활용방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581415시 통영문화원 동락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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