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여행 이야기

가사문학의 고장 담양을 찾아서

청풍헌 2018. 1. 28. 10:31

담양하면 죽세공품의 고장이다. 대나무는 절개를 나타내며 사철 푸르른 기상을 자랑한다. 이와 같이 담양은 절개의 고장이다. 이곳에 선비정신과 원림의 문화가 있는 소쇄원(瀟灑圓)이 있다. 소쇄원은 민간의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전라남도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곳은 조선중기 양산보가 지은 별장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사되자 낙향하여 세웠다. 이곳으로 많은 인물들이 모여들어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여 가사문학을 이끌었다. 송강 정철을 비롯하여 김인후, 고경명등도 소쇄원에 대한 가사문학을 남겼다. 또한 1775년 소쇄원에 대한 목판을 제작하여 인쇄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소쇄(瀟灑)맑고 깨끗하다라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내원(內圓)을 말한다. 내원(內圓)은 많은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필수 코스로 특히 조경, 건축학도들이 영감을 얻는 곳이다. 손님의 공간(광풍각, 光風閣)과 주인의 공간(제월당, 霽月堂)으로 구분하여 정자를 짓고 시문학을 논하였다.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로운 건축과 조경미가 어우러지는 담장이 그대로 남이 있으며 성황당과 우물도 남아있다. 계곡의 흐르는 물길을 담장 안으로 끌어들인 기막힌 조화는 조경학의 박사논문으로 증명되었다고 한다. 담장에는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라는 현판이 있으며 제월당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 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내면이 훨씬 깊고 크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충장공 김덕령은 임진왜란 시 의병으로 궐기하여 이몽학의 난에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여 현종 때 복원되고 정조 때 충장공으로 시호되고 현양 되었다. 그의 고향을 충효리라 명명하고 형 덕홍과 동생 덕보도 함께 정려 되었다. 동생 덕보는 두 형의 죽음을 보고 낙향하여 풍암정을 짓고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교류 하였다. 충장사에는 뒤편에 김덕령의 묘소가 있으며 이장을 하면서 많은 복식들이 출토되어 당시의 무장들이 어떤 옷을 입고 생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있다. 풍암정으로 가는 길은 고즈넉했다. 무등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에 자리한 풍암정은 풍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충민공 전상의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에 들렀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경매에 나온 전상의 장군의 유물을 기탁했다는 것 때문에 광주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곳으로 대접받는다고 한다. 전상의 장군은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장군이다.

 

담양권의 문화유적을 둘러 본 소감은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보아야함을 느꼈다.


20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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