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난중일기 필사

난중일기 필사 94~101일차

청풍헌 2017. 6. 17. 20:12

94일차

25일 경술,맑음. 바람결이 순하지 않아 그대로 칠천량에 머물렀다.

26일 신해, 바람이 크게 불었다. 하루종일 머물렀다. 

27일 임자, 맑았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우수사 이영공(이억기)과 만나 이야기했다.


95일차

28일 계축, 맑고 바람도 없다. 새벽에 출발하여 가덕(加德)에 이르니 웅천(熊川)의 적들은 움츠리고 있어 나와서 대항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듯 했다. 우리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리목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돚을 펴고 곧장 가서 작은 섬을 애워쌌다. 경상수상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 2척이 섬에 들락날락 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황당 하므로 잡이다가 영남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내었다. 그의 본뜻은 모두 군곤을 보내어 어부가 건진 사람의 머리를 찾아 내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초경에 아들 염이 왔다. 사화랑에서 잤다.


96일차

29일 갑인 흐림. 바람이 거세질까 연려되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우수사 이영공이 와서 만났다. 순천부사 광양현감도 왔다. 상수사가 와서 만났다.

30일

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97일차

3월

1일 병진, 잠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왔다. 방답첨사가 왔다. 순천부사는 병으로 오지 못했다. 


98일차

2일 정사, 온종일 비가 왔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응화를 불러 한참동안 이야기 하다가 그길로 순천의 배를 보내어 순천부사의 병을 살펴보라 하였다. 이영남과 이여념이 와서 원영공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 더 한탄스러울 뿐이다.#1 이영남이 왜군의 작은 칼을 두고갔다. 이영남을 통해 들으니 "강진에 사는 2명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고성으로 붙잡혀 가서 문초를 받고왔다."고 한다.

#1: 원균이 공로를 탐하여 백성의 머리를 베어다가 왜적의 머리로 보고 하였다. 2월 28일자에 원균의 군관들이 섬을 오간것도 그러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영남이 말한 강진의 2명도 원균의 부하에게 붙들려 갔다가 살아온 사람들이다.(홍기문)


99일차

3일 무오, 아침에 비가 왔다. 오늘은 답청일이나 흉악한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사들을 데리고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들어왔는지를 듣지 못하니 근심스러움을 말로 다하기 어렵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4일 기미, 비로소 개었다. 우수사 이영공이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원영공도 왔다. 순천부사가 병으로 몹시 아프다고 한다. 듣자하니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북로로간 왜적들이 설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개성까지 왔다가 서관으로 되돌아 갔다는 기별이 왔다. 비통하고 빈먼한 심정을 참을 수 없었다. 


100일차

5일 경신, 맑았지만 바람이 매우 사납다. 순처부사가 병으로 도로 간다기에 아침에 직접 만나보고 전송했다. 내일 적을 토벌 하자고 약속했다.

6일 신유,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무리가 육지로 다급하게 달아나산 중턱에 진을 쳤다. 군관들이 쇠 탄환과 편전을 비오듯이 난사하니 죽은자가 매우 많았다. 포로로 잡혀갔던 사천여인 한 명을 빼았아 왔다. 칠천량에서 잤다.


101일차

7일 임술, 맑음. 우수사와 이야기 했다. 초저녁에 출항하여 걸망포에 이르니 날이 이미 새었다. 

8일 계해, 맑음.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은 뒤 광양현감, 낙안군수, 방답첨사등이왔다. 방답첨사와 광양현감은 술과 음식을 많이 준비해 왔고, 우수사도 왔다. 어란포 만호도 소고기 음식 몇가지를 보내왔다. 저녁에 비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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