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난중일기 필사

난중일기 필사 85~93일차

청풍헌 2017. 5. 6. 12:39

85, 86일차

17일 임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고 하루 종일 동풍이 불었다. 새벽에 서재에 이 영남, 허 정은, 정 담수, 강 응표 등이 와서 만났다. 오후에 우수사(이 억기)에게 가서 만나고 또 새로운 진도군수 성 언길을 만났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우수사(원 균)의 배에 갔다가 선전관이 유지를 가지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녁에 돌아올 때는 도중에 선전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노를 저어 진으로 돌아올 때는 선전표신을 만났으므로 배로 맞아들였다. 유지를 받아보니 급히 적이 돌아가는 길목에 나아가 도망하는 적을 막아 몰살하라. ‘ 는 내용이었다. 삼가 유지를 받았다는 답서를 바로 써 주었는데 밤은 벌써 4(2시경)이 되었다.

 

87일차

18일 계묘, 맑음. 이른 아침에 군사를 움직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했다. 사도첨사(김 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김 인영), 녹도가장(정 운), 좌우별도장, 좌우 돌격장, 광양2, 흥양대장, 방답2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진해송도)에 매복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 하니 적선 여남은 척이 뒤따라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5척이 재빨리 출동하여 뒤를 쫓을 때 다른 복병선 들이 돌진해 들어가 적선을 에워싸고 수없이 발사하니 왜적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한 놈의 목을 베고 났더니 적의 무리가 크게 꺾여 뒤따라오지 못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여러 배를 거느리고 원포(진해 원포동)에 가서 물을 길었다. 어두워져 영등포 뒤 바다로 돌아왔다. 사화랑의 진영에서 밤을 지냈다.

 

88일차

19일 갑진, 맑음. 서풍이 크게 불어 배를 띄우지 못하고 머물러 출발하지 않았다. 남해현령(기효근)에게 붓과 먹을 보냈더니 저녁에 남해 현령이 와서 사례하였다. 고 여우와 이 효가도 와서 만났다. 그대로 사화랑에 진을 치고 있었다.

 

89일차

20일 을사, 새벽에 배가 출동하자 동풍이 잠깐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큰 바람이 갑자기 불었다. 각 배 들이 서로 부딪쳐 파손 되어서 거의 배를 제어할 수 없었다. 즉시 호각을 불고 초요기로 싸움을 중지 시키니 여러 배들이 다행히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흥양의 1척 방답의 1, 본영의 1척이 부딪쳐 깨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에 가서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이 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려가는데 순천부사(권준)1마리를 잡아 보냈다.

21일 병오, 흐리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이영남과 이여염이 와서 만났고 우수사 원령공(원균)과 순천부사, 광양현감(어영담)도 와서 만났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삼경(자정)에 그쳤다.

 

90, 91일차

22일 정미,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동풍이 크게 불었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하여 사화랑에 가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그친 듯 하기에 길을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니 두 승장(삼혜, 의능)과 의병 성 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장차 육지로 오르려는 것 같이 하고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은 부실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역시 육지에 오르려는 것 같이 하였다. 왜적들이 분주히 우왕좌왕할 때 전선을 모아 곧바로 뚫고 들어가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힘이 약해져서 거의 다 섬멸 되었다. 발포2선과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안했는데 돌입 하다가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이 틈탄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얼마 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자 우후(이몽구)가 바로 들어가 구해 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여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는 짓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매우 통분하다. 이 때문에 수사(원균)을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수사(원균) 때문이다. 돛을 펴고 소진포로 돌아와 잤다. 아산에서 뇌와 분의 편지가 웅천 전쟁터에 왔고 어머님의 편지도 왔다.

 

92일차

23일 무신,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식후에는 원수사가 왔고 순천부사(권준), 광양현감(어영담), 가덕첨사(전응린), 방답첨사(이순신)도 왔다. 이른 아침에는 소비포권관(이영남), 영등포만호(우치적), 와량첨사(이여염)등이 와서 만났다. 원수사는 그 흉악하고 음험함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최천보가 양화에서 내려와 명나라 군사들의 기별을 자세히 전하고 아울러 조어도사의 편지와 공문을 전하고 그날 밤 돌아갔다.

 

93일차

24일 기유, 새벽에 온양과 아산에 보낼 편지와 집에 보낼 편지를 함께 써서 보냈다. 아침에 출발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니 비가 크게 내려 곧바로 배를 댈 수 없으므로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비가 그치자 우수사 이영공(이억기), 순천부사, 가리포 첨사, 진도군수 성언길과 더불어 장막에서 조용히 이야기 했다. 초경에 배 만드는 기구를 들여보내는 일로 패자와 흥양에 보낼 공문을 써 보냈다. 양미 90되로 자염을 바꾸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