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난중일기 필사

난중일기 필사 61~72일차

청풍헌 2017. 4. 16. 10:07

61일차

27일 맑음. 영남 우수사(원균)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칠천도)에 이르니, 웅천현감 이종인이 와서 말하기를 , “들으니 왜적의 머리 35급을 베었다.”고 하였다. 저녁에 제포, 서원포를 건너니, 밤은 벌써 이경(10시경)이 되었다. 그곳에서 잤다. 서풍이 차갑게 부니 나그네의 심사가 편하지 않았다. 이날 밤은 꿈자리도 많이 어지러웠다.

28일 맑음. 새벽에 앉아 꿈을 기억해 보니 처음에는 흉한 것 같았으나 도리어 길한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62일차

삼가 여쭙건 데 순시하는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일 승평(순천)에서 받들었던 일은 매우 기쁘고 대행한 일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일본은 해중지역에 살고 있어서 비록 추운 겨울을 만나도 바람이 오히려 따뜻하여 장정들은 오직 짧은 소매 옷만 걸치고 긴 옷에 겹 주름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이제 흉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풍토에 익숙지 않아 한겨울 추위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내기 어려워할 뿐 아니라 군량이 이미 다함에 기력도 또한 다 하였으니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왕실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이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해가 장차 바뀌려 하는데도 아직 적을 섬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 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63일차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 대행인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 모두 이 도(전라도)에 달려있고 적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 하는 것도 이 도를 위한 계책에 달려있습니다.

 

64일차

본도의 감사가 재차 부임하여 나랏일에 힘쓰고 절도사는 오랫동안 다른 도에 머물면서 군사와 말을 정선하여 부리되 군기와 군량은 이곳으로 다 보내고 진과 보루에 방어할 군사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각각 반을 나누어 뽑아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늙고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한꺼번에 닥쳐와 과반수가 패주 했습니다. 비록 혹 패주하지 않은 자가 있어도 기근과 동상이 너무 심하여 사망하는 일이 연이었는데 큰 고을의 경우 300명이나 되었습니다.

 

65일차

이런 상황에 강성한 사람을 가려내어 진압할 날을 정하고 출정을 독촉하니 한 도가 소동 하였습니다. 게다가 소모사가 내려와서 남아있는 군사들을 징발하고 각 진영과 포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고을의 수병들도 그 정한 길일에 뽑아서 충원하니 한 도가 소동하며 행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도를 보전하기 어려운 것은 뻔한 일이니 길에서 통곡하고 있으며 (...)

 

66일차

지난 9월 유지(명령서) 내용에 각 고을의 떠도는 군사와 침탈이 미친 족린들에게 일체의 세금은 면제하라.”고 간곡히 글을 내리셨으니 백성을 곤경에서 해방 시키는 일은 무엇보다 급한 일입니다. 큰 적이 각도에 가득하여 무고한 백성들은 몇 십만인지 알 수 없지만 모두 그 독해를 입었습니다. 종사와 도성도 보전할 수 없게 되어 이에 말하고 생각 하노라면 애통한 마음은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67일차

지난 초하루에 10명의 군사가 방비하러 온 고을에서 족린에게 역을 면제하라는 명령을 들었는데 그 다음의 초하루에는 방비에 들어간 사람이 겨우 서너 명 이었습니다. 어제 10명되는 유방군이 오늘은 네댓 명도 안 되니 몇 달도 안가서 변방의 진은 하나같이 텅 비고 진의 장수는 혼자서 빈 성을 지켜 어찌할 바를 모를 것입니다. 만약 이전의 법규를 따른다면 임금의 분부를 어기는 것이고 그 분부를 따른다면 적을 방비함에 그 대책이 없는 것이니 이 사이에서 유리한 점을 밤낮으로 생각하여 체찰사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68일차

그 화답 내용은 일족에게 부과하는 폐단은 백성을 심히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간곡히 하교 하셨기에 마땅히 따라 행하기에 틈날 겨를이 없을 것이지만 그 보고한 사연 또한 일리가 있으니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적을 방비하는데 두 가지 모두 유리함을 얻을 수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죽은 자가 자손이 모두 끊어진 경우에는 도목장에서 제외하라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69일차

대개 본도(전라도)는 나누어 방비할 군사가 경상도의 예와는 같지 않습니다. , 우수영에는 320여명이고 각 진영과 포구에는 혹 200명 또는 혹 150여 명씩 나누어 방비 하는데 그 중에서 오래전에 도망가서 죽어 본래 배정받지 못한 자는 107, 8입니다. 간신히 현재 살아있는 자를 거두었으나 모두 노쇠하여 변방을 지키기 적합하지 않으니 그 형세야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70일차

물론 일족들은 숫자를 채워 번을 서서 방비케 할지라도 대부분 탈이 났다고 소를 올리고 있고 나아오되 아직 방비하러 오지 않는 자는 혹 장정을 모집하는 중에 이름만 속해 있어서 피차간에 서로 엇갈리게만 되어 결국은 일일이 조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그 사이의 고통은 이루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신은 이런 폐단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큰 적이 앞에 있어서 방비하여 지킬 일이 매우 급하여 오래전부터 있는 병폐라고만 여겨 방어하는 것을 줄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71일차

전례를 따라 출발을 재촉하는 것은 한편으로 배의 격군을 채울 수 있고 한편으로 성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5번 적에게 나아가고 14번 싸워서 이겼던 것이 이미 8달 전에 겪은 일입니다. 대저 변방의 중진을 한번 잃으면 그 해독은 심장부에 까지 미치게 되니 이것은 실로 경험한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되 계책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을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가장 급선무라 생각 합니다.

 

72일차

국가가 호남과는 마치 제나라의 거, 즉묵과 같은 것이니 이는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가 (기맥만 남아) 구원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겨우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사와 말들이 이곳(전라도)을 휩쓸고 갔습니다. 명나라 대제독 이여송이 수십만 명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 개성, 한양 삼경의 왜적을 토멸 했으며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남은 무리가 없이 소탕하고 돌아 왔습니다



'통영 > 난중일기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중일기 필사 85~93일차  (0) 2017.05.06
난중일기 필사 73일차~84일차  (0) 2017.04.27
난중일기 필사 55일차~60일차  (0) 2017.04.04
난중일기 필사 46~54일차  (0) 2017.03.29
난중일기 필사 42~45일차  (0) 2017.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