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난중일기 필사

난중일기 필사 73일차~84일차

청풍헌 2017. 4. 27. 22:03

73일차

계사일기

2월 계사년 2월은 대길하다.

1일 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발포만호(황정록), 여도권관(김인영), 순천부사(권준)가 와서 모였다. 발포진무 최이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긴 죄로 형벌을 내렸다.

2일 정해, 늦게 갬. 녹도의 임시장수 사도첨사(김완), 흥양현감(배흥립)등의 배가 들어 왔으며 낙안군수(신호)도 왔다.

 

74일차

3일 무자, 맑음.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군수(김득광)는 오지 않았다. 동쪽 윗방으로 나가 앉아 순천부사, 낙안군수, 광양현감과 한참 의논하고 약속 하였다. 이날 영남에서 옮겨온 귀화인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 등이 명부에 오를 격군 80여 명이 도망갔다고 보고 하면서도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 오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군관 이봉수, 정사립 등을 몰래 파견하여 70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눠두고 김호걸, 김수남 등을 그날로 처형 하였다. 오후 술시부터 비바람이 크게 불었는데 여러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75일차

4일 기축, 늦게 갬. 성 동쪽이 9발이나 무너졌다. 객사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유시(오후 6시경)에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비바람도 몹시 사납게 불어 각배들을 구호하기에 힘들었다.

 

76일차

5일 경인, 경칩이라 둑제를 지냈다. 비가 퍼붓듯이 쏟아지더니 늦게 비로소 갰다. 아침 식사 후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았다. 보성군수(김득광)는 밤새워 육로로 달려왔다. 뜰아래 붙잡아 놓고 기일 어긴 죄를 추국하여 문초하니 순찰사와 도사 등이 명나라 군사를 접대하는 차사원으로서 강진 해남 등의 관청에 불려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공무이므로 그 대장과 도훈도 그리고 색리 등을 나무랐다. 이날 저녁에 서울서 온 벗 이언형과 전별하는 술자리를 가졌다.

 

77일차

7일 임진, 맑음. 새벽에 떠나 곧장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평중이 이미 먼저와 있어서 함께 이야기 했다. 기숙험도 와서 보고 이영남과 이여염도 왔다.

8일 맑음. 아침에 영남 우수사(원균)가 내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가 기한에 늦은 잘못을 꾸짖고 지금 먼저 출발 한다고 했다. 내가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도착할 것이다.” 라고 약속 했더니 과연 오시에 돛을 달고서 진영에 왔다. 이를 보고 기뻐서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온 것을 보니 거느리고 온 배가 마흔 척 밖에 안 되었다. 그날 바로 신시(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78일차

9일 갑오, 첫 나발을 불고 둘째 나발을 불고 나서 다시 날짜를 보니 비가 내릴 징후가 많으므로 출발하지 않았다. 큰비가 종일 내려 그대로 머물러 출발하지 않았다.

 

79일차

10일 을미, 아침에 흐렸으나 늦게 갰다. 묘시(오전 6시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과 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여전히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두 차례 유인 했으나 우리 수군에 이미 겁을 먹고는 나왔다가 돌아갔다 하여 끝내 잡아 섬멸하지 못하였다. 매우 통분한 일이다. 밤 이경에 영등포 뒤 소진포로 돌아가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에 병신일 아침에 순천 탐후선이 돌아갈 예정이어서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11일 병신, 흐림. 군사를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80일차

12일 정유, 아침에 흐리다가 개었다. 삼도의 군사가 일시에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과 웅포에 가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았다. 나아갔다 물러났다 유인 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차례 뒤 쫒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매우 통분한 일이다. 이날 저녁에 도사가 우후에게 공문을 보냈는데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용 물품을 배정한 것이라고 했다. 초경에 칠천도에 이르자 비가 크게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81일차

13일 무술, 많은 비가 물 쏟듯 내리더니 술시(오후 8시경)에 비가 그쳤다. 토벌을 논할 일로 순천부사(권준), 광양현감(어영담), 방답첨사(이순신)를 불러 이야기 했다. 정담수가 와서 만났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 대방과 옥지 등이 돌아갔다.

 

82일차

14일 기해, 맑음. 증조부의 제삿날이다. 이른 아침에 분영의 탐후선이 왔다. 아침 식사 후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수사(원균)는 병으로 오지 않고 오직 전라좌우도 장수들만 모여 약속했다.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입에 담지 못할 짓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어란포만호 정담수,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함부로 술을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을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헤어져서 진 친 곳으로 왔다. 가덕첨사 전응린이 와서 만났다.

 

83일차

15일 경자,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날씨가 온화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과녁을 걸어놓고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권준), 광양현감(어영담)이 왔다. 사량만호(이여념), 소비포 권관 이영남, 영등포만호 우치적도 같이 왔다. 이날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 조정에서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 는 것이었다. 또 순찰사의 영리가 보낸 고목에는 명나라 군사가 21일에 서울에 들어와 적의 무리들을 모두 섬멸 하였다.” 고 하였다. 저물녘에 원평중(원균)이 와서 만났다.

 

84일차

16일 신축, 맑음. 늦은 아침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소문에 영의정 정철이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간다고 했다. 따라서 노비단자를 정명원에게 부치면서 그 사신 편에 전하도록 하였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만나고 함께 밥 먹고 돌아갔다. 순천부사와 방답첨사도 와서 만났다. 밤 이경에 신환과 김대복이 임금의 전서. 교서 두 통과 부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이를 통해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송도를 치고 이달 6일에는 서울에 있는 왜적을 함락 시켰다.” 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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