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난중일기 필사

난중일기 필사 42~45일차

청풍헌 2017. 3. 22. 23:30

42일차 

15일 갑진, 맑음. 나라 제삿날(공혜왕후 한씨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낼 답장과 별록을 써서 곧바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가 보낸 통첩에 "왜선 90여척이 와서 부산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350여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 고 하였다. 그래서 즉각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이광), 병마사(최원), 우수사(원균)에게 공문을 보냈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43일차

16일 을사, 2경(밤 10시)에 영남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의 거진이 이미 함락 되었다." 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가 없었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17일 병오, 굳은 비가 오더니 늦게 갰다. 영남 우병사(김성일)가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함락 시킨 뒤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 라고 했다. 늦게 활 5순을 쏘았다. 이전 번을 선 수군과 인계하는 수군이 잇따라 방비처로 왔다. 


44일차

18일 정미, 아침에 흐렸다. 이른 아치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 되었으니, 임시장수를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을 이날 바로 정하여 보냈다. 미시에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 울산 양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 갔다가 모두 패했다." 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경상좌병사와 경상좌수사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급히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원통했다. 저녁에 순천 군사를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인도하지 않으므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45일차

19일 무신, 맑음. 아침에 품방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내고 일찍 아침을 먹은 후 동문위로 나가 품방의 역사를 친히 감독했다. 오후에 상격대를 순시했다. 이날 입대 하러 온 군사 700명이 점검을 받고 일을 정했다.

20일 기유,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이 왔다. "큰 적들이 맹렬하게 몰려와 그 앞은 대적할 수 없으니 승리한 기세를 타고 내달리는 것이 마치 무인지경에 든 것 같다."고 하면서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구원해 오도록 장계로 청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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