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통영의 "물" 그 역사를 찾아서-1(통영성 아홉개의 새미를 찾아서)

청풍헌 2011. 11. 2. 21:28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원천은 물이다.

그 옛날 통영성내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물을 먹고 살았는지 궁금 하였다.

 

 통영성 축성 선조 37년(1604) 통제영이 이곳 두룡포로 옮겨 설치된 이래 여기의 주산 여황산 남쪽 기슭인

지금의 문화동과 중앙동의 골짜기에서부터 그 아래 통영항 강구 해안까지 수많은 관아들이 터를 잡아 즐비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본영이 크게 번창하자, 숙종 4년(1678) 윤천뢰(尹天賚) 통제사 때 세병관을 중심으로 한 1백여 채의 영문(營門)을 방비하기 위해 주위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이 통영성은 북쪽 여황산 능선의 일부 토성(土城)을 제외하면 대부분 높이 약 4.5m(1丈半)의 석성(石城)이었으며, 총길이 약 3.6㎞(2,346步)의 규모였다. 그리고 성곽에는 아치형 성문 위에 누각이 있는 4대문(大門), 즉 현 문화동 농협 앞, 태평동 동문고개,

문화동 서문까꾸막, 태평동 토성고개에 각각 남문(淸南門), 동문(春生門), 서문(金肅門), 북문(衣斗門)과

이를 보조하는 작은 동암문(東暗門, 씨거문)과 남암문이 축성되었으며,

그리고 성내에는 3개의 못(三池)과 9개의 공동우물(九井)이 시설되었다. 그후 숙종 20년(1694) 목림기(睦林奇) 통제사 때에는 성곽이 지나는 여황산, 뚝지먼당, 동피랑의 각 산정에 산성청 군사들의 순찰 및 경비를 위한 군영초소인 3포루(鋪樓, 북·서·동포루)를 지어 통영성을 방비했다.

위와 같이 옛문헌에 통영성내에 아홉개의 새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상지변정(新上池邊井)

북문내로변정(北門內路邊井) 두개의 새미

서구상로변정(西舊上路邊井)

동락로변정(東樂路邊井)

주전동정(鑄錢洞井)

하동문로변정(下東門路邊井)

남문내인가중(南門內人家中)

동부로변정(東部路邊井)

이렇게 아홉개의 새미가 있었다는데 그 새미를 추적해 보자.

 

신상지변정-이곳은 태평동 통영 포교당 법륜사 입구에 있는 못새미 이다.

본래 더 아래쪽에 있었으나 4차선 확장공사로 위쪽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우물에 숯,자갈등을 시공하여 양수기를 설치 비상용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충무시민의 새미였다고 회상한다.

북문내로변정1-이곳은 토성고개에서 산복도로 가는 길에서 세병로쪽에 있는 새미이다.

우물井자의 돌로 시공된 원형이 살아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우물가의 둘레 테두리 돌도 그대로이며 지붕의 기둥을 세웠던 기둥돌도 있다.  

 

 

 

이 우물 측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있었다.辛亥七月日金,,,,,,,,,,,,,,,,

기둥돌 측면에는 신야일神野一 나머지는 시멘트에 묻여 알아볼 수 가 없다.

아마도 후세 즉 일제시대 일인들이 쓴것으로 추정된다.

 

 

새미 안은 옛날돌 그대로 이며 사용을 안하여 고인물이 썩어 악취가 난다.

북문내로변정2-안새미 두곳중 한곳은 원형대로 남았으나 한곳은 이곳 북문지 근처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형태도 없다.

서구상로변정-이곳은 구통영청년단회관 아래에 있는 관창골 새미이다.

관창골은 이곳에 통제영의 많은 관아官衙가 밀집해 있던 곳으로 관청골이 와전된 것이다.

관창골 우물 팻말

동락로변정-이곳은 문화동 벅수앞에 있던 박석골 새미를 말한다.

박석골은 통제사가 기거하던 운주당 및 세병관 가는길이 미끄러워 납짝한 돌을 깔았다 하여 박석고개 박석골 이라 했다.

이곳은 세병관에서 충무교회로 가는길인데 이곳 어딘가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주전동정-이곳은 동문고개에서 주전1길로 200m 정도 올라가면 좌측 공터에 새미의 둘레돌이 원형대로 있는 새미이다.

원경과 근경이다.우물에 아무 표식도 없으며 철판으로 뚜껑을 하여 방치되어 있었다.

소중한 유물이 방치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하동문로변정-이곳은 동문로에서 동피랑 올라가는 입구 우측 골목으로 진입하여

우측으로 꺽어 약 50m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새미이다.

 

 

이 새미는 주민들이 식수로는 사용하지 않으나 허드렛물로 사용을 하여  물은 깨끗했다.

남문내인가중-이곳은 충무교회앞 봉래극장터 주차장 인데 입구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확실히 전하는바는 없다.

 

동부로변정-일찍 폐쇄되어 위치와 흔적을 찾을길 없다.

 

 

 

세종27년(1445) 정인지가 지은 용비어천가의 2장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됴코 여름 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찬란하게 피고 열매가 많습니다.

원천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아니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갑니다.

 

 

위와 같이 우리 선조들의 오랜 생활에 새미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 이었다.

이른 새벽에 정한수를 떠놓고 가족의 안위를 비는 우리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새미

300년 이상된 통영성내의 새미가 이렇게 방치된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존하는 새미를 잘 복원하여 통영 예술의 향기 길에 포함시켜 탐방 장소로 복원하면

훌륭한 문화 재산이 될것이다.

 

2011.11. 통영 새미에서 백세청풍 김용재